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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30_01 공부의 기술

증도가 현각의 노래

부처 구(求)하여 공(功) 들이면, 어느 제 이루리오


증(證) 없으며 닦음 없어사, 공(功)이 제 오래이리라

허공(虛空)이 눈 앞에, 가득함을 보라

어찌 잡음이 사람의 손을, 좆음이 있으리오


'공들이다', 요즘에도 자주 쓰는 말투이다. 공(功)이란 글자, 이럴 때 언해불전은 보통 '공부'라고 새긴다. 이 말도 참 오래 된 말이다. 공부의 기술, 이건 나의 말투이다. 영가의 구절을 읽다 보면, 나는 늘 이 말이 떠오른다. 이 말의 뿌리는 '사랑의 기술'이다. 이 사랑은 15 세기의 사랑이다. 사(思), 사유라는 뜻의 사랑이다. 언해불전의 열쇠말들,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나는 단박에 '사랑의 기술'이라고 하겠다. 기술이란 말은 요즘 말이다. 썩 내키지는 않아도 아무튼 그 뜻은 번득하다. 사랑의 기술에는 말과 글을 다루는 기술도 있고, 말과 글을 나누는 소통의 기술도 있다. 공부의 기술은 그런 저런 기술에 공을 들이는 일이다.

하다가 거짓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내 진사겁에 혀 뽑힘을 부르리라,


알게코자 브즐우즐, 영가의 노래, 영가의 말투는 이 구절 하나면 족하다. 분명히 타고 가리겠다고 한다. 그래서 '공(功)'이란 글자, 영가는 이제야 이 글자를 꺼내 든다. 공부 잘하는 법, 요즘엔 손에 장을 지진다지만, 영가는 제 혀를 건다. 그것도 티끌 같고 모래알 같은 숱한 시간에 건다. 분명히 타 가리리니, 혀를 건 공부, 이제 그 칼을 뽑았다.

초(楚) 나라 사람이 물 건너느라 배타고 가다가,


칼 잃고 배를 어히고 이르되,

내 여기 칼 잃으니, 뒤에 예에 와 얻으리라 하야늘,

사람이 어리다 이르니,


언구(言句)에 붙어 문자(文字)를 잡은 사람이 속절없이 공부(功夫)할시라.


'어히다'는 '애다'의 옛말이다. 각주구검(刻舟求劍), 사자성어이다. '배를 어히어 칼을 얻음'이라고 새긴다. 칼로 뱃전에 금을 새긴다. 사람들은 '어리다'고 놀린다. 언해는 '속절없이 공부함'이라고 풀이한다. 어린 사람의 어린 공부, 공부라는 말의 쓰임새가 이렇다. 알게코와 없게코, 알게코의 공부도 있지만, 없게코의 공부도 있다. 옹근 공부도 있지만, 속절없는 공부도 있다. 공부도 모로매 '잘' 해야 한다. 영가가 그대를 위하여 결(決)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영가의 공부. 남명은 증(證)과 수(修)을 내민다. 증(證)은 '마초아 아롬'이다. 수(修)는 '닦음'이라고 새긴다. 남명은 무증무수(無證無修)의 공부, '증 없으며 닦음 없는 공부'라고 노래한다. 모순의 말투, 모순의 공부이다. 남명은 '허공을 보라'고 한다. '허공 잡음'을 가잘비지만, '허공을 잡는 공부', 갈수록 헷갈린다. 그런 공부도 있나? 어찌 하라는 거지?

인(因)이 과해(果海)에 가잘새,

비록 닦으나 닦음이 없고,


과(果)가 인(因)에 사무칠새,

비록 증(證)하나 증(證)이 없으니,


하다가 한갓 닦으며 증(證)함에 붙으면,

이 유위(有爲)의 공행(功行)이라,


무위과(無爲果)에 맞음이 어려울새,

이르시되 '부처 구(求)하여 공(功) 들이면 어느 제 이루리오' 하시니라.


부처 구(求)하여 공(功)들임이 손으로 허공(虛空) 잡음이니라.


허공을 잡는 공부, 언해는 남명의 증(證)과 수(修)를 인과(因果)의 짝으로 풀이한다. 씨앗과 여름의 짝이다. 짝의 말투가 이어진다. 공부는 씨앗과 여름 사이에 있다. '가잘새', 갖다는 '온전하게 갖추다'는 말이다. 씨앗 안에 결과가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사맟다'는 '사무치다'의 옛말이다. '온전하게 통하다'는 뜻이다. 땅에 심은 씨앗, 흙에 붙는다. 흙 속의 물에 붙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다. 싹은 다시 허공의 빛에 붙고 바람에 붙는다. 허공을 향하여 손을 벌린다. 무엇이라도 걸리면 잡아 감싼다. '더위잡다'라고 부른다. 더위잡고 '브티 당겨' 줄기와 넝쿨을 키운다. 붙고, 잡고, 당기는 게 다 연(緣)이다. 인연(因緣), 그런 게 다 사무쳐야 열매를 맺는다. 원인과 결과, '가잘새'와 '사무칠새'의 짝이다. '씨앗에 열매를 가잘새', 그러나 씨앗을 심는다고 다 열매가 맺지는 않는다. 붙고 잡고 당기는 일, 그런 게 공부일까? 그렇다면 언해의 공부는 '브터니닷'의 공부이다.

