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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20_01 알게코와 없게코

증도가 현각의 노래

모로기 알고

여래선(如來禪)을


육도만행(六度萬行)이 체(體)의 가운데 두려우니


꿈 속에 명명(明明)히 육취(六趣)가 있나니

깬 후(後)에 비어 대천(大千)이 없으니


꿈과 깸의 짝이, 있음과 없음의 짝으로 짜인다. 명명(明明)과 공공(空空), 언해는 공공(空空)을 '비어'라고 새긴다. 이런 말도 '공(空)으로 공(空)을 깨다', 까다롭게 풀려는 사람들도 있다. 언해의 말투는 늘 짧고 쉽다. 짦은 말투에도 까닭이 있다. 훤한 말에 대한 자신감이다. 꿈과 깸, 있음과 없음의 짝 사이에 '모로기 알고'가 있다. 꿈속에선 모르지만, 깨면 안다. 모르면 있지만, 알면 없다. 댓구는 이분법이다. 짝으로 나누어 보고, 합해 보는 방법이다.

깬 후(後)에 비어, 대천(大千)이 없으니


아래부터 제 매었던 줄, 처음 신(信)하라

이제 본래(本來) 빈 줄, 모로매 알려 할진대는

문(門) 밖의 퍼런 뫼, 훤한 데 지옜도다


'지여다'는 '기대다'의 옛말이다. 퍼런 뫼가 훤한 데에 기대었다. 이건 남명의 말투이다. 퍼런 뫼와 훤한 데, 있음과 없음의 짝을 가잘빈다. '명명히 있음'이 '빔'에 기대었단다. 훤한 허공에 기댄 산, 남명의 노래, 남명의 말장난이다.

색(色) 없게코, 공(空) 밝힘은 이 진공(眞空) 아닐새 이르시되, '문(門) 밖의 퍼런 뫼, 훤한 데 지였다' 하시니라.


그러나 첫 두 구(句)는 금시(今時)의 공(空)이오, 삼사구(三四句)는 본래(本來)의 공(空)이라.


남명의 말장난, 언해의 풀이는 또한 날렵하다. 색(色)과 공(空)의 짝, '있음'과 '없음'의 짝이다. '있음'을 '없게 하면' '없음'이 된다. 그런데 '없게 한' '없음'은 진공(眞空)이 아니란다. 언해는 남명의 노래를 '금시(今時)의 공(空)'과 '본래(本來)의 공(空)'으로 나누어 읽는다. 이제 막 시작한 노래, '있음과 없음', '짝을 다루는 언해의 풀이', 언해의 방법도 이제 막 시작이다. 이게 참 볼만하다.

이 구절을 불러 내심은 사람이 알게코자 하심이다.

색(色) 없게코, 공(空) 밝힘은 이 진공(眞空) 아닐새


'알게코자 부른 구절', '알게코'와 '없게코', 말투를 견줘 보면 언해의 뜻이 말갓말갓이 밝게 나타난다. 알게코자 부른 노래이지만, 없게코자 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알게코'와 '없게코', 모두가 '하욤'이다. 사람의 뜻이고 짓이다. 저 구절에서 언해는 '사뭇 비다'와 사뭇 있다'를 마주 세운다. 철저공(徹底空)과 철저유(徹底有)의 짝이다. 이건 '대(對) 되옴', 작대(作對)의 구절이다. '사뭇 빔'은 '사뭇 있음'을 향한다. '사뭇 있음'은 '사뭇 빔'을 향한다. 이건 '대(對) 긋나니', 절대(絶對)의 구절이다. 언해는 중간구라고 부른다. 절대의 구절은 철저공의 구절도 아니고, 철저유의 구절도 아니다. 짝이 서로를 향하는 사이에 짝이 사라진다. 이런 말투, '색을 없게코 공 밝힘'이 아니다. 작대와 절대, '하욤'의 방법이다. 이것도 '알게코자' 세운 말투이다. 그런데 이 방법, '없게코'로 읽으면 안된다. 이 것이 언해의 뜻이다. 진공은 '철저공'이 아니다. 물론 '철저유'도 아니다. 진공은 양 극단, 그 중간의 구절이다. 예를 들어 절대(絶對)의 구절을 철저공이나 철저유로 읽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없게코'의 읽기가 된다. '하욤'의 읽기가 된다. 그렇게 읽지 말라는 뜻이다. 언해의 이런 읽기, 이게 참 '알게코'의 별미이다. 언해가 찾은 '알게코'의 묘수이다.

