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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11_03 작대와 절대

증도가 현각의 노래

증실상(證實相)하면

절리미(絶離微)니


실상(實相)을 증(證)하면

이(離)와 미(微)가 그츠니


'실상(實相)을 증(證)하면', 이건 영가현각의 노래이다. '이(離)와 미(微)가 그치니', 이건 남명법천의 노래이다. '평평하지만 옹근 얼굴을 알면', 이건 원인이다. '이(離)와 미(微)가 그치니', 이건 결과이다. 동사만 뽑아 읽자면, '알면 그치니'가 된다. 한자말에 달린 토, '하면'과 '니'는 언해의 읽기이다. 언해는 '증실상'과 '절리미'를 원인과 결과로 읽는다. 안다고 하지만 별 다를 게 없다. 평평하고 덛덛한, 평상(平常)의 일이다. 평상의 아롬이다. 누구나 그냥 보는 평평함이고, 누구나 그냥 아는 덛덛함이다. 그런데 이게 참 고약하다. 누구나 보고 누구나 아는 일, 그렇다면 이런 소리를 뭐하러 하나? 보는 일, 아는 일, 뭔가 잘못됐기 때문이다. 평평한 걸 평평하게 보지 못하고, 덛덛한 걸 덛덛하게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노래, 말투를 읽는다. 언해의 풀이, 만만한 글이 아니다. 언해불전의 말투가 오롯이 담겼다. 한자말이나 불교 용어를 다루는 투가 요즘과는 다르다. '무윰과 이숌괘 반닥거니', 우리말을 다루는 투도 요즘과 다르다. 이 풀이 안에도 여러가지 사례, 증거들이 담겨 있다. 잊혀진 말투, 말투가 낯설면 알아 먹기 힘들다. 이 말투만 따지려 들어도 노래의 뜻은커녕, 속절없는 말만 늘어진다. 한 시대의 말투, 단박에 다 할 수는 없다. 그래도 가만 보고 있자면 재미가 있다. 이어지는 노래, 자꾸 보다 보면 어느 덧에 입에 밴다.

한 중이 풍혈(風穴)께 묻자오되


말하거나 잠잠함에 이(離)와 미(微)에 붙으니, 어찌 통(通)하야 범(犯)치 아니하리잇고?


풍혈(風穴)이 이르시되


강남(江南) 삼월(三月) 속에, 자고(鷓鴣) 우는 곳에

온갖 꽃이 옷곳함을, 상녜 생각하노라

하시니라.


상억강남삼월리(常憶江南三月裏)

자고제처백화향(鷓鴣啼處百花香)


풍혈(風穴 897-973)은 당나라 말, 송나라 초에 살았던 임제종의 선승이다. 이 이야기는 『증도가사실』에서 따 왔다. 선불교에서는 제법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언해는 이 이야기, 이 노래를 빌어 나름의 말투로 나름의 풀이를 한다. 나는 무엇보다 이 말투를 좋아한다. '말하거나 잠잠함에', 어묵(語默)을 이렇게 새긴다. 섭(涉)이란 글자는 '붙으니'라고 새긴다. 간섭(干涉)이란 말, 언해불전은 간(干)도 섭(涉)도 다 '붙다'라고 새긴다. '이(離)와 미(微)에 붙다', 요즘엔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란 말이 있다. 말의 프레임이다. 풍혈의 이야기는 말하자면 '이(離)와 미(微)의 프레임'이다. 프레임을 버리려고 할수록 프레임을 일으킨다. 언해불전은 그런 일을 '붙다'라고 나톤다. 한번 붙으면 뗄 수 없다. 입을 벌려 떠벌려도 붙는다. 잠자코 있더라도 붙는다. 범(犯)치 않을 재간이 없다.

