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29_01 유정과 무정

증도가 현각의 노래

기관목인(機關木人)을, 불러 물으라.


이 이(理)는 아래부터 옴에, 아롬에 붙지 아니 하니라.

하다가 아롬 없음을, 이 진도(眞道)라 여기린댄,

가을 바람 대(臺)와 전(殿)에, 기장이 이리(離離)하리라.


영가는 무념과 무생을 묻는다. '뉘 염(念) 없으리오, 뉘 남이 없으리오', 조계에서 육조를 만나 얻은 구절을 단박에 뒤집어 버린다. 구절에 붙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조계의 구절, 조계의 말대가리이다. 말대가리는 그릇이다. 그릇에 붙는 이들, 그릇을 엎어 버린다.

유정(有情)이 씨 뿌리니,

씨 뿌린 땅에 여름으로 돋아나네,


무정(無情)은 씨도 없으니,

성(性)도 없고, 생(生)도 없으리,


육조는 유정과 무정을 가른다. 씨앗도 없는 무정, 열매가 날리 없다. 영가는 기관목인을 불러 낸다. 몸도 있고, 몸을 튕길수도 있다. 하지만 기관목인, 씨앗이 없다. 정(情)이 없다.

기관(機關)이라 함은

나무 사람이 마음 없어 오직 그윽이 노로 매어 능(能)히 움직이게 하나니,


그러면 마음 생멸(生滅) 없음이 모로매 나무 사람의 마음 없음 같아야사 도(道)에 맞으리니,

하다가 방편(方便) 알지 못할 사람이 이 말 듣고,

한갓 아롬 없음으로 마음 삼으면

망국패가(亡國敗家)함을 면(免)치 못하리니,


육조의 무정, 영가의 기관목인, 언해는 '한갓 아롬 없음'이라고 풀이한다. 무지(無知)를 '아롬 없음'으로 새긴다. '아롬'은 언해불전의 열쇠말이다. 언해불전의 새김과 말투는 이 열쇠말을 싸고 돈다. 한갓은 일향(一向)이다. '한결같이'이다. 어린 장사치들, 창을 팔 때는 창만 바라분다. 방패를 팔 때는 방패만 바라본다. 짝을 잊으면 모순이다. 돌아 보아야 한다. 무념과 무생, 알게코자 하는 말이다. 알게코자, 언해는 방편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실상(實相)의 짝이다. 평평하고 옹근, 그래서 두려이 덛덛한 체상(體相)을 알게코자 불러낸 방편이다. 방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갓 무념과 무생만을 바라본다. 아롬 없음으로 마음의 본을 삼는다. 그러면 망한다. 남명의 노래 '기장이 무성하리라'는 『시경』에서 빌어 온 말이다. 망한 나라의 궁궐 터가 기장 밭이 되었다. 언해는 슬프다고 한다. 함허는 가련하다고 한다. 그래서 육조는 씨없는 무정을 불러내고, 영가는 마음없는 기관목인을 불러낸다.

사람이 손을 달을 가리켜, 사람 보이거든,


저 사람이 손가락을 인하여 반드시 달을 볼지어늘,

하다가 또 손가락을 보아 달의 체(體)를 삼으면,


이 사람은 어찌 달을 잃을 따름이리오,

또 손가락을 잃으리라.


달과 손가락의 비유, 『능엄경언해』의 가잘빔이다. 사람들은 부처의 가르침도 연심(緣心), 버므는 마음으로 듣는다. 그래서 부처는 '법도 또 연(緣)'이라고 한다. 그리고 저 비유를 들어 준다. 비비고 버믈면, 달도 잃지만 손가락도 잃는다. 가르침의 얼굴도 잃지만, 가르침의 대가리도 잃는다. 죽살이의 바랄, 고통의 바다라고 한다. 브터니닷 난 바랄, 비었다고 한다. 그러니 벗어나라고 가르친다. 벗어나는 길을 가리킨다. 저편으로 건너가라고 한다. 그런데, 버므는 마음으로 듣는 이들, 한갓 벗어남을 바라본다. 한갓 저쪽만을 바라본다. 하지만 고통의 씨앗 죽살이의 바랄에 뿌려져 있다. 한갓 벗어남을 바라본다면 답이 없다. 그래서 벗어나려고 할진댄, 돌아 보라고 한다. 브터니닷의 죽살이, 죽살이를 봐야 벗어날 수 있다. 이런 게 짝의 방편, 모순의 방편이다. '한 길에 함께 행할지니', 그 사이에 짝이 긋는다. 절대의 방편이다.

남의 비방(誹謗) 좇으면,


뜻이 편안하니,

일체의 말씀이, 오직 바람소리니라,

나무 사람과 꽃새가, 일찍 서로 만나니,

뜻 없어, 제 놀라지 아니하니라.


