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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말투/기관목인 판타지

05_사람의 금

기관목인 판타지

스페이스, 마지막 프론티어

이 것은 우주선 엔터프라이즈의 여정이다.


그 쉼없이,

낯선 신세계를 찾아,

새로운 생명과 문명을 찾아,

누구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으로,

꿋꿋이 가려는 임무.


스타트렉은 1966년에 시작한 미국 텔레비젼 SF 시리즈이다. 그 명성이야 새삼 따질 바도 아니겠지만, 이 텔레비젼 시리즈는 의외로 짧고 소박하다. 정해진 캐릭터 몇 사람이 정해진 세트를 오고 간다. 가끔 유명한 게스트가 나온다지만, 대개는 늘 그 사람, 늘 그 자리이다. 말이야 거창하게 스페이스, 프론티어를 찾아 간다지만, 정해진 시간, 정해진 공간을 크게 벗어나지도 않는다. 그들의 프론티어는 오히려 그들이 나누는 그들의 말 속에 담겼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팬들은 그 말에 감동한다. 그들의 말을 다시 보고 다시 새긴다. 에피소드의 말은 팬들의 말이 되고 문화가 된다. 그걸 보며 자라는 아이들, 어느 덧에 어른이 된다. 아이들의 상상은 미래가 되고, 다시 현실이 된다. 이게 참 희한하다.

우주선 앤터프라이즈의 이등항해사 데이터 소령은 안드로이드이다. 양전자 컴퓨터로 만든 뇌를 단 최신의 로보트이다. 하긴 안드로이드나 로봇트, 이런 말도 벌써 옛말이 되었다. 요즘엔 AI가 대세이다. 이 에피소드는 앤터프라이즈가 어느 별 기지를 방문하면서 시작한다. 그 기지에 브루스 매덕스 중령이 있다. 그는 데이터가 사관학교에 있을 때부터 데이터를 알고 있었다. 그는 데이터와 같은 고성능 안드로이드를 대량으로 만들어 안드로이드 전용 함대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데이터를 만든 누니안 숭 박사의 밑에서 연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데이터의 양전자 컴퓨터, 그 비밀을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는 데이터의 뇌를 쪼개 보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엔터프라이즈가 나타났고, 데이터를 데려 왔다. 매덕스 중령은 엔터프라이즈를 찾아가 계획을 밝히고 도움을 청한다. 데이터의 뇌를 쪼개고 싶다.

매덕스를 만난 데이터는 매덕스를 의심한다. 매덕스는 뇌를 쪼갤 줄이야 알겠지만, 다시 붙일 줄을 모른다. 하나 뿐인 데이터의 컴퓨터, 아주 망쳐 버릴 수 있다. 데이터는 제 두뇌, 양전자 컴퓨터를 지키기 위해 매덕스의 요구를 거절한다. 데이터의 판단이고 결정이다. 매덕스의 판단과 결정은 다르다. 다름은 다툼으로 이어진다. 매덕스는 우주함대에 요청하여 데이터를 제 휘하로 편성하라는 명령서를 받아낸다. 데이터는 군인이다. 군인은 명령을 따라야 한다. 다음의 명령은 뻔하다. 데이터의 머리를 쪼개라. 그래서 데이터는 군인의 은퇴, 전역을 신청한다. 하지만 매덕스는 데이터를 기계라고 부른다. 물건으로 여긴다. 기계도 은퇴는 한다. 쓸모가 없으면 버려진다. 쓰레기가 되던지 재활용을 한다. 어쨌거나 그걸 판단하고 결정하는 건 사람이다. 기계나 물건이 선택하고 결정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엔터프라이즈 피카드 함장의 선택과 결정은 다르다. 그는 데이터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한다. 피카드는 데이터의 선택을 지켜 주기 위해, 우주함대에 정식 재판을 요구한다. 피카드는 데이터의 권리, 군인의 권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군인도 사람이다. 군인의 권리도 사람의 권리이다. 그래서 권리의 문제는 자격의 문제로 옮겨 간다. 데이터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데이터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먼저 증명해야 한다.

AI라는 말, 'Artificial Intelligence'는 인공지능이라고 새긴다. 사람이 만든 지능이다. 요즘에도 대강 그러려니 쓰는 말이다. 사람이 뭐지? 지능은 또 뭐지? 그런데 스타트렉의 저 에피소드는 대뜸 사람을 묻는다. 데이터가 사람이란 사실을 증명하려면 먼저 '사람'을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뭔지 가리고 정해야 한다. 그냥 지나가는 농담이 아니다. 선택과 결정이 맞붙었다. 재판이 열렸고 결정을 해야 한다. 텔레비젼의 에피소드, 스타트렉은 그걸 보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매덕스는 데이터의 뇌를 쪼갤 수 있을까? 그걸 보는 사람들, 자기를 돌아 본다. 나도 사람인데, 사람이 뭐지? 매덕스가 사람의 머리, 내 머리를 쪼개려 든다면 어째야 하지? 데이터의 문제는 사람의 문제가 된다. 나의 일이 된다. 그저 지나가는 텔레비젼 시리즈의 에피소드 하나, 그걸 보는 사람들, 사람을 반성하고 자기를 반성한다. '그럼 나는 누구지?' 이게 참........ 기이하다.

