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02_04 이 노래의 실끝

증도가 현각의 노래

예 영가가 육조 뵈옴에

막대 흐늘고 서,

눈 닿음에 도가 있거늘

적이 머물어 하루 밤을 잤다.


이로부터 도(道) 증(證)한 노래를 지으셨다.


『증도가남명계송』, 이 노래의 본래 이름은 『남명천송영가증도가(南明泉頌永嘉證道歌)』이다. 이 책 후서(後序)의 구절이다. 언해불전은 서(序)를 '실끝'이라고 새긴다. 실의 앞에도 끝이 있고, 뒤에도 끝이 있다. 앞이나 뒤나, 실끝을 잡으면 실뭉치가 풀린다. 앞과 뒤, 양 끝을 잡으면 '마촘'이고 '마좀'이다. 써야 할 때, 뜻대로 쓸 수 있다. 이 노래의 실끝은 영가현각과 육조혜능의 만남이다. 이 끝을 모르면 이 노래를 알 수 없다. 이 노래를 책으로 만든 사람들의 뜻이 그랬다. 이 노래를 아는 사람들의 뜻이 다 그랬다. 이 노래의 실끝, 이게 은근 재미있다.

1. 막대 흐늘고 서,                진석이립(振錫而立)

2. 눈 닿음에 도가 있거늘,         목격이도존의(目擊而道存矣)

3. 적이 머물어 하루 밤을 잤다.    소주일숙(小駐一宿)


뭐랄까,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증도가』, 인도에서 온 스님이 인도로 돌아가 범어로 번역하여 퍼뜨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시아 대륙, 그 때의 세계, 말하자면 월드클래스의 유행가였다는 말이다. 이야기의 요점은 저 세가지다. 나는 무엇보다 언해불전의 번역이 기막히다. 스님들이 들고 다니는 막대, 요즘에도 석장이니, 주장자니, 육환장이니, 어려운 말로 부른다. 언해불전은 그저 '막대'이다. '흐늘고'는 '흔들고'의 옛말이란다. 그래도 나는 '흐늘고', 이 말이 더 좋다. 일부러 흔드는 게 아니다. 막대기를 들고 짚고, 휘적대며 다니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 모습은 운납(雲衲), 구름누비의 위엄이다. 싁싁함이다. 아무튼 현각은 저렇게 혜능 앞에 섰다. 예의를 나름 갖추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나고 죽는 일이 바쁘기 때문이다. 물론 구구절절 묻지도 않는다. 그냥 그렇게 섰다. 이건 현각의 '나톰'이다. 혜능은 짐짓 꾸짖는다. 사문이 되어 위엄도 예의도 없이...... 이건 혜능의 나톰이다. '눈 닿음에 도가 있거늘', 이건 『장자(莊子)』의 구절이다. 척 보면 다 안다. 훤하고 번득하다. 이게 바로 '마촘'이다. 나톰과 나톰이 딱 들어 맞았다. '마초 아롬', 그렇게 혜능은 현각을 증(證)했다. 그렇게 현각은 혜능을 증했다. 나이 든 혜능은 스승이 되고, 젊은 현각은 제자가 됐다. 예의도 위엄도 그 뒤의 일이다. 바쁜 현각은 돌아 가고 싶다. 아쉬운 혜능은 적이 머무르라 한다. 그래서 하루 밤을 잤다. 그래서 '일숙각(一宿覺)'이라고들 불렀다. 말을 늘이자면 한도 없다. 저 세가지는 모두의 상식이 되었다. 저 세가지가 이 노래의 끝이다.

표(標)는 나토아 보람할시오, 격(格)은 나토온 법(法)이라

옛 성인의 냇보람을 봄이 마땅하거늘


저 세가지, 나는 현각의 냇보람이라고 부른다. 영가현각이란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저 세 가지를 떠올린다. 누구나 아는 만남, 모범이 되고 표준이 되었다. 연습도 하고 흉내도 낸다. 나톰과 마촘의 틀이 되었다. 이런 냇보람, 처음에는 좋았지만, 갈수록 병이 된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틀은 프레임이 되기도 한다. 현각과 혜능, 그리고 우리 모두를 꽁꽁 옭아 매기도 한다. 외우고 흉내낸다고 맞는 게 아니다. 마촘은 커녕 괴뢰가 된다.

도는 본래 증 없거늘, 증하고 노래 하시니, 비록 말씀 있을을 면치 못하시나, 마침내 허물이 없으시니라.


그러면 후세에 이 노래를 붙어 알아 든 사람은,

알지 못하리로다, 그 얼마나 될까?


또 붙어 주(註)하여 사긴 사람은,

또 알지 못하리로다, 그 얼마나 될까?

그러나 진실로 영가의 뜻을 얻은 사람이 어려우니라.


천공(泉公) 선사가 그 무리에서 솟아 나서 천경(千頃)의 대중을 거느리시는 여가에, 그 노래 구절과 구절의 사이에 나누어 송(頌)을 지으시니


이 것은 또 다른 실끝이다. 이번에는 현각과 법천이 만난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4백년의 틈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전해 오는 노래로 만난다. '사기다'는 주석(註釋)이다. 현각의 노래를 풀고 사긴 사람들도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는 말이다. 그래도 '영가의 뜻을 얻은 사람', 어렵다고 한다. 나톰과 마촘이 어렵다는 말이다. 천경(千頃)은 산 이름이고, 절 이름이다.

열어 뵈어 알아 들게코자 하샴과 같으시니


개시오입(開示悟入)이란 말이 있다. 열어 보이는 일은 '나톰'이다. 오(悟)는 '아롬'이다. 입(入)이 바로 '마초 아롬'이다. 이 노래를 붙어, 이 노래로 인하여 '알아 든 사람'은 그 얼마나 될까? '알아 든 사람', '진실로 영가의 뜻을 얻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렵다고 한다. 이 노래는 영가의 노래이다. 이 마촘은 노래에 맞추는 일이다. 영가의 노래와 제 노래를 맞추는 일이다.

그 말이 쇄락(灑落)하며,

그 뜻이 어위 크고 멀어,

말갓말갓이 영가의 마음을 수백년 멀리 그친 뒤에 펴시니


쇄락(灑落)은 '깨끗하다'는 말이다. 언해불전은 '좋다'라고 새긴다. 요즘말로 치자면 '말투가 번득하고, 자유분방'하다는 뜻이다. 굉원(宏遠)은 '어위 크고 멀어', 굉장히 크고 굉장히 멀다는 말이다. 소소(昭昭)는 '말갓말갓'이라 새긴다. 이것은 현각과 법천의 노래를 한데 묶어 출판하는 사람의 실끝이다. 그들의 뜻은 다 미래를 향한다. 미래의 모르는 사람에게 주고자 한다. 미래로 주는 글, 그래서 그들의 뜻은 '어위 크고 멀다'.

언해불전은 오입(悟入)을 '알아 들다'라고 새긴다. '말갓말갓', 이런 말도 참 정겹고 즐겁다. 하지만 나는 '알아 들다'라는 새김이 놀랍다. '아롬', '나톰', '마촘', 이런 말이 놀랍다. 하나하나가 열쇠말이다. 이런 말을 참 편하게도 쓴다. 이런 말로도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을 넉넉히 나톤다. 요즘의 한문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세종과 두 아들이 하던 일이 바로 이런 일이었다. 미래의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 말이 어렵고 글이 어려워 알 기회조차 가질 수 없는 사람들, '어위 크고 먼' 뜻이다. 알아 들게코자, 누구나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는 말, 깨끗하고 좋은 말로 말갓말갓이 펴고 싶었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