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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간섭

5.2 하야로비 눈깃에 붙고


하야로비 눈깃에 븓고

토끼 월전(月殿)에 깃 깃음이어니와


사전에 따르면 하야로비는 해오라기의 옛 말이라고 한다. 하얗다는 말도 있듯, 하야로비는 하얀 새이다. 그런데 인터넷을 찾아 보니, 해오라기, 등은 검고 배는 하얗다. 말도 그렇고 사전도 그렇고 딱할 때가 있다. 어쨌거나 저 하야로비는 백로라고 부르던 새이다. 온통 하얀 새이다. 하얗기 때문에 깃을 지어도 눈에다 짓는다. 눈과 함께 오는 손님이라 하여 설객(雪客), 눈손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야로비는 눈에 깃들고, 토끼는 달에 깃든다. 의(依)라는 글자를 ‘븓다’라고 새겼다. 의지하다, 또는 ‘의하다’, 요즘에야 한자와는 상관없이 그냥 우리말처럼 쓴다. ‘븓다’도 물론 ‘붙다’의 옛말이다. 하야로비는 정말로 눈깃에 붙을까? 눈손님이나 눈깃, 이런 말은 시일까? 자연일까? 본적도 없고, 늘 헷갈린다.


땅을 인(因)해 넘어지고, 

땅을 인(因)해 일어나니

땅은 너를 향해 므스기라 이르뇨


땅이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게 아니며, 또 사람을 일어나게 하는 게 아니니

일어나며 넘어짐은 사람의 젼차이라, 땅에 븓디 아니한다.


또 법(法)이 사람을 알게 하는 게 아니며, 사람을 모르게 하는 게 아니니

모르며 아롬은 사람에게 있는지라, 법에 븓디 아니한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흔한 일이다. 누구나 걸어 가는 길, 땅이 움푹 파일 수도 있다. 돌덩이나 흙덩이가 굴러 다닐 수도 있다. 누구는 땅을 탓한다. ‘므스기라 이르뇨?’ 이런 말도 재미있다. ‘사람의 젼차’, 유인(由人)을 이렇게 새겼다. 자유(自由)의 유(由)이다. 사람의 탓 또는 닷이다. 사람으로 말미암는다. 사람이 까닭, 사람의 닷이다. ‘땅에 븓지 아니하며’, 관(關)이란 글자를 ‘븓다’라고 새겼다. 상관(相關) 또는 관계(關係)의 관(關)이다. 땅의 까닭, 땅의 탓이 아니다.

오직 이는 스승을 브터 나누어 가린다.


여기의 ‘브터’는 빙(憑)이다. ‘결혼을 빙자(憑藉)해……’, 요즘엔 이런 말을 자주 쓴다. 사기꾼 이야기, 언해불전의 말투로는 빙(憑)도 ‘브터’이고, 자(藉)도 ‘브터’이다. 기대고 의지한다는 뜻이다. 저 구절, 요즘말로 치자면 ‘스승을 빙자해’라 하겠지만, 나쁜 뜻은 없다 스승이야 당연 기대고 의지해야 할 분이다. 스승을 붙고, 스승의 가르침에 붙는다. 결혼에 붙고 거짓말에 붙는다. 스승이 까닭이고 결혼이 까닭이다. 스승 닷이고 결혼 닷이다.

사람의 젼차이라, 땅에 븓디 아니한다.


젼차, 닷, 까닭은 명사이다. ‘븓다’ 또는 ‘붙다’는 동사이다. 뜻은 같다. ‘붙다’는 명사를 동사로 읽고 쓰는 말투이다. 넘어지고 - 일어나고, 또는 모르고 – 알고, 이 장면은 본래 이런 움직임, '짓'을 그린다. 짓이 먼저 있다. 그리고 짓의 원인과 결과를 가린다. ‘붙다’ 또는 ‘부터’는 그런 뜻이다. 동사는 '짓'이다. 명사는 '짓'의 이름이다. '짓'이 먼저다. 사람이 '짓', 사람이 먼저다. 그래서 동사가 먼저 있고, 명사가 뒤를 따른다. 언해불전의 '븓다', '붙다'의 쓰임새는 우리말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한자말과는 아주 다른 우리말의 특징이다. '붙다' 하나만 잘 써도 한자말을 한결 줄일 수 있다. 

반(攀)은 혈씨라

착(着)은 브티 당길씨라


‘혀다(다)’는 ‘끌다’ 또는 ‘당기다’는 뜻의 옛말이다. 등반(登攀)이란 말이 있다. 등산보다는 조금 더 어려운 오름이랄까, 보통은 바위를 기어오르는 장면을 연상한다. 반(攀)이라는 글자가 ‘잡아 당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잡아 당기고, 잡아 끌고, 위로 올라가려면 잡고 끌어야 한다. 뭔가를 잡는 일도 붙는 일이다. 붙어야 당길 수 있다. 

