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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26_01 타고 가리는 방법

증도가 현각의 노래

뉘 염(念) 없으리오,

뉘 남이 없으리오,


하다가 실(實)로 무생(無生)인댄 불생(不生)도 없으니,


기관목인(機關木人)을 불러 물으라,

부처 구하여 공 들이면 어느 제 이루리오,


언해의 토, '호리니, 그대를 향한다. 그리고 바로 이 마디가 이어진다. 언해는 '알게코자 불러낸 구절'이라고 한다. 남명은 '금강이 문 밖에 노(怒)를 먹었다'고 한다. 언해는 '곁의 사람이 늙은 할매 마음을 웃나다'라고 한다.

'영가(永嘉)가 조계(曹溪)에 가샤 하룻밤 자시고, 문 밖의 이 구절을 불러 내시니,

영가(永嘉)가 조계(曹溪)에 가샤 하룻밤 자시고, 무생(無生)을 아시니,


다시곰 이어지는 언해의 말투, 빈 말일리가 없다. '영가(永嘉)가 조계(曹溪)에 가샤 하룻밤 자시고', 이게 바로 이 노래의 실끝이다. 무념(無念)과 무생(無生), '염(念) 없음'과 '남 없음', 언해는 '조계의 구절'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영가는 대뜸 이 구절을 다시곰 묻는다. 조계에서 얻은 '염(念) 없음'이고, 조계에서 안 '남 없음'이다. 영가는 조계의 구절을 타 가리려 든다.

강해(江海)에 헤다니니,

뫼콰 내콰를 건너,


스승 찾아 도(道) 물음은 참선을 위함이니,


조계(曹溪)의 길 아롬을부터,

생(生)과 사(死)가 서로 붙지 않은 줄 사뭇 아니,


영가는 '조계의 길'이라고 부른다. 놀 유(遊), 언해는 '헤다니다'라고 새긴다. 도를 물어 볼 스승은 어디에 있을까? 그걸 안다면 바로 찾아 가면 된다. '뫼콰 내콰를 건너', 모르니까 헤다닌다. 영가는 육조를 만나기 위해 천태산에서 조계산까지 1,200 Km의 길을 갔다. 남명은 '일조운남(一條雲衲)의 생애'라고 노래한다. 언해는 '한 올의 구름누비, 이 생애로다'라고 새긴다. 영가는 그렇게 육조를 만났다. 그를 만나 안 길, 몸으로 찾아가서 몸으로 마초아 몸으로 안 길이다. 그래서 부른 노래가 '도를 증한 노래'이다. 영가는 다시 '생과 사'를 알았다고 한다. 언해의 말투는 '구울어 횟도는 죽살이의 바랄'이다. '서로 붙지 않은 줄', '대(對) 긋거니', 절대(絶對)의 말투가 이어진다. 영가가 그대를 향하여 분명히 타 가리겠다는 일, 조계에서 얻은 '염(念) 없음'이고, 조계에서 안 '남 없음'이다. 영가는 먼저 그걸 묻는다. 그걸 뒤집는다. 그걸 타고 가리는 방법, 작대의 말투이고 절대의 방법이다.

요지생사(了知生死)가 불상간(不相干)호니,

생(生)과 사(死)가 서로 붙지 않은 줄 사뭇 아니,


간(干)이란 글자를 '붙다'라고 새긴다. 생(生)과 사(死)도 짝이다. 서로 붙지 않는 죽살이, 이건 모순의 말투이다. 생(生)은 짝의 한 끝이다. 사(死)는 짝의 다른 끝이다. 오직 생을 보고, 사를 잊는다. 오직 사를 보고 생을 잊는다. 오직 한 방향을 바라 보는 일, 그러면 모순이다. 영가는 같은 말을 다시곰 한다. 이 끝을 보려면 저 끝을 바라야 한다. 저 끝을 보려면 이 끝을 보라고 한다. 끝과 끝이 서로를 향하면 '대(對) 긋거니', 그걸 '사뭇 알아'라고 부른다. 요즘의 말투와는 사뭇 다르다. '사뭇 긋거니'의 말투, 오랜 동안 잊혀졌던 말투이다. 처음엔 낯설지만, 금방 쉬워지는 언해불전의 우리말투이다.

기관목인(機關木人)을 불러 물으라,

부처 구하여 공 들이면 어느 제 이루리오,


기관목인 판타지, 기관목인은 몸을 가잘빈다. 기관으로 뮈는 나무 사람, 염(念)이 있을 리 없다. 남이 있을 리 없다. 염도 없고, 남도 없으니 아롬도 있을 리 없다. 기관목인의 몸, 사대가 엉겨 뮈는 사람의 몸은 어떨까? 기관목인은 몸을 타고 가리는 가잘빔의 말투이다. 내 몸도 몸이다. 그래서 영가는 다시곰 묻는다. 부처 구하여 공들이면 어느 때나 이루려나? 그대의 몸은 어떤데? 부처를 구하는 일, 작대의 말투를 따르자면 제 몸을 향해야 한다. 제 몸을 향하는 사이에 아롬이 있다고 한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