이(離)는 없음이오, 미(微)는 있음이오

동(東)은 있음에 속하고 서(西)는 없음에 속하니


이 실상(實相)은 세 구(句)에 붙지 아니할새 이르시되

동녘 가에 있지 아니하며 서녘에 있지 아니타 하시니라


있음과 없음, 유무(有無)의 짝이다. 이미(離微)와 동서도 짝이다. 짝과 짝의 무리를 짓는다. 선사들의 노래, 짝짓기 놀이를 한다. 말놀이이다. 언해불전보다 훨씬 오래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짝짓기 말놀이. 이런 것도 말투이다. 이런 말투, 언해불전은 '노릇의 말씀'이라고 부른다. 희론(戱論)이란 한자말을 이렇게 새긴다. 이게 참 고약하다. 짝짓기 놀이의 규칙을 모르면 수수께끼 놀이가 된다. 하나라도 푼다면 재미라도 있겠다. 풀지도 못한다면 재미도 없고 다툼의 원인이 되고 만다. 그래서 『법화경언해』에서는 '말씀의 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도 입에 붙은 말투, 선사들은 말씀의 짝으로 노래를 부른다.

기체음리(其體陰離), 기용양미(其用陽微)


그 체(體)는 음리(陰離)이다.

그 용(用)은 양미(陽微)이다.


유무나 동서, 예나 지금이나 흔한 짝이다. 그런데 이미(離微)의 짝은 낯설다. '이(離)는 없음이오, 미(微)는 있음이오', 『금강경삼가해』, 함허의 풀이를 그대로 따왔다. 그렇다면 이 풀이는 어디서 왔을까? 이미(離微)의 짝, 『증도가사실』은 『보장론(寶藏論)』이란 책을 들어 준다. 여기서는 '이(離)는 공(空)이오, 미(微)는 유(有)이다'라고 풀이한다. 승조(僧肇 384-414)가 지었다는 오래된 책이다. 이미(離微)의 짝은 여기서 나왔다. 위의 구절도 『보장론』의 구절이다. 이미(離微)의 짝은 체용(體用)이란 짝을 풀기 위해 나온 짝이다. 음양(陰陽)의 짝이 있고 이미(離微)의 짝도 있다. 저 책에서도 체용(體用)이나 음양(陰陽), 이미(離微)의 뜻을 풀어 주지는 않는다. 그냥 짝을 지을 뿐이다. 유무나 동서가 흔한 짝이듯, 체용이나 음양도 흔한 짝이다. 그 시절의 사람들의 말투, 입에 붙은 말투이다.

『보장론』은 희한한 책이다. 한문으로 갓 번역한 불교의 말투를 대뜸 노자 『도덕경』의 말투로 짝을 짓는다. 음리(陰離)와 양미(陽微), 이 짝은 『주역』의 말투이다. 음과 양의 짝 사이에 이와 미의 짝을 끼웠다. 이와 미의 짝은 음이 양으로 바뀌고, 양이 다시 음으로 바뀌는 음양의 관계를 뜻한다. 말하자면 음을 떠나는 순간은 이(離)이다. 음을 떠나는 순간은 양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양이 시작되는 순간은 미(微)이다. 물건의 체와 용, '읏듬과 씀', 물건을 분석하는 방법이고 틀이다. 체용의 관계를 음양의 관계에 견준다. 『보장론』의 말투가 이렇다. 입에 붙은 『도덕경』과 『주역』의 말투에 서역에서 들어 온 불교의 말투를 견준다. 『보장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짝짓기 놀이로 채워진다. 숱한 짝들이 이어진다. 짝의 뜻을 풀어 주지는 않는다. 다만 나란히 견주기만 한다. 짝짓기의 견줌, 새로운 말투가 되었고, 말투를 분석하는 새로운 방법이 되었다.

쇠 부처는 노(爐)를 건너지 말며

나무 부처는 불을 건너지 말며

흙 부처는 물을 건너지 말지어니와

진실의 부처는 안에 앉았느니라


노(爐)는 붊기라


『금강경삼가해』, 함허의 새김이다. 이 또한 유명한 선사들의 이야기이다. 함허의 말투에도 다 뿌리가 있다. 한문으로 번역한 불교의 말투이고, 이 말투를 노래로 불러대는 선사들의 말투이다. 말투를 알면 별 거 없다.

쇠 부처의 쇠는 서(西)에 속한다. 소살(肅殺)을 맡았으니 이는 체구(體句)이다.