오직 반드시 염(念) 없이 응할지언정, 뜻 두어 연(緣)을 더위잡음이 마땅하지 않으니


호박손이나 담쟁이손, 식물도 허공으로 손을 벌린다. 무엇이라도 걸리면 잡아 감싼다. 그리고 감싼 자리에 기대어 다시 위로 손을 벌린다. 이런 순간을 ‘더위잡다’라고 표현한다. ‘받당기다’ 라고도 하고 ‘븓당기다’, ‘브티당기다’라고도 한다. 허공으로 뻗어 오르는 넝쿨손도 지구의 힘, 자연을 마냥 거스를 수는 없다. 허공으로 오르고 싶어도 허공을 더위잡을 수는 없다. 오르려면 뭐라도 잡을 자리가 있어야 한다. 붙을 자리이다. 바위를 기어 오르더라도 발 디딜 곳, 손 잡을 자리를 먼저 찾아야 한다.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라도 걸치고 버텨야 한다. 그런 자리가 바로 ‘븓는’ 자리이다. 디디고 기댈 자리이다. 깎아 지른 절벽을 맨몸으로 오르는 사람, 그가 믿는 건 그런 조그만 자리이다. 그리고 거기에 붙어 제 몸을 당겨야 할 제 손가락 발가락이다. 붙는 사람은 붙는 자리가 고맙다. 그래도 멀리서 보는 사람, 소름이 돋는다.

수(遂)는 브틀씨니, 아무 닷을 브터 이렇다 하는 겿이라

여(與)는 이와 저와 하는 겿에 쓰는 자(字)이라


닷은 원인이다. 닷에 붙는다. 국어사전은 ‘겿’을 어조사라고 한다. ‘실질적인 뜻이 없이, 다른 글자를 보조하는 글자’라고 풀이한다. ‘실질적인 뜻’은 또 뭘까? 이런 말도 좀 헷갈린다. 한문에는 허사(虛詞)라고 부르는 글자가 있다. 빈대가리, 속이 비었다.

염려(念慮)는 허(虛)한 정(情)이라, 

색신(色身)은 실(實)한 얼굴이라. 


허와 실이 무리 아니로되 능히 서로 부리는 것은 상(想)을 붙어 녹음이라.


염려는 흘러가는 생각이다. 밖의 드틀에 붙기도 하고, 안의 드틀에 붙기도 한다. 드틀에 붙어 므던히 흘려보내는 까닭에 때문에 비었다고 한다. 허실도 대구이다. ‘무리 아니로되’, 불륜(不倫)을 이렇게 새겼다. 이 말도 참 재미있다. 불륜이라면 요즘에야 불륜의 관계, ‘바람피우다’ 또는 혼회정사 따위를 떠올린다. 윤(倫)이라는 글자, 인륜(人倫)이나 윤리(倫理), 흔히 쓰는 말이다. 이 글자를 ‘무리’ 또는 ‘짝’이라고 새긴다. 사람의 무리, 또는 사람의 무리들이 짝으로 함께 지켜야 한 도리라는 말이겠다. 무리가 아니로되 서로 부리는 짓, 그게 불륜이란다. 얼굴과 대가리, 이런 말도 짝이다. 허(虛)와 실(實), 이런 말도 짝이다. 허와 실, 말이야 짝이라지만 짝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얼굴이 있으면 실(實)이다. 얼굴이 없으면 허(虛)이다. 사전에서 풀이하는 ‘실질적인 뜻, 실질(實質)이 ‘실한 얼굴’이다. 맔겿이나 입겿에는 실한 얼굴, 실한 뜻이 없다.

얼굴이 없다지만, 맔곁에도 뜻은 있다. 자유(自由)의 유(由)를 들어 보자. 이 글자는 명사로도 쓰이고 동사로도 쓰인다. ‘원인이나 이유’를 뜻하기도 하고, ‘가다, 지나다, 붙다’ 따위 동사로도 쓰인다. 여기에는 물론 뜻이 있다. 이 글자는 허사 가운데 하나인 개사(介詞)로도 쓰인다. 글자들 사이에서 ‘……로부터, ……까닭으로, ……에 의하여, …….에’ 따위의 뜻을 더한다. 이런 것도 뜻이다. 동사나 명사로 쓰일 때의 뜻을 가지고 다른 글자를 돕는다. 이런 글자, 마냥 텅 빈게 아니다.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관계를 정해주는 글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글자보다도 또렷하게 뜻을 드러내기도 한다.

븓당기다, 받당기다, ‘븓-‘이나 ‘받-‘은 말겿이다. ‘당기다’은 동사이다. 당기려면 붙어야 한다. 당기는 주어가 있고, 당겨지는 목적어가 있다. 븓이 됐건 븥이 됐건 이 글자는 당기기 위한 자리, 기준점을 정해 준다. 담쟁이가 됐건 사람이 됐건 붙어야 당긴다. 붙을 자리, 붙을 원인이 있어야 당긴다. 붙잡는 손과 잡히는 자리의 관계, 그 원인과 결과가 ‘븓-‘에 달렸다. 물에 빠진 사람, 풀뿌리를 받당기는 마음, 그 마음이 ‘받-‘에 달렸다.

언해불전은 화려(華麗)를 그냥 ‘빛나다’라고 새긴다. 이런 말투는 언제 보아도 쉽고 즐겁다. 굳이 어려운 한자를 쓸 까닭이 없다. 븓다는 동사로도 쓰이지만 입겿 또는 맔겿으로 쓰인다. 이 쓰임새가 넓고 깊다. ‘븓다’라는 맔겿, 그냥 텅 빈 말이 아니다. 길게 이어지는 말과 뜻 사이에서, 말 그대로 빛난다. 말과 말, 뜻과 뜻을 살려 준다. 글의 뜻, 의미와 의도가 번득해진다. 쉽고 재미있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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