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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본래평등, 본래자유

4.1 본래 제 뒷논


기이하며, 기이할셔!


일체의 중생을 널리 보니, 여래의 지혜 덕상(德相)을 갖추어 두되, 오직 망상과 집착으로 알지 

못하놋다.


석가모니의 첫마디, 놀라움의 원인이다. 구유(具有)를 ‘갖추어 두다’라고 새겼다. 요즘말로 치자면, 완비(完備), 빠짐없이 완전히 갖추었다는 말이다. 부처가 가진 것, 누구나 다 골고루 완비했단다. 이건 그냥 첫마디가 아니다. 이 마디가 거듭된다. 석가모니의 말은 이게 전부다. 언해불전이 하고 싶은 말도 이게 전부이다. 그래서 언해불전의 번역과 풀이도 이 마디를 거듭 싸고 돈다.

모로기 알고

곧 전(筌)을 잊으리니

예로부터 눈썹 털이 눈가에 있도다

향상(向上)의 기관(機關)을 어찌 족히 이르리오

배 고프면 밥 먹고 잇브거든 자니라


전(筌)은 고기 잡는 그릇이다. 그릇을 잊는다 함은 고기잡고 그릇을 잊는다는 말이다. 오늘의 아롬이 오히려 그릇이니, 안 마음도 또 잊을 것을 가잘빈다. 내 몸에 본래 뒷논 것을 아니, 따로 새로 이루어 기특(奇特)할 것도 없다. 그래서 예로부터 눈썹 털이 눈가에 있다고 했다. 하마 기특할 게 없으면, 아침이 오고 나죄 감에 배고프면 밥 먹고 잇브거든 잘 따름이다. 이 것이 부처와 조사의 향상(向上)의 기관이다. 어찌 기특하다 이르리오.


돈각(頓覺)을 ‘모로기 알다’라고 새긴다. 돈(頓)은 점(漸)의 짝이다. 순서를 거쳐 가는 일은 점이다. 이에 비해 순서도 단계도 없이 문득, 담박에 이뤄지는 일이 돈이다. 혼연일체(渾然一體)라는 말이 있다. 혼돈(混沌)이란 말도 자주 쓴다. 혼(渾)이나 혼(混)도 ‘모로기’라고 새긴다. ‘오록하다’고 새기기도 한다. ‘오롯하다’의 옛말이란다. 한 몸처럼 나누어 지지 않은, 구별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한몸이기 때문에, 구별이 없기 때문에 ‘모로기’이다. 잠을 깨면 그냥 안다. 알기 위하여 달리 무슨 짓을 할 필요가 없다. 빛을 비추면 그냥 본다. 보기 위해 달리 애를 쓸 필요도 없다. 직각(直覺)이나 직관(直觀)이란 말도 있다. ‘곧 알고’, ‘바로 본다’. 비슷한 말이다. 그러나 ‘곧’은 시간의 사이를 가리킨다. 시간이 아주 짧다는 뜻이다. ‘바로’는 공간의 사이를 가리킨다. 틈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직선은 점과 점을 바로 잇는 선이다.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빛의 속도로 가더라도 틈은 있다. 이에 비해 모로기는 ‘본래 한가지’의 뜻이다. 시간과 공간의 사이조차 없다.

본유(本有)를 ‘본래 뒷다’라고 새긴다. ‘뒷다’, 사전은 ‘두어 있다’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내 몸에 본래부터 있는 것이다. 눈썹의 털은 눈가에 있다. ‘눈은 빗고 코는 곧다’는 말도 있다. 눈은 가로로 찢어졌고, 코는 세로로 늘어졌다. 그런 몸, 그런 낯, ‘천만의 부처도, 장삼이사도 한가지로 뒷다’고 한다. 눈이 있으면 볼 수 있다. 볼 수 있으면 알 수 있다. 부처도 중생도 한가지, 눈이 한가지, 몸이 한가지다. 눈의 평등, 몸의 평등이다. 평등의 가르침 참 쉽다. 석가모니는 기이할셔라고 했다. 저 노래는 기특할 게 없다고 한다. 기특할 게 없는 몸으로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른다. 기특할 게 없는 평등함에서 차이도 생기고 차별도 생긴다. 그래서 기이하다. 부처와 중생, 다를 게 없다. 놀랄 것도 없다. 모르기 전에도 배고프면 먹고 잇브면 잔다. 노(勞)를 ‘잇브다’라고 새겼다. 피곤하고 노곤하다. 알고 난 뒤에도 배고프면 먹고 잇브면 잔다. 아침과 '나죄', 또는 '나조해', '낳'은 저녁, 해질 녘을 가리킨다. 아침이면 눈 뜨고 나죄는 눈 감는다. 별다를 게 없다. 놀랄 것도 없다. ‘모로기 알다’는 이런 뜻이다.