나무 부처의 나무는 동(東)에 속한다. 생장(生長)을 맡았으니 이는 용구(用句)이다.

진흙 부처의 진흙은 중앙에 속한다. 뭇 공덕의 근본이니 중간구(中間句)이다.


동녘은 생장(生長)을 주관하니, 가관(假觀)이며 해탈이며 속제(俗諦)이다.

서녘은 소살(肅殺)을 주관하니, 공관(空觀)이며 반야이며 진제(眞諦)이다.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라는 책의 풀이이다. 고려의 선불교, 『선문염송(禪門拈頌)』이란 책이 있다. 흔히 '공안집'이라고 부르는 형식의 책이다. 선사들의 이야기를 모아 놓은 책, 한문문화권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자세한 공안집이다.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는 『선문염송(禪門拈頌)』의 풀이를 담은 주석서이다. 나는 이 두 책을 고려불교의 대장경이나 속장경에 비긴다. 내가 견주는 것은 책을 다루는 기술이다. 말과 글을 다루던 고려 사람들의 수완이다. 고려의 대장경과 속장경은 나라나 민족의 선을 넘는다. 외국의 학자들도 '인류문화의 정수'라고 칭찬한다. 저 두 책도 그렇다. 나는 동아시아 선불교의 정수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도 몰랐던 고려의 인문, 외국의 학자들이 먼저 발견하고 먼저 칭찬했던 고려의 기술, 함허의 말투, 언해의 말투도 이로부터 비롯했다. 뿌리가 있다.

강남(江南) 삼월(三月) 속에, 자고(鷓鴣) 우는 곳에

온갖 꽃이 옷곳함을, 상녜 생각하노라


향(香)이란 글자를 '옷곳하다'라고 새긴다. 요즘에는 '향기롭다'는 말을 쓴다. 이런 말은 왜 잊혀졌을까? 억(憶)이란 글자는 '생각하노라'라고 새긴다. 생각은 본래 '기억하다'는 뜻이었다. 요즘 우리가 쓰는 생각, 'think', 또는 사유(思惟), 언해불전은 '사랑하다'라고 새긴다. 생각과 사랑은 본래 다른 말이었다. 아무튼 풍혈의 노래, 봄의 일, 동녘의 일이다. 생장(生長)의 일이니 용구(用句)이다. 말투를 알면 별 거 없다.

실상(實相)을 증(證)하면


리(離)와 미(微)가 끊나니

동(東)녘 가에 있지 아니하며, 서(西) 녘에 있지 아니하니라

강남(江南) 삼이월(三二月)에, 꽃 피고 바람 덥거늘

자고(鷓鴣) 울음을, 맏 즐기노라


동과 서, 생장과 소살, 체와 용, 『선문염송설화』는 짝짓기 놀이를 자세히 풀어 준다. 짝짓기 놀이는 선사들의 말투, 선사들의 노래를 읽는 묘수이다. '처진 물이 처지니마다 어는 뜻', 그리고 '버들 파라하며 꽃 벌거한 뜻',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겨울이 오면 고드름이 언다. 이런 뜻은 평상의 일이다. 선사들의 노래에 담긴 평상의 말투이다. 이 말투에도 짝이 있다. 평상의 짝을 불교말투의 짝, 공관(空觀)과 가관(假觀), 반야와 해탈, 진제와 속제의 짝에 견준다. 그 사이에 이미(離微)의 짝이 있다. 떠나는 일과 비롯하는 일이다. 떠남이 곧 비롯이다. 동과 서, 생장과 소살, 짝 사이에 금은 없다. 그 사이의 일은 중간구(中間句)라고 부른다.

쇠의 기운은 가을의 서늘함이 되는지라, 그 얼굴이 땅에 있어 곧 덛덛히 굳나니, 이는 체(體)의 구(句)라


나무의 기운은 봄의 더움이 되는지라, 그 얼굴이 땅에 있어 곧 창연(蒼然)히 퍼러하나니, 이는 용(用)의 구(句)라


흙은 사계(四季)에 성(盛)하여 쇠와 나무들이 붙을 바가 되니 이는 중간의 구(句)라


창연(蒼然)은 퍼런 양자이라, 사계(四季)는 네 계절의 끝이라.


