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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19_01 브터니닷의 말투

증도가 현각의 노래

문(文)을 붙어 의(義)를 궁구하며

의(義)를 붙어 문(文)을 찾으면,

문의(文義)의 그른 것이 작은 터럭만도 숨지 않아,

말갓말갓이 밝게 나타남이,

세상의 병맥이 어진 의원의 손에서 도망치치 못하듯 하리라.


『금강경삼가해』, 함허의 말투이다. 문(文)과 의(義)를 짝으로 가린다. 글과 뜻의 짝이다. 이건 작대(作對)이다. 연문구의(緣文究義), 연(緣)이란 글자를 '붙어'라고 새긴다. 의의심문(依義尋文), 의(依)란 글자도 '붙어'라고 새긴다. '붙어', 언해불전의 독특한 말투이다. 글에 붙어 뜻을 찿고, 뜻에 붙어 글을 찿는다. 글과 뜻의 짝이 상대, 서로를 향하고 서로에 붙는다. 이건 향대(向對)이다. 함허가 글과 뜻을 다루는 방법이고 기술이다. 요즘엔 논술이란 말을 쓴다. 대(對)를 갈라 보고, 대(對)를 붙여 살핀다. 글과 뜻이 서로 돕는 말투, 함허는 이런 말투를 어진 의원의 손, 금상첨화의 솜씨에 견준다. 연기(緣起)라는 말, 불교를 대표하는 열쇠말이다. 언해불전은 이 말을 '브터니닷'이라고 새긴다. 그래서 나는 함허와 언해의 말투, 글과 뜻을 다루는 방법, 논리와 논술을 '브터니닷의 말투'라고 부른다. 대(對)를 세우고, 대(對)에 붙어 글과 뜻을 맞추는 기술이다.

욕출윤회생사해(欲出輪廻生死海)인댄

수종북두(須從北斗)하야 망남성(望南星)이어다


구울어 횟도는 죽살이의 바랄에, 나고자 할진댄

모로매 북두(北斗)를 좇아, 남성(南星)을 바랄지어다


이건 남명의 노래이다. 여기에도 글과 뜻의 짝이 있다. 이 구절, 글도 새롭고, 뜻도 새롭다. 게다가 언해의 우리말 새김, 글과 뜻이 척척 맞는다. 언해불전은 이럴 때 '맛닫다'라는 말을 쓴다. '맞닥치다'의 옛말이란다. 서로를 향헤 활을 쏜다. 화살과 화살이 허공에서 '맛닫는다'. 글과 뜻이 딱 달라 붙는 모습이다. '브터니닷의 말투', 나는 이 구절을 모범으로 삼는다.

모범(模範)은 법(法)이니, 나무로 본을 만들씨 모(模)요, 대로 만들씨 범(範)이라


모범은 쇠를 부어 그릇을 만들기 위한 거플이다. 언해불전은 '본'이라고 풀이한다. 나무나 대로 그릇을 모양을 지어 고운 모래에 거푸집을 만든다. 쇠를 부어 무기도 만들고 돈도 만든다. 나는 언해불전의 우리말투를 '세종의 실험'이라고 부른다. 새로 만든 글자에 담을 수 있는 우리말투의 실험이다. '서르 사맛디 아니할새', 세종은 '사맛디'라는 말을 썼다. 한자에 사맛는 한자말투가 있었다면, 새로 만든 글자에 사맛는 우리말투가 있을 터이다. 말하자면 저런 새김과 풀이는 새로운 우리말투의 거플이고 거푸집이다. 새로운 글자를 써서 우리의 말과 뜻을 유통하기 위한 방법이고 모범이다.

글과 뜻, 또는 말과 뜻, '브터니닷의 말투'는 말과 뜻이 서로 붙고 서로 찾는 말투이다. 이 말투는 작대(作對)로부터 시작한다. 작대(作對)의 말투는 대(對)를 가르는 말투이다. 작대의 말투는 대(對)를 향한다. 글을 향하고, 뜻을 향안다. 글과 뜻을 가르고 본다. 저 노래 구절에 담긴 뜻, 이게 좀 긴 이야기이다. 말하자면 언해불전의 말투, 브터니닷의 말투, 어차피 뜻을 통하자는 것이다. 글과 뜻이 서로 붙고 서로 찾는 이야기, 통하고자 하는 뜻을 싸고 돈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언해의 새김과 풀이, 언해의 글을 향해 보기로 하겠다.

남성(南星)은 생사(生死)이라.

북두(北斗)는 열반(涅槃)이라.


하다가 능(能)히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둘 아닌 땅을 밟으면,

생사(生死)에 윤회(輪廻)함이 붙지 못할새, 이르시되

윤회(輪廻)하는 '생사(生死)의 바랄에 나고자 할진대는

모로매 북두(北斗)를 좇아 남성(南星)을 바랄지어다' 하시니라.


언해는 이 구절을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라는 대(對)로 갈라 읽는다. 언해는 생사(生死)를 '죽살이'라고 읽는다. 생사해(生死海)는 '죽살이의 바랄'이라고 새긴다. 생사라는 말이야 불교에서만 쓰던 말도 아니다. 이런 한자말을 이런 우리말로 고쳐 새기는 일, 나는 이런 일을 '모험'이라고 부른다. 모험은 위험하다. 성공하기 보다는 실패하기 쉽다. 세종의 실험은 위험하고 무모한 실험이었다. '죽살이'란 말, 입에도 착착 붙는다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어쨌건 이런 거플, 상상하고 시도했다는 것 만으로도 놀랍다. 윤회(輪廻)는 '구울어 횟도는'이라고 새긴다. 죽살이도 놀랍지만, '구울어 횟도는'은 더 놀랍다. 이 말은 불교의 전문용어이다. 오랜 동안 한자말로 입에 붙은 말이다. 불교를 좀 안다는 사람들의 말투, 이런 말을 고쳐 새기는 일은 정말로 쉽지 못하다.

출(出)이란 글자는 '나다'라고 새긴다. 요즘엔 '벗어나다'고 한다. '구울어 횟도는 죽살이의 바랄에, 나고자 한다면', 언해의 말투를 곰곰 따져 보면, 이 말이 그대로 불교이다. 부처가 말문을 연 까닭, 사람들이 그 말에 붙는 까닭, 이 구절이 전부이다. 이 구절에 담긴 뜻, 그래서 부처는 말에 붙어 사람을 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에 붙어 부처를 향한다. '구울어 횟도는 죽살이의 바랄', 언해는 저런 말을 찾았다. 새로 만든 글자로 쉽게 적을 수 있는 말, 윤회니 생사니 따로 배우고 익히지 않아도 척하면 척 알 수 있는 우리 말의 거플이다. 말투의 실험이고 말투의 모험이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