하지만 이런 말도 부질없다. 한가한 소리다. 배고프면 먹고, 잇브면 자고, 세상이 이랬더라면 석가모니도 놀랄리 없다. 그 뒤의 석가모니의 삶, 도리어 잇브다. 오히려 고달프다. 밥 한 그릇 얻어 먹자고 몇십리, 몇백리를 걸어 다닌다. 밥의 평등, 빌어 먹는 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한 끼니 얻어 먹고도 잘 틈은커녕 쉴 틈도 없었다. 어디 석가모니뿐일까? 성인의 삶이야 다 잇브다. 고달프다. 중생이 잇브기 때문이다. 밥 한끼니, 잠 한숨, 멋대로 할 겨를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잇븐 길 기꺼이 갈뿐이다. 잇븐 석가모니, 그게 다 ‘눈썹의 털은 눈가에 있다’, 또는 ‘눈은 빗고 코는 곧다’ 이걸 위해서라고 한다. 몇십년을 이 이야기를 하고 다녔단다. 그래도 모른다. 그래도 잇브다.

‘제 뒷다’는 자유(自有)이다. 제 안에 있는 것이니 제가 가진 것이다. 자유(自有)이기 때문에 자유(自由)이다. 제 뒷기 때문에 제닷이고, 제쥬변이다. 제가 본래 가진 것은 제 눈이다. 제 몸이다. 몸이 있으면, 몸을 가졌다면, 부처와 한가지다. 제 한가지, 이건 평등이다.

보리는 중생과 부처가 한가지로 뒷논 것이라

보리는 ‘알다’는 말이다.


보리는 보디(bodhi), 인도 말이다. 한문으로는 각(覺)이라고 새긴다. 요즘은 보통 ‘깨닫다’ 또는 ‘깨달음’이라고 새긴다. ‘깨닫다’는 잠을 ‘깨다’와, ‘알다’ 를 합한 말이다. 잠에서 깨면 누구나 그냥 안다. 아! 꿈이었구나, 모로기 안다. 사나운 꿈을 꾸었다면 한숨을 돌린다. 고운 꿈을 꾸었다면 아쉽다. 깨고 싶지 않다. 이런 일, 따로 배울 필요도 없다. 보면 그냥 아는 일, 그런 일도 의외로 많다. 보리는 그런 일이다. 보리도 ‘알다’지만, 부처도 ‘알다’이다. 눈썹 털은 눈가에 있다. 눈은 가로고 코는 세로다. 이게 ‘내 몸에 본래 뒷논’ 것이다. 한가지로 뒷논 것이다. 잠만 깨면 된다. 빛을 비추기만 하면 된다. 본래 가진 것, 그래서 자유이다. 제닷이고 제주변이다. 그래서 평등이다. 모두가 한가지이다.

사람마다 발 있어 녀고자 하면 곧 녀며, 머물고자 하면 곧 머무는지라, 다른 사람에게 구하지 않는다. 저마다 손 있어 잡으려 하면 곧 잡으며, 놓으려 하면 곧 놓는지라 남의 힘을 빌지 않는다. 밥 오면 입 벌리고, 잠 오면 눈 감음에 이르니 일체 쥬변하는지라, 남의 능(能)을 빌지 않는다.


본래평등, 본래자유, 같은 말이다. 발이 있다면 갈 수 있다. 손이 있으면 잡을 수 있다. 발이 있는 이, 손이 있는 이, 발과 손이 ‘본래 뒷논 것’이다. 이렇게 뻔한 이야기를 자꾸 하는 까닭은 그래도 모르기 때문이다. 평등을 뒤집고, 자유를 뒤집는다. 발이 있어도 가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몰라서 못가는 이도 있다. 누군가 억지로 막아서 못가는 이도 있다. ‘본래 뒷논 것’, 우선 믿어야 한다. 우선 알아야 한다. 제가 뒷논 제 몸이다. 우선 알아야 가는 수도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