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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세계

6.3 간섭하는 세계


어찌 이름이 중생의 세계요?

일체 중생이 망(妄)을 짜 서로 이루어 몸 가운데로 바꾸어 옮겨, 세와 계가 서로 든다.


'세(世)와 계(界)가 서로 든다.' 세계상섭(世界相涉)이란 구절을 이렇게 새긴다. 섭(涉)은 물론 간섭의 섭이다. 상섭(相涉)이란 말, ‘서로 붙다’라고 새긴다. 때로는 ‘서로 섞다’라고 새기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서로 들다’라고 새긴다. 옛말이라곤 하지만, 이런 게 우리말의 맛이다. 그렇다면 ‘서로 들다’는 ‘서로 붙다’와 어떻게 다를까? '들다'는 '올마흘롬의 그슴' 안으로 들어 가는 일이다. 서로의 그슴이 다르다. 다른 그슴을 가진 이들이 다른 그슴 안으로 서로 들어간다.  

아이가 울거든 부모는 곧 버들의 누른 잎을 들고 ‘울지 마라, 너에게 금을 주겠다’라고 한다. 아이가 (누른 잎을 보고) 진실의 금이라고 여겨 울음을 그친다. 그러나 버들잎은 실로 금이 아니다.


진실의 금과 버들의 누런 잎, 진실의 금과 허망의 금, 진(眞)과 망(妄)의 짝이다. 참과 거짓의 짝이다. '참되다'와 '외다'의 짝이다. 참된 것에는 얼굴이 있다. 이에 비해 왼 것에는 얼굴이 없다. 이것은 진(眞)과 허(虛)의 짝이다. 얼굴이 없기 때문에 비었다고 한다. 망(妄)은 아롬에 관한 말이다. 그르 알고, 외오 아는 것을 망(妄)이라 부른다.

'망(妄)을 짜', 직망(織妄)을 이렇게 새긴다. 옷감을 짜듯 망(妄)을 짠다. 세계관이란 말이 있다. '망을 짜', 이 말에는 언해불전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요즘 말과는 좀 다르다. 중생의 세계는 거짓으로 서로 짜는 세계이다. 그릇된 아롬으로 서로 들어가는 세계이다. 중생의 세계, 중생은 하나가 아니다. 여럿이 모인 무리이다. 중생은 모르는 이들이다. 그르 아는 이들이다. 제가 저의 거짓을 짓는다. 중생은 거짓과 그르 아롬으로 서로 붙는다. 서로의 세계로 들어간다.

나에게는 나의 얼굴이 있다. 낯도 있고 낯의 양자도 있다. 제 몸의 올마흘롬, 제 스스로 금을 긋는다. 그런데 금을 긋는 일은 제 일이 아니다. 세계로부터 옮겨 온 것이다. 우리의 세계에는 금을 긋는 방식이 있다.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방식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런 방식, 이런 일을 배운다. 배우는 일이 옮겨 오는 일이다. 거짓과 그르 아롬으로 짜인, 서로가 들어 짜아 놓은 천이고 그물이다. 옮아 흐르는 뉘도 옮아 흐르는 수(數)도 내 몸으로 바꾸어 옮긴 것이다. 중생의 세계가 내 몸안으로 들어 온다. 내가 다시 중생의 세계로 들어 간다. 세와 계, 중생의 세계는 그렇게 서로 짜서 만든 것이다. 작위(作爲), 또는 작용(作用), ‘하저즐다’라고 새긴다. 인위(人爲)란 말도 있다. 사람이 짓는 짓이다. 중생이 서로 함께 천을 짜듯 서로 이룬 것이다.

말을 좀 바꿔 보자. 잊지 못할 추억이랄까, 사람마다 그런 추억을 갖고 산다. 오래 전 배를 타고 울릉도를 간 적이 있었다. 그렇게 오랜 동안 배를 탄 것은 처음이었다. 제법 파도가 쳐서 멀미를 했다. 마루 바닥에 누워 있다가 답답하여 갑판으로 나갔다. 바람도 파도도 거셌지만, 날은 맑았다. 망망대해, 난 처음으로 그런 걸 보았다. 동서남북을 돌아 보니 완전한 원이었다. 원의 한 가운데에 내가 서 있었다. 원은 내가 볼 수 있는 한계였다. 내 눈의 한계, 내 눈의 금이었다. 배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원도 따라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그래도 한 가운데에 있었다. 움직이는 원의 한가운데. 배는 물결을 따라 오르내렸다. 하늘을 보니 원이 아니라 구(球), 공이란 생각도 들었다. 처음 본 것, 나는 그 때 ‘세와 계가 서로 들다’란 말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배 위에서 본 세계, 그것은 나의 세계였다. 움직이는 원, 아니 움직이는 공, 그 한 가운데 섰는 자, 공을 따라 함께 옮아 흐르는 자의 세계였다. 뭍으로 돌아 오니 원도 공도 사라졌다.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원이나 공을 잊을 수는 없었다. 모든 사람은, 아니 눈이나 뿌리를 가진 모든 생명체는 자기의 공을 가지고 산다. 내 몸에 뿌리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내 몸의 금이다. 모두가 움직이는 공의 한 가운데 있다. 제 세계의 한 가운데에 있다. 이런 느낌, 이런 아롬이 ‘세와 계가 서로 드는’ 일이다.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한계, 제법 넓은 세계이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 또는 중생이 들어 올 수 있을까? 내 세계의 금 안에 누군가 다른 사람, 다른 중생이 들어 온다면 이는 세계가 겹치는 일이다. 서로의 금 안에서 금과 금이 겹친다. 버스나 지하철을 탄다면, 아니 촛불의 광장에 서기라도 한다면 헤아리기도 어려운 여러 세계가 겹치게 된다. 겹겹으로 얽힌 세계, 이것도 상섭(相涉), 서로 붙고, 서로 드는 세계이다.

버스를 탔다고 하자. 멀리 가려면 안으로 들어 가야 한다. 사람이 많다면 몸을 부딪쳐야 한다. 누군가를 밀어내고 길을 터야 한다. 중간에 서 있는 사람들, 발바닥을 놓을 자리만 있다면 서 있을 수 있다. 어쨌든 내가 서 있는 자리에는 누구도 들어 올 수 없다. 몸의 얼굴과 얼굴이 서로를 간섭하고 방해하기 때문이다. 한 자리에 두 얼굴이 함께 있을 수 없다. 내 자리로 들어 오려면 나를 밀쳐 내야 한다. 내 자리를 빼앗아야 한다. 이건 공간의 금이다. 공간의 금은 넘을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은 옮아 흐른다. 누군가는 내릴 것이고, 빈자리가 날 것이다. 빈자리가 난다면 편하게 앉아 갈 수도 있다. 세계가 겹겹이 얽히고 섥힌다지만, 중생 모두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어딘가 빈자리는 나게 마련이다. 빈자리를 찾으면 편하게 갈 수 있다. 이런 게 중생세계이다. 서로 드는 세계, 서로 간섭하는 세계, 사차원으로 겹겹이 겹치는 우리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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