이 것은 함허의 말투이다.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의 말투를 그대로 따른다. 짝의 두 구절과 그 사이의 중간구, 이 말투가 고려의 말투가 되고, 언해의 말투가 되었다. 영가현각의 노래, 남명법천의 노래, 그리고 이를 따라 부르는 언해의 노래, 짝을 짓는 말투, 그리고 짝의 관계를 살피는 말투가 거듭 이어진다. 나는 '짝짓기의 말투'라고 부른다. 짝짓기의 말투는 선사들의 평상한 말투, 평평하고 옹근 노래를 읽는 묘수가 된다. 말투를 알면 말이 쉬워진다. 어려운 말, 모르는 말이 끼더라도 헷갈릴 게 없다. 짝의 말투, 짝으로 견주면 그만이다.

이 실상(實相)은 세 구(句)에 붙지 아니할새


'세 구절'은 언해의 노래를 따라 읽는 열쇠말이다. 이미(離微)는 짝과 그 사이의 일을 읽는 열쇠말이다. 말을 해도 잠잠해도, 이래도 붙고 저래도 붙고, 븓당기고 받당기는 느낌과 헤아림의 프레임, '오직 그 병을 덜고, 법(法)이란 덜지 말지니라', 언해는 이미(離微)의 짝에 붙는 일을 병이라고 부른다. 짝과 그 사이의 일은 프레임을 다루는 기술이고 방법이다. 이 기술 또는 방법을 말로 나톤다면 논리나 논술이 된다. 요즘의 말투이다. 세 구절의 논리, 이 것도 산뜻하다. 오래 된 기술을 우리말로 읽는 언해의 논리와 논술, 언해의 말투에는 논리와 논술이 담겼다. 나는 이게 정말로 아깝다. 잊혀진 말투의 잊혀진 기술이랄까?

비면 밑이 사뭇 비고

있으면 밑이 사뭇 있나니

비거나 있거나 함에 낱낱이 대(對) 긋거니

어찌 세 구(句)에 거리끼리오


이 것은 공(空)과 유(有)의 짝이다. '무윰과 이숌'의 짝이다. '철저(徹底)하다', 요즘에도 늘 쓰는 말이다. 이 말을 '밑이 사뭇'이라고 새긴다. '밑이 사뭇', 이 말은 짝을 다루는 기술이다. 밑바닥 끝까지, 통할 때까지 파고 든다. 공이라면 공을, 유라면 유를, 말그대로 철저하게 비판한다. '대(對) 긋거니'는 절대(絶對)의 번역이다. 이 말의 짝은 '작대(作對)'이다. 이 말은 '대(對) 되옴'이라고 새긴다. 언해의 말투는 번득하다. 훤하다. 대(對)가 되고 대(對)를 긋고, 그 사이에 중간구가 있다. 이미(離微)의 구절이 있다. 음을 떠나면 양이 비롯하듯, 한 끝을 떠나면 다른 끝이 비롯한다. 비면 밑이 사뭇 비고, 있으면 밑이 사뭇 있지만, '빔'은 중간구를 통해 '있음'을 향한다. 거꾸로 '있음'은 '빔'을 향한다. 짝짓기와 중간구, 작대와 절대, 요즘엔 이런 말투를 '변증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구에서 들어 온 말투이다. 언해는 오래된 작대와 절대의 말투, 한문문화권, 불교문화권의 말투를 이렇게 우리말투로 새겨 읽는다.

짧지만 옹근 언해의 풀이, 말투의 뿌리를 찾아 가는 길도 이렇게 길고 멀다. 이야기는 거듭된다. 낯설더라도 자꾸 보다 보면 입에 붙는다. 입에 붙으면 별 거 없다. 하염없는 이야기, 함허의 말투로 긋고 보겠다.

일체 현성(賢聖) 증(證)하신 법이 다 무위(無爲)로 차별이 있나니,

이 차별이 곧 무위라 중간과 두 가에 멀리 나니라.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