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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25_01 모순의 말투

증도가 현각의 노래

오늘날에 분명(分明)히, 모로매 타 가리리니


어찌 부지런히, 세정(世情)을 좇으리오

뜬 구름 헤어져, 외로운 달이 돋으니

대천사계(大千沙界)가, 한끠에 밝도다


세정(世情)을 좇다 함은 의심(疑心)하여 신(信)하지 않아, 능(能)히 가리지 않을시라.

셋째 구(句)는 오음(五陰) 구름이 열어 달이 하늘에 가득할시라.

한끠 밝다 함은 심월(心月)이 외로이 두려워 광명(光明)이 만상(萬像)을 머금을시라.


언해의 '호리니', 이건 '하염'이다. 영가는 오늘날에 뭔가를 '하려고' 한다. 무위(無爲), '하욤없음'의 겨르로운 도인이 새삼 뭘 하겠다는 걸까? '모로매', 모름지기의 옛말이란다. 이런 말도 아깝다. 글자의 틀을 따라 가야 하는 노래, 글자를 아껴야 한다. 이런 노래 우리말로 새겨 보면 금새 안다. 모로매와 모름지기, 때에 따라 골라 쓸 수 있다면 어떨까? 말의 나맟이 든든해지는 기분이 든다. 어쨌든 모로매, 뭘 하더라도 꼭 하겠다고 한다. 하고자 하는 일은 부석(剖析)이다. 쪼개고 또 쪼개고, 언해는 '타 가리다'라고 새긴다. 뭘 타고 뭘 가릴까?

아래부터 제 매었던 줄, 처음 신(信)하라

영(靈)한 광명(光明)이 밖에 가, 득(得)하지 않은 줄 처음 신(信)호라


남명은 '세정(世情)'이라고 한다. 사전은 '세간(世間), 또는 세상의 실정(實情)'이라고 풀이한다. 언해는 이를 다시 '의심하여 신(信)하지 않아'라고 풀이한다. 믿지 않기 때문에 가리지 않는다. 남명은 거듭 '처음 신(信)하라'고 한다. 이건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물론 '그대'이다. 영가의 노래, '듣글 묻은 거울', 남명은 '그대의 거울'로 읽는다. 영가가 오늘날 타 가리려는 거울도 '그대의 거울'이다.

꿈 속에 명명히(明明)히 육취(六趣)가 있나니

깬 후(後)에 비어 대천(大千)이 없으니


영가는 '꿈과 깸'을 마주 세운다. '모롬과 아롬'의 짝이기도 하다. 남명은 꿈과 깸의 짝을 '굴러 횟도는 죽살이의 바랄에서 나고자 할진대는'이라고 노래한다. '생사의 윤회와 벗어남'의 짝이다. 그리고 다시 '남성과 북두'의 짝으로 노래한다. 남명의 세정은 '굴러 횟도는 죽살이의 바랄'이다. 언해는 남명의 짝을 '생사와 열반'의 짝으로 읽는다. 언해는 '죽살이와 없음'의 짝으로 새긴다. '하욤'과 '하욤없음', 언해는 '알게코와 없게코'의 짝으로 읽는다. 알게코는 영가의 하욤이다. 영가는 '그대를 위하여'라고 노래한다. '그대를 알게코자'이다. 알고자 하면 믿어야 한다. 믿으면 타 가리게 된다. 타 가리면 안다. '타 가림'은 하욤이다. 하지만 '아롬'은 하욤이 아니다. 남명의 '뜬 구름', 언해는 오음의 구름이라고 읽는다. 구름이 헤어지면 달이 외롭다. 누구나 본래 제 뒷논 마음의 달이다.

하다가 삼독(三毒)을 앗지 못하여

육진(六塵)이 산제 어지르면

몸과 마음이 제 서로 모순(矛盾)커니

어찌 인간(人間)과 산(山)에 들에며 고요함에 걸리오


모(矛)는 창(槍)이오, 순(盾)은 방패니,

옛 사람이 두 것을 함께 팔되,

각각의 어짊을 기리거늘,


지자(智者)가 이르되,

내가 네 창을 사, 도로 네 방패를 찌르리라 하니,

서로 어김을 가잘비시니라.


『선종영가집언해』의 구절이다. 이 또한 영가현각의 글이다. '하욤없음'과 '호리니', 언해의 말투이다. 위(爲)와 무위(無爲), 하욤과 하욤없음, 죽살이와 열반, 있음과 없음, 짝의 말투이다. 몸과 마음이 '서로 모순커니'. 영가는 모순이라는 말을 쓴다. 그 아래로 친절한 풀이가 이어진다. 창과 방패의 짝, 장사꾼의 말투이다. 언해는 승능(勝能)을 '어질다'라고 새긴다. 언해불전은 승열(勝劣), 또는 우열(優劣)의 짝을 '어질다-사오납다'의 짝으로 새긴다. 장사꾼은 제가 파는 창의 '어짊'만을 바라본다. 뾰족하고 날카롭다. 무엇이든 다 뚫는다. 그런데 방패를 팔 때는 방패의 '어짊'만을 바라본다. 두껍고 단단하다. 무엇이든 다 막는다. 좋은 쪽만 바라보는 거야 장사꾼의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한 사람이 창과 방패를 다 팔아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제 말이 서로 어기기 때문이다.

하다가 도를 아지 못하고 산에 사는 이는

오직 그 산을 보고 반드시 그 도를 잊으리며


하다가 산에 살지 아니 하여도 먼저 도를 안 이는

오직 그 도를 보고 그 산을 잊으리니


도 보고 산 잊은 이는 인간도 또 고요하거니와

산 보고 도 잊은 이는 산중이 들에나니라


어찌 인간(人間)과 산(山)에 들에며 고요함에 걸리오


영가의 모순은 몸과 마음의 모순이다. 저 글은 어떤 스님과 주고 받은 편지의 부분이다. 그 스님은 고요한 산 속에 산다. 영가는 들에난 인간에 산다. 언해는 훤적(喧寂)을 '들에다-고요하다'의 짝으로 새긴다. 새들이 모여 짺짹댄다. 사람들이 시장 바닥에 모여 와글댄다. 그런 게'들에다'이다. '들에다'와 '고요하다', 인간과 산, 도와 산, 영가는 짝의 말투로 이야기한다. 짝의 말투는 방향에 걸린다. 오직 고요함을 보는 이, 오직 산을 보는 이, 이들은 하나의 방향만을 바라 본다. 다른 짝을 보지 않는다. 이 것이 영가의 모순이다. 오직 창의 어짊만을 바라 보는 이, 오직 방패의 어짊만을 바라 보는 이, 이 들도 하나의 방향만을 바라 본다. 짝을 보지 않는다. 이 것도 영가의 모순이다. 짝의 말투는 모순의 말투로 이어진다. 하욤과 하욤없음도 짝이다. 하욤만 바라 보는 이들도 있다. 하욤없음만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이들도 짝을 보지 않는다.

내가 네 창을 사, 도로 네 방패를 찌르리라 하니,


이 것이 언해의 '호리니', 영가의 하욤이다. 창의 어짊으로 방패의 어짊을 찌른다. 둘 가운데 하나, 사오나움이 드러난다. 그것이 모순을 드러내는 길이다. 영가는 타 가리겠다고 한다. 짝의 방향을 가리는 일이다. 다른 짝을 가리킨다. 짝의 말투에서 오직 한 방향만을 바라 보는 일, 그러면 모순의 말투가 된다. 방향을 돌리면 짝이 긋는다. 모순도 긋는다. 이것이 영가의 말투이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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