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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31_01 공부의 리셋

증도가 현각의 노래

사대(四大)를 놓아,

잡들지 말리니,


적멸성(寂滅性)의 가운데, 마시며 찍먹음을 좇아,


제행(諸行)이 덛덛함이 없어, 일체(一切) 비니,

곧 이 여래(如來)의, 대원각(大圓覺)이니,


'적멸성(寂滅性)의 가운데', 앞에 나왔던 말이다. '학이 하늘에 떠 아래 위에 붙지 아니 하나니 ', 이 마디의 다섯 구절, 딱 저 모습이 그려진다. 가운데 구절은 학의 몸통이다. 위 아래의 두 구절이 날개처럼 펼쳤다. 학의 몸통, '적멸성과 마시며 찍먹음'이 다시 짝을 이룬다.

우리 가문(迦文)이 적멸장중(寂滅場中)에,

처음 정각(正覺) 이루시어 사자후를 지으시되,


기이하며, 기이할셔,


일체 중생을 너비 본댄,

여래(如來)의 지혜덕상(智慧德相)을 갖추어 두되,

오직 망상과 집착으로 증득(證得) 못하놋다 하시고,


적멸(寂滅)은 고요히 없을시니,

불성(佛性)의 가운데 한 상(相)도 없을시라.

장(場)은 도리 닦는 바탕이오, 중(中)은 가운데라.


『금강경삼가해』, 함허가 지은 서문의 구절이다. 함허는 석가모니를 '우리 가문(迦文)'이라고 부른다. 영가는 '적멸성 가운데 마시고 찍먹는다'고 한다. '딕먹다'는 말도 재미있다. 덩어리 음식을 새처럼 찍어 먹고, 쪼아 먹는다고 한다. 함허는 '적멸장 가운데 정각을 이루고 사자후를 지으시되'라고 한다. 말투가 똑 닮았다. 적멸이란 말, 언해는 '고요히 없을시니'라고 새긴다. '열반은 없다는 뜻이라', 이것도 언해의 풀이이다. 멸(滅)은 열반이다. 없음이다. 한 것도 없으니 고요하다. 고요히 없는 가운데 마시고 찍먹는다. 고요히 한 것도 없는데, 누가 마시고 무얼 먹을까? 말이 안되는 말, 모순과 절대의 말투이다. 없음과 있음, 양 쪽의 중간을 향하는 말투이다. 함허는 '도 닦는 바탕'을 꺼내 든다. 석가모니도 도를 닦고 공부를 했다. 남명이 부르는 '닦음과 증(證)함'이다. 중생들은 한갓 그걸 바라본다.

     

'우리 가문(迦文)'은 정각(正覺), 바로 알기 이전의 이름이다. 아직 모르던 때의 이름이다. 각(覺)이 '아롬'이라면, 불각(不覺)은 '모롬'이다. 여래와 중생이 본래 갖춘 아롬은 본각(本覺), '본래 아롬'이다. 평등의 아롬이고, 아롬의 평등이다. 그걸 아는 일은 시각(始覺), '처음 아롬'이라고 부른다. '우리 가문(迦文)'은 '모롬'의 상태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왼편의 그림,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에 있는 불상이다. 흔히 고행상이라고 부른다. '우리 가문(迦文)'이 아직 몰랐던 때의 공부, 사람들은 저런 모습을 그린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법을 얻으려 몸을 버림'이라고 부른다. 괴로운 길을 한결같이 걷는다. 무거운 공부를 한갓 닦는다.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 가문(迦文)'의 공부, 그 괴로움과 무거움에 놀란다. 그걸 우러르고 기린다. 그걸 부처의 공부라고 부른다. 때로는 그 길을 따라 가라고도 한다. 기이할셔!

살며 죽는 바랄의 가운데를 향하여,

밑 없는 배를 타고, 구멍없는 저를 부시니,


귀 먹으며 어린 이 다 깨며,

이운 것이 다 젖어,


대지의 모든 중생이 각각 그 곧을 얻으니라.


함허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중생이 부처가 되는 모습, 우리 박물관의 모습은 편안하다. 괴로움도 없고 무거움도 없다. 그러니 우러름도 없고 기림도 없다. 겉 모습이야 비싼 쇠와 금으로 빚었다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일이다. 길을 안 뒤의 부처, 죽살이의 바랄을 향한다. 배를 타고 피리를 분다. 함허의 『금강경』, '우리 가문(迦文)'의 공부, 그 고행을 따르지 않는다. 우러르지도 않고 기리지도 않는다. 우리의 죽살이를 향하는 부처, 그 피리 소리를 들으면 그만이다. 우리 모두가 한가지로 본래 뒷논 아롬, 그걸 돌아 보면 된다.

잠깐도 안팎이 없고,

가운데 비어 한 것도 없음이,


거울이 비며, 저울이 평(平)함 같아야,

선악과 시비를 가슴 속에 두지 아니할시라.


염라대왕에게는 거울이 있다. 정의의 여신에게는 저울이 있다. 염라대왕의 거울은 진실을 비춘다. 여신의 저울은 정의를 단다. 함허는 감공형평(鑑空衡平)이란 말을 쓴다. 언해는 '거울이 비며, 저울이 평(平)함'이라고 새긴다. 거울과 저울, 비추고 단다. 진실을 훤히 비추려면 맑게 비워야 한다. 정의를 달아 견주려면 좌우를 평평히 맞춰야 한다. 핸드폰의 계산기, 새로 계산을 하려면 리셋 버튼을 누른다. 모르는 가문과 아는 부처, 그 사이에도 리셋이 있다. 부처의 피리소리는 리셋 버튼이다. 괴롭고 무거운 공부, 닦음과 증함을 리셋한다. 거울을 비우고 저울을 평한다. 부처가 증명한 피리소리, 편안히 들으면 그만이다. 내가 본래 부처임을 처음 믿으면 된다. 적멸한 가운데 마시고 찍먹는 모습, 느긋이 바라 보면 된다. 어차피 알 게 될 일, 괴로울 게 없으니 서두를 것도 없다.

런 포레스트 런! 포레스트도 달릴 수 있다. 달릴 수 있으면 돌아 설 수도 있다. 학이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아 내리는 모습, 형평(衡平), 또는 평형(平衡), 이런 말도 오래 된 말이다. 학의 평평한 몸과 날개, 대개는 자유를 느낀다. 자유, 언해불전은 '제쥬변'이라고 새긴다. 영가의 평평한 말투, 한가지 제쥬변을 노래한다. 학도 하늘을 날려면 마시고 먹어야 한다. 날개짓도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래도 누구나 하는 일, 기이할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다. 부처의 고행, 부처의 공부, 겁 줄 것도 없지만, 겁 먹을 것도 없다. 영가의 노래, 그대를 위하여 부르는 까닭이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