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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24_02 찍음과 닦음

증도가 현각의 노래

비래(比來)에 진경(塵鏡)을 미증마(未曾磨)하니

금일(今日)에 분명수부석(分明須剖析)호리니


요 사이에 듣글 묻은, 거울을 닦지 아니하니

오늘날에 분명(分明)히, 모로매 타 가리리니


영가의 증도가, 도를 증한 노래, 한자문화권에서는 고전이고 명곡이다. 그만큼 숱한 읽기와 풀이가 있었다. 그런데 듣는 이에 따라 읽기도 달라진다. 비래(比來)와 금일(今日)의 짝, '예전과 이제'로 읽는 이들도 많다. 그런데, 언해는 '요사이와 오늘날'로 읽는다. '분명수부석(分明須剖析)', 이 구절을 완료로 읽는 이들도 많다. '닦다'와 '타 가리다'를 짝으로 읽고, 같은 뜻으로 풀기도 한다. '예전에는 닦지 않았는데, 오늘날에야 비로서 분명히 닦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하지만 언해는 '분명수부석(分明須剖析)' 뒤에 '호리니'라고 토를 단다. 한문 원문에는 없는 읽기가 더해진다. '호리니'로 읽기가 확 달라진다. '닦다'와 '타 가리다'의 뜻도 따라서 달라진다. 한자 원문에는 시제가 없다. 완료로 읽을 수도 있고, 미래로 읽을 수도 있다. 한문은 이래서 헷갈린다. 이럴 때는 앞 뒤 문맥을 가려 읽는 도리 밖에는 없다.

문자(文字)는 현도지구야(現道之具也)이며 도인지방야(導人之方也)이니

문자는 도(道) 나토는 그릇이며, 사람 인도하는 법(法)이니


마음을 맑히며, 사려(思廬)를 고요히 하여

문(文)을 붙어 의(義)를 궁구하며

의(義)를 붙어 문(文)을 찾으면


곧 문의(文義)의 그른 것이 터럭만큼도 숨지 아니하여

말갓말갓이 밝아 나타남이

세상의 병이 어진 의원의 손에서 도망하지 못한 듯 하리라


새삼 '문자는 도구와 방법'이라는 함허의 말투가 떠오른다. 문자는 도를 나토는 그릇이고, 사람을 인도하는 방법이다. 문자 하나를 그르 읽으면 길이 어그러진다. 사람을 인도하는 방법도 뒤틀린다. 그런 일이 '호리니'에 걸렸다. 언해의 '호리니'가 틀렸다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겠다. 그거야 문(文)에 붙고, 의(義)에 붙어 가리면 그만이다. 영가의 노래, 영가의 뜻, 영가의 의도를 가리면 그만이다. 적어도 언해의 '호리니'는 번득하다. 글을 애매한채로 남겨 두지는 않는다.'분명히 타 가리리니', 영가의 일도 그런 일이다. 사람을 인도하는 길을 나토고 법을 가린다. 언해는 이렇게 읽는다.

신고(神膏)를 찍어내어, 한 당(堂)이 서늘하니


신고(神膏)는 거울 닦는 약(藥)이니, 신고(神膏) 찍어 내면 일당(一堂)이 싁싁하고, 관조(觀照)로 행적 닦으면 성(性)의 집이 훤히 맑을시라.


영가의 듣글 묻은 거울, 남명은 신고(神膏)를 들이 댄다. 귀신같은 고약, 거울 닦는 약이다. 점(點)을 '딕다'라고 새긴다. '찍다'의 옛말이다. 손가락으로 고약을 떠 거울 위에 찍어 낸다. 손가락을 따라 거울이 서늘해진다. 싁싁하고 훤히 맑아진다. 놀랍다. 신기하다. 그래서 신고(神膏)라고 부른다. 점(點)이란 글자, '딕다'라는 말, 이 것도 열쇠말이다. '닦다'라는 말을 읽는 열쇠말이다. 찍으면 모로기 서늘해진다. 쉭쉭해진다. '찍음이 곧 닦음'이다.