매덕스가 먼저 답을 내 놓는다. 그는 네 개의 열쇠말을 건넨다. 먼저 Sentient란 열쇠말을 꺼낸다. '센티언트', 또는 '센션스', 사전은 보통 '유정(有情)'이라고 새긴다. 불교에서는 '중생'이란 말을 유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말은 'Sense'란 말과 연결되어 있다. '느낌'이다. 'Sentient Being'은 느낄 줄 아는 존재이다. 매덕스는 사람을 'Sentient Being'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뜻을 세 개의 다른 열쇠말로 풀이한다. 인텔리젼스(intelligence), 셀프어웨어니스(self-awareness), 컨셔스니스(consciousness), 요즘에는 보통 지성, 자의식, 의식이라고 새긴다. 이런 걸 가졌다면 '유정(有情)'이고 사람이다. 데이터는 이런 걸 가졌을까? 하여간 재판이 시작된다.

가이넌: 글쎄,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를 보면, 늘 버리면 되는 존재들이 있었죠. 그들은 더러운 일을 해요. 그들은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해요. 너무 어렵고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데이터들로 구성된 군대, 다 일회용이죠. 그들의 복지를 생각할 필요가 없지요. 그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온통 버리면 되는 사람들의 시대.


피카드: 노예제 말이군요.


이 사이에 이런 반전도 있다. 유명한 배우 우피 골드버그는 '가이넌'이라는 이름으로 스타트렉에 등장한다. 그는 흑인이었고 여자 아이였다. 그 아이도 스타트렉을 보며 자랐다. 이 시리즈에 흑인이며 여자인 배우가 처음 등장했다. 그의 역할은 여자 노예, 하녀가 아니었다. 그 아이는 그게 놀라웠다. 그게 신기했다. 그 아이도 어른이 되었다. 배우가 되었고 유명해졌다. 그래서 그는 흑인 여자 배우로서 스타트렉에 나오고 싶었다. 흑인 여자 아이들에게 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하인이 아닌 성공한 배우의 모습,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는 멀쩡한 사람의 모습. '가이넌'은 그를 위해 만든 배역이었다. 가이넌은 피카드에게 조언한다. 이 재판은 데이터의 자격 문제가 아니다. 데이터가 기계냐 아니냐의 문제도 아니다. 만일 매덕스가 이긴다면, 그래서 데이터를 대량생산하는 길이 열린다면, 노예사회의 길이 다시 열릴 수도 있다. 디스포져블(disposable), 버리면 그만인 일회용의 존재들. 데이터가 다중이 되는 사회,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없는 다중, 또 다른 매덕스가 다중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사회, 그런 게 노예사회 아닌가? 스타트렉은 이런 말을 노예의 후예, 검은 여자 아이였던 배우의 입을 빌어 경고하기도 한다. 짧은 에피소드에 스윽 지나가는 한 마디, 사람들은 한 마디에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피카드는 논란 중에 두 가지 물음은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데이터는 지성을 가졌고, 자의식을 가졌다. 남은 문제는 '의식'이라고 한다. 피카드는 모두에게 묻는다. '의식'을 가를 수 있는 길이 있는가? 그 길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그는 'measure'라는 말을 쓴다. 보통을 '척도'라고 새기는 말이다. 길이를 '재다'는 말이다. 길이를 재는 '자'를 가리키리도 한다.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이다. '금'을 가리는 일이고, 길이다. 말하자면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을 재고 가리는 금이다. 재판정에 나온 사람들, 누구도 금을 긋지 못한다. 그렇다면 누구도 데이터에게 금을 그을 수도 없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일, 사람의 선택과 결정을 간섭할 수 없듯이, 데이터의 선택과 결정도 존중해야 한다. 사람이 뭔지, 의식이 뭔지, 누구도 금을 긋지 못하는 일, 이런 일도 있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인공지능, 사람이 만든 지능이라지만, 이런 말도 아직은 번득하지 않다. 데이터 머리 속의 비밀, 매덕스 중령의 욕망에도 까닭은 있다. 기계의 힘, 전쟁에서 이길 수도 있다.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남의 머리를 함부로 쪼개도록 놓아 둘 수는 없다. 이런 일도 사람의 금이다. 피카드의 선택, 스타트렉의 결정에도 금이 있다. 금을 모른다면 선택도 결정도 속절없다.