나무사람이 꽃새를 본다. 남명은 다시곰 나무사람을 불러낸다. 같은 가잘빔이 이어진다. 언해는 꽃새를 아이들이 날리는 연이라고 풀이한다. 언해는 이 구절에 긴 풀이를 단다. 이 이야기는 뒤로 미뤄 두자. 기관목인의 나무사람, 언해는 '아롬 없음'으로 새긴다. 그런데 이 구절의 나무사람과 꽃새, '뜻 없어'라고 새긴다. 나무사람도 꽃새도 뜻이 없다. 뜻이 없으니 서로 만나도 놀랄 일도 없다. 붙지도 않고 나지도 않는다. 남이 나를 비방한다. 나를 탓하고 허는 소리, 언해는 나무 끝에 스치는 바람소리 같다고 한다. '뜻이 편안하니', 바람소리라 들으면 마음도 일지 않고, 염(念)도 뮈지 않는다고 한다. 이 나무 사람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누가 나를 비방하는 소리, 바람소리라고 한다. 나무 사람처럼 꽃새처럼 뮈지도 말고 놀라지도 말라고 한다. 소리에 붙지 말라는 뜻이다. 무념을 향하고 무생을 향한다. 붙지 않으면 나지도 않는다. 나무사람의 방편, 한 길에 함께 행하는 방편이다. 기관목인의 비유, 모순의 가잘빔, 나무사람의 쓸모가 이렇다.

'뜻 없어', 원문은 무정(無情)이다. 유정(有情)의 짝이다. 정(情)이란 글자를 '뜻'이라고 새긴다. '뜻이 편안하니', 이 뜻은 의(意)이다. 언해불전의 '뜻'은 헷갈린다. 그 쓰임이 너무 넓다. 중요한 열쇠말, 조심해서 쓰지 않으면 방향을 놓친다.

두 뜻 머금음이 버근 웃말 같으니,

첫 뜻은 어루 알리로다.

뒤의 뜻을 새기리니,


『원각경언해』의 구절, 예를 들자면 맨 앞의 '뜻'은 의(意)이다. 그런데, 둘째와 셋째의 '뜻'은 의(義)이다. 의(意)와 의(義)의 짝, 요즘말로 치자면 의도와 의미의 짝이다. 그릇의 말투, 장기판을 가잘비자면, 졸이나 차, 장기판의 말에 담긴 행마의 규칙은 의(義)이다. 장기판에 마주 앉아 말을 움직이는 일은 싸움을 위한 의(意)이다. 장기판에서야 두 뜻이 섞인다. 하지만 장기를 두다 말고 말을 상대방 얼굴에 던진다면 어떨까? 마를 던지건, 상을 던지건, 말의 의(義)는 부질없다. 말의 의(義)는 흉기로 바뀐다. 말의 의(意)는 폭력으로 싸움을 걸자는 것이다. 말이나 글에 담긴 뜻을 가리는 일, 두가지 뜻을 가려 써야 한다.

글이나 말, 그릇에 담긴 뜻, 의(義)는 그래도 쉽다. 의(意)란 글자의 쓰임은 훨씬 더 넓고 복잡하다. 예를 들어 언해불전에 여의(如意)란 말을 자주 쓴다. '뜻같이', '뜻다이', '뜻가장', 새김도 다양하다. 한문이 함께 있으니 망정이지, 뜻이란 우리말만 따라 가자면 말뜻을 가리기조차 어렵다. 그렇다면 유정과 무정, 정(情)이란 글자, '뜻 있는'과 '뜻 없는'의 뜻은 뭘까? '뜻이 편안하니'의 뜻은 또 뭘까? 이러다 보면 수수께끼 말장난이 되고 만다.

뜻과 법이 연(緣)이 되어 의식(意識)을 낸다 하니,

이 식(識)은 뜻을 인하여 난지라, 뜻으로 계(界)를 삼겠느냐?

법(法)을 인하여 난지라, 법으로 계를 삼겠느냐?


『능엄경언해』의 구절이다. 낯선 말투에 헷갈릴 수 있다. 부처는 말씀에 법을 담아 이야기를 한다. 제자는 말을 듣고 말로부터 법을 가려낸다. 뜻과 법이 비비고 버믄다. 여기서의 뜻, 또는 의(意)는 부처의 말에 담긴 의의(意義)를 가려내는 짓을 모두 포함한다. 식(識)은 아롬이라고 새긴다. 뜻이라는 짓을 통해 법에 대한 아롬으로 가는 과정이다. 그 일을 의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과정을 계(界)라고 부른다. 의식의 의(意), 이 말의 쓰임새는 훨씬 넓다. 사람이 하는 생각과 사랑의 짓,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하는 일, 그 많은 부분이 이 글자에 담긴다. 『능엄경언해』는 이 짓의 뜻을 관찰하는 방편을 가리킨다. 이 자리에서 그 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사람이 유정인 까닭, 뜻의 씨앗이 죽살이를 브터니고, 브터내는 일이다. 죽살이를 돌아 보는 일이다. 브터니고 브터나는 일, 브터나기 때문에 비고 속절없다. 그게 고통이라면 벗어나야 한다. 벗어 나려면 돌아 봐야 한다. 짝의 일, 한길에 함께 가라고 한다. 두 짝을 서로 관찰하는 사이에 짝이 녹는다. 짝을 긋는다. 절대의 말투가 이렇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