옛날에 중이 취암(翠巖)께 물어 이르되,


환단(還丹) 한 낱이 쇠에 찍으면 금이 되며,

지극한 이치의 한 마디가 범(凡)을 옮겨 성(聖)이 되게 한다고 하니,

청하노니, 스승이 한 번 찍으소서.


스님이 '찍지 아니호리라' 하시니,

중이 이르되, 무얼 위하여 찍지 아니하시니잇고 하니,


스님이 이르되, 네가 범성(凡性)에 질까 저어하노라 하니,

이건 『금강경삼가해』의 점(點)이다. '딕다'이다. 남명은 신고, 귀신같은 고약을 들이댄다. 그런데 저 중은 환단(還丹)을 들이댄다. 언해는 '신선의 약'이라고 풀이한다. 신고를 찍으면 거울이 서늘해진다지만, 환단 한 낱을 찍으면 쇠가 금이 된단다. 점철성금(點鐵成金), 이 것도 사자성어이다. '쇠에 찍으면 금이 된다', 이건 언해의 새김이다. 신고나 환단이란 말, 말이 그대로 판타지이다. 서양에 '마법사의 돌', 연금술이 있었다면, 동양에는 환단, '신선의 약'이 있었다. 전범성성(轉凡成聖), 이 것도 사자성어이다. '범(凡)을 옮겨 성(聖)이 되게 한다', 이건 언해의 새김이다. 남명이나 저 중, 신고와 환단을 들이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범(凡)을 옮겨 성(聖)이 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취암(翠巖)은 '찍지 아니호니라' 하실 뿐이다.

범정(凡情)이 스러지고, 성경(聖境)이 앞에 나타날새

성경(聖境)이 또 없고, 각별한 기특도 없어, 범부(凡夫)와 다름이 없을새


범(凡)과 성(聖)도 짝이다. 앞에서 했던 이야기이다. 짝의 말투, 범을 떠나 성은 없다. 성을 떠나 범은 없다. '철저의 범'과 '철저의 성', '밑이 사뭇 범'이나, '밑이 사뭇 범', 이런 것도 법(法)의 말투이고 성(性)의 말투이다. 추상이고 관념이다. 다 사람의 짓, '구태여 세운 이름'이다. '슻이 없는 세계'에 금을 긋고 슻을 가리는 일이다. 성을 보고 싶다면 범을 돌아 봐야 한다. 범을 보고 싶다면 성을 돌아 봐야 한다. 이런 게 짝의 말투이다. '짝의 그릇'이고 '짝의 방법'이다. 그래서 언해는 거울을 '성(性)의 집'이라고 부른다. 찍으면 서늘해진다. 같은 이야기를 '다시곰'한다. 긴 노래, 다시곰이 이어진다.

군불견(君不見)

그대는 아니 보난다?


미료오금위군결(未了吾今為君訣)

아지 못하린댄 내 이제 그대 위해 결(決)호리라 하시니


이 노래의 첫구절과 끝구절이다. 이 노래는 군(君)에서 시작하여 군(君)으로 마감한다. 이 노래는 '그대'가 주인공이다. 취암은 찍지 않겠다고 한다. 그에게도 까닭은 있다. 영가는 '분명히 타고 가리겠다'고 한다. 그대를 위하여 '찍겠다'는 말이다. 영가에게도 까닭은 있다. 취암의 까닭, 영가의 까닭, 이 것도 짝의 말투이다. 짝의 까닭이다.

내 이제 그대 위해 결(決)호리라.


그래서 언해는 이 노래를 '앞으로'의 일로 읽는다. 듣글 묻은 거울을 닦지 않은 데도 까닭이 있다. 그런데도 새삼 타고 가리려는 데에도 까닭이 있다. 그 까닭은 '그대'이다. '그대를 위해'이다. '그대'가 이 노래의 중간 구절이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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