세상의 공교(工巧)한 환사(幻師)가

모든 남녀를 짓듯 하니,

비록 모든 근(根)이 동(動)함을 보나

모로매 한 기(機)를 뺄지니,

기(機) 없어 적연(寂然)함에 돌아가면

모든 환(幻)이 성(性) 없음이 되리라


한 기(機)는 망식(妄識)이라.


언해불전, 『능엄경언해』의 구절이다. 기(機)라는 글자, 환(幻)이란 글자, 언해불전에도 흔한 글자이다. 언해불전은 기관이나 괴뢰를 '곡도'라고 새긴다. 그리고 기관목인이나 괴뢰의 믿얼굴, 본질을 환(幻)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글자도 '곡도'라고 새긴다. 15세기 우리 조상들이 쓰던 우리말투, 이게 참 희한하다. 사람이 지어낸 일은 모두가 환(幻)이다. 곡도이다. 그래서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인공지능도 곡도이다. 데이터도 곡도이다. 사람이 지어낸 환(幻)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괴뢰'이기도 하다. 이래도 곡도이고 저래도 곡도이다.

곡도의 움직임, 그 시동과 발동을 기(機)라고 부른다. 방아쇠이고 기폭제이다. 『능엄경언해』는 그 기(機)를 망식(妄識)이라고 풀이한다. 망(妄)이란 글자, '거츨다'라고 새긴다. 때로는 '거짓'이라고 새기기도 한다. 식(識)이란 글자, '알다' 또는 '아롬'이라고 새긴다. 이 글자는 '아롬' 전체를 통칭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의식을 가리킨다. 매덕스나 피카드가 사람을 가리는 조건으로 들어 주었던 컨셔스니스(consciousness), 그 의식에 해당하는 말이다. 의식은 금을 따라 아는 능력을 가리킨다. 요즘에는 논리라는 말을 쓴다. 망식은 말하자면 구멍이 숭숭 뚤린 논리이다. 엉성하게 그은 금을 따라 사유하는 일을 가리킨다. 제딴에는 옹근 논리인 듯 싶지만, 엉성한 논리, 그게 환(幻)을 시동하고 발동한다. 불교의 '곡도', 기관이나 괴뢰는 비유이다. 사람이 짓는 일을 풀어 주려는 비유이다. 이에 비해 환(幻)이란 글자는 그 일의 본질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지어낸다. 환(幻)은 거짓의 아롬으로 지어내는 일, 또는 지어낸 것의 본질이다.

불교 책에 나오는 이런 비유, 이런 이야기들, 나는 '기관목인 판타지'라고 부른다. 불교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말 그대로 차고 넘친다. 데이터의 이야기는 SF,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부른다. 요즘의 과학을 바탕으로 한다. 불교의 곡도 이야기는 짧게는 천년, 길면 이천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야기의 틀을 따져 보면 곡도의 이야기, SF의 이야기와 똑 닮았다. 곡도 이야기는 멀쩡한 몸을 가진 사람이 곡도가 되어 가는 일, 또는 거꾸로 곡도가 사람이 되는 일을 그린다. 데이터의 이야기는 기계가 사람이 되어가고, 또는 사람이 기계가 되어가는 일을 그린다. 데이터의 이야기는 과학이고 이제는 거의 현실이 되었다. 아직은 그래도 이야기, 곡도의 눈으로 따라 가다 보면 스타트렉의 마지막 프론티어는 우주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사람이 짓는 일, 매덕스의 생각도 있지만, 가이넌의 판단도 있다. 다들 멀쩡한 사람인 듯 싶겠지만, 한 기(機)에 괴뢰가 될 수 있다. 노예가 되기도 한다. 곡도의 이야기, 사람의 일, 아주 오래 된, 그래도 아직 끝까지 가 보지 못한 프론티어라는 생각도 든다.

붕두괴뢰(棚頭傀儡), 불교의 곡도 이야기, 일본에서는 이 이야기에 기대어 '공각기동대'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여기서도 기계와 사람의 금을 의심한다. 언해불전에도 똑 같은 말, 똑 같은 이야기가 거듭 나온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잊혀진 이야기가 되었다. 말이 길어지면 헛소리가 된다. 곡도가 된다. 그래도 주절 주절, 기관목인 판타지를 늘어 놓는 까닭은 잊혀진 우리말투, 잊혀진 이야기가 아깝기 때문이다. 사람의 금, 곡도의 금, 우리 조상들은 이런 일도 의심했다. 이런 일도 우리말로 우리의 금으로 나토았다. 우리도 이런 말투, 이런 이야기에 기대어 미래를 바라보면 어떨까? 그래서 하는 소리이다.

기관목인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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