'비록 닦으나 닦음이 없고, 비록 증(證)하나 증(證)이 없으니', 언해의 공부는 원인과 결과, 짝의 공부이다. 원인을 바라보면 공부는 없다. 결과를 바라보면 공부가 있었다. 이건 모순의 말투이다. 그 사이의 공부는 짝을 긋는 공부, 절대의 공부이다. 원인과 결과, '가잘새와 사무칠새', 언해의 새김은 번득하다. 훤하고 쉽다. 브터니닷, 또는 브터나닷의 공부이다.

언해불전의 깨달음, '깸과 아롬'으로 새긴다. 여기에 두가지 뜻이 있다. 평등과 차별의 짝이다. 언해불전은 '한가지와 다름'이라고 새긴다. 모든 중생이 한가지로 본래 제 뒷논 아롬, 씨앗의 평등, 아롬의 평등이다. 평등을 바라 보면 닦음도 없고 증(證)도 없다. 눈을 뜨면 바로 본다. 보면 모로기 안다. 그 사이에 어떤 '하염'도 없다. 그냥 보고, 그냥 안다. 그래서 '닦음도 없고, 증(證)'도 없다고 한다. 이 것이 언해불전의 아롬이다. 그런데 아롬의 차별, 다른 아롬도 있다. '그르 아롬'과 '바로 아롬'의 다름도 있다. 그 사이에 '붙음의 사무침'이 있다. 붙더라도 잘 붙어야 열매를 맺는다. 이런 게 차별의 아롬이다.

하다가 한갓 닦으며 증(證)함에 붙으면,

이 유위(有爲)의 공행(功行)이라,


'한갓', 이건 언해의 열쇠말이다. 한결같이, 일향(一向)을 이렇게 새긴다. 짝의 말투이고 향(向)의 말투이다. 브터니닷, 짝에는 두 쪽이 있다. 한갓 붙으면 망한다. 그래서 북두를 보려면, 남성에 붙으라고 한다. 결과를 보려면 원인에 붙어야 한다. 원인에 붙으려면 결과를 바라 봐야 한다. '닦음과 증(證)함', 한갓 붙으면 '유위(有爲)의 공행(功行)', '하염있는 공부'가 된다. 하염있는 공부는 차별의 공부, 다름의 공부가 된다. 그래서 남명은 무증무수(無證無修)를 노래한다. 언해는 한갓과 하염으로 풀이한다. 원인과 결과, 두 쪽을 서로 바라보는 공부, 브터나닷의 공부이고 두 쪽을 다 긋는 절대의 공부이다. 공부를 '잘 하는' 기술이다.

기관목인(機關木人)을, 불러 물으라.


공부의 기술, 영가는 기관목인을 불러 낸다. 멀쩡한 사람도 '아롬'을 빼고 나면 기관목인과 다를 게 하나 없다. 부처를 구하는 일, 이 것도 '한갓'의 공부이다. 부처만 바라본다면 하염이 된다. 하염의 공부는 물을 따라 흘러 가는 배에 금을 긋는 속절없는 공부가 된다. 그러면 망한다. 부처를 구하려면 중생을 봐야 한다. 아롬 이전의 내 몸을 봐야 한다. 아롬을 본래 뒷논 내 몸, 어디에 붙고 어떻게 붙는지 살펴야 한다. 기관목인을 불러 내는 까닭이다.

물도 흐르고 배도 흐른다지만, 세월도 옮아 흐른다. 이제 기관목인도 '배우고 익히는' 시절이 왔다. 알파고의 딥러닝(deep learning), 이제는 이런 공부도 있다. 이제 사람은 인공지능에게도 공부를 시킨다. 공부를 시킨다는 뜻은 인공지능도 이미 닦음과 아롬의 씨앗을 가졌다는 뜻이다. 육조의 말투, 씨앗을 가졌다면 이미 유정(有情)이다. 남은 것은 공부 뿐이다. 인공지능의 공부는 어디에 붙을까? 인공지능의 공부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 그들은 다시 어디에 붙을까? 사람들은 ‘싱귤래리티(Singularity)’, AI의 특이점을 염려한다. 사람이 망할 수 있다면, 사람을 본떠 사람이 가르치는 AI, 망해도 아주 크게 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사람이 망하면 폭군이 된다. 나라가 망한다. 인공지능의 공부, 그 공부가 망한다면, 사람이 더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폭삭 망할 수도 있다. 그런 상상은 이미 널렸다.

공부도 하려면 모로매, '잘' 해야 한다. 빈 말이 아니다. 긴 노래, 아직도 멀었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