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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30_02 공부 좀 하지마

증도가 현각의 노래

그대는 아니 보난다?

배움 그쳐 하욤없은 겨르로운 도인은,


영가의 노래, 첫 구절이다. 배움과 하욤과 겨르로움, 이 세 가지가 열쇠말이다. 무학, 무위의 도인, 배움이 그쳤다니, 어지간히 배울만큼 배운 모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더 배울 게 없는 이'라고 읽는다. 더 이상 공부할 필요도 까닭도 없는 사람, 그대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그런 사람이 따로 있다. 그런 사람을 도인이라고 부른다. 그대여, 부럽지 않아? 한번 덤벼 보지 않을래? 대개는 이런 식이다. 그럴까?

또 붙어 주(註)하여 사긴 사람은,

또 알지 못하리로다, 그 얼마나 될까?

그러나 진실로 영가의 뜻을 얻은 사람이 어려우니라.


이건 『증도가남명계송』, 이 책 끝에 실린 발문의 구절이다. 주석(註釋)을 '주(註)하여 사김'이라 새긴다. 알지도 못할만큼 숱한 사람들이 영가의 노래에 붙어 주(註)하여 사겼단다. 그런데 진실로 영가의 뜻을 얻은 사람, 어렵다고 한다. 아주 적다는 뜻이다. 배움도 그치고, 하욤도 없고, 그래서 겨르로운, 이런 노래를 불러 대는 영가의 뜻은 도대체 뭘까? 이어지던 노래, 영가는 나무 사람까지 들이댄다. 부처 구해 열심이 공부하면 부처가 될까? 물론 안된다. 노래만 따라가도 어려울 게 없다. 같은 말을 다시곰 거듭하기 때문이다. 공부 하지마, 제발 좀. 공부 좀 그만 해! 이게 영가의 뜻이다. 거짓말이라면 내 혀를 뽑히리라, 제 혀까지 건다. 남명은 시신(始信), 처음 믿으라고 한다. 이 말을 거듭한다. 그만 해, 제발 좀 믿어 봐.

영가의 그대, 무엇보다 출가한 수행자들이다. 요즘엔 직업 정치인이란 말이 있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 어설프긴 해도 뭔가 말은 되는 것도 같다. 영가의 그대들, 부처되는 공부, 도 닦는 일에 몸을 건 이들이다. 말하자면 부처되는 공부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묻는다. 그런다고 부처 되겠니? 그런다고 도인 되겠니?

하다가 한갓 닦으며 증(證)함에 붙으면,

이 유위(有爲)의 공행(功行)이라,


무위과(無爲果)에 맞음이 어려울새,

이르시되 '부처 구(求)하여 공(功) 들이면 어느 제 이루리오' 하시니라.


'닦으며 증(證)함', 남명의 수증(修證), 남명의 공부이다. 언해는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짝으로 읽는다. 언해의 말투, '하욤있음'과 '하욤없음'의 짝으로 새긴다. 무위(無爲)라는 말, 흔히 듣는 말이다. 무위자연이란 말도 있듯, 노자와 장자를 떠올린다. 불교에서도 자주 쓰는 말, 이 말은 무겁다. 세상엔 무거운 것도 참 많다. 무엇보다 '공부'란 말, 듣기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공부를 업으로 삼는 아이들은 어떨까? 얼마나 무거울까? 교과서를 따라 가기도 버거운 마당에 유위(有爲)의 공부는 또 뭐고, 무위(無爲)의 결과는 또 뭐람. 그런데 언해의 '하욤', '하욤있음'과 '하욤없음', 나는 이 말투가 정말로 고맙다. 말도 가볍지만 거기 담긴 뜻도 가볍다. 무거운 공부는 안해도 돼. 아니, 구태여 하는 게 바보지. 언해의 말투, 공부의 무거움마저 덜어 준다. 무거운 말에 무거운 공부, 쓸 것도 없고 할 것도 없다.

여래는 진(眞)한 말 하는 이며,

실(實)한 말 하는 이며,

여(如)한 말 하는 이며,

속이지 않는 말 하는 이며,

다르지 않은 말 하는 이라.


일체 중생이 본래 제 부처이니,

하다가 여래가 중생을 도탈(度脫)하여 성불케 하시니라 하면,

곧 거짓말이니,


위의 구절은 『금강경언해』의 구절이다. 경전의 구절, 부처의 말씀이다. 아래 구절은 육조혜능의 풀이이다. 부처는 중생을 제도하지 않는다. 공부하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그런 말은 거짓말이다. 부처의 기이할셔, 함허는 이 말로부터 시작한다. 본래 제 부처인 중생, 그런데도 죽살이의 바랄에 헤매는 중생, 부처는 죽살이의 바랄을 향한다.

부처의 불(佛), 언해는 '아롬'이라고 새긴다. 부처의 깨달음, '깨어 아롬'이다. 부처는 '아는 이'이다. 부처의 아롬, 공부해서 아는 게 아니다. 눈을 뜨면 그냥 본다. 잠을 깨면 그냥 안다. 아롬은 '하욤'이 아니다. 눈이 있다면 볼 수 있다. 잠을 자고 꿈을 꿀 수 있다면, 잠과 꿈에서 깰 수도 있다. 깨면 모로기 안다. 그런 일에 구태여 낀 이름이 불성이다. 부처이다. 눈을 감으면 모르고, 눈을 뜨면 안다. 잠을 자면 중생이고, 잠을 깨면 부처이다. '중생이 본래 제 부처', 육조의 말씀이다. 언해는 본연(本然)을 '본래 그런'이라고 새긴다. 본래 그런 일, 본래 제가 뒷논 것, 밥 안먹고 잠 안자고 잇비 공부해서 얻을 게 아니다.

하염없다


1, 시름에 싸여 멍하니 이렇다 할 만한 아무 생각이 없다.

2, 어떤 행동이나 심리 상태 따위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는 상태이다.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하염없이 비도 내리고 눈도 날린다. 이 말의 뿌리가 무위(無爲)이다. '하