'금시(今時)의 공(空)'과 '본래(本來)의 공(空)', 이 것도 언해불전이 즐겨 쓰는 짝이다. '알게코'의 방법이다. 언해불전은 '이제의 공(空)'과 '본래의 공(空)'이라고 새기기도 한다. 이건 '이제'와 '본래'의 짝이다. 남명은 시신(始信)이란 말을 쓴다. 언해는 '처음 신(信)하라'고 새긴다. 이제와 본래의 사이에 '처음'을 둔다. '믿을 신(信)'이란 말을 쓰는 까닭은 '알게코'가 '믿게코'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믿게코'는 '알게코'의 방법이다. 그래서 이제와 본래 사이에 '처음'을 둔다. 꿈과 깸 사이에 '아롬'이 있듯, 이제와 본래 사이에도 '아롬'이 있다. 꿈과 깸 사이의 '처음'은 꿈과 깸이 갈리는 순간이다. 깨면 바로 안다. 그 순간이 '처음'이다. 이 순간은 '아롬'의 순간이다. 이제와 본래의 사이에도 처음이 있다. 이 처음도 '아롬'의 처음이다. 말을 가리자면 알게코의 처음도 있지만, 없게코의 처음도 있다. '하욤'의 처음도 있지만, '하욤없음'의 처음도 있다. 언해의 말투, 이 차이가 무척 크다. 이 차이에서 헷갈리면 언해불전이 온통 헷갈린다.

본래 공(空)이라 하야 본래 닦지 아니하면, 한 생(生)에 생사(生死)의 고(苦)이오,

이제 공(空)하니라 하야 이제 닦지 아니하면, 어찌 고(苦)를 벗으리오.


이건 『원각경언해』의 구절이다. 다생(多生)을 '한 생'이라 새긴다. '하다'는 '많다'의 옛말이다. '이제 공'과 '본래 공'을 가린다. 이 말투는 언해불전의 말투이기도 하지만, 우리 불교의 말투이기도 하다. '이제'와 '본래'의 짝, 원효대사가 가린 짝이다. 이제와 본래 사이의 처음, 원효의 말투가 동아시아 한문 불교의 전통이 되었다. 원효의 말투와 언해의 말투, 이건 좀 미뤄 두자. 『원각경언해』는 이제와 본래 사이에 '닦을 수(修)', '닦음'을 세운다. '닦음'은 '하욤'이다. 사람의 짓이다. '생사(生死)의 고(苦)'와 '고(苦)를 벗으리오', 이 것도 짝이다. 탈고(脫苦)를 '고(苦)를 벗으리오'라고 새긴다. 생사와 해탈의 짝이다. 이 사이에는 고통, 괴로움이 있다.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 이건 '하욤'이다.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뭘 해야 하나? 어찌 해야 하나? 언해불전도 이걸 다룬다.

환(幻) 같은 경계를 아지 못함은 연(緣)하여 이는 사상(事相)을 아지 못함이라

아래 일을 아지 못하야 망상으로 해탈 못하니, 이제 또 아지 못하거니 어찌 해탈을 얻으리오


종래(從來)를 '아래'라고 새긴다. 때로는 '아래부터'라고 새기기도 한다. 이제와 본래의 짝, 언해불전의 짝, 작대와 절대의 방법은 '아롬'을 다루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연(緣)하여 이는' 일로부터 이어진다. 연기(緣起), '브터니닷'을 이렇게 새기기도 한다. 언해의 짝은 '브터니닷'을 '알게코' 하는 가장 작은 단위이다. 짝으로 브터니닷을 풀이한다. 짝을 세우고, 짝을 서로 향하게 하고, 짝을 긋는다. 그런데 '알게코' 하는 방법, 괴로움을 '없게코' 하는 방법이다. '없게코'는 '하욤'이다. 꿈에서 깨기 위한 '하욤'이다. 그런데 처음 꿈에서 깨고 나면, 모르던 사이에 처음 알게 되면, 본래 '브터니닷', 없음에서 일어난 일, 없음에서 있음으로 생겨난 일, 그 실상을 알게 된다. '본래'는 그 모습을 나토는 말투이다. 이제와 본래의 짝, 이것도 '알게코'하는 하욤이다. 하지만 알고 나면 '하욤'은 '하욤'이 아니다. 아롬에 하욤은 없다. '이제'와 '본래' 그 사이의 '하욤', 그리고 '하욤없음', 이 말투의 차이는 정말 크다. 이 차이를 헷갈리는 이들이 정말 많다. 언해불전은 이 사이를 쉬운 우리말로 이어 간다. 동서고금에 쉽지 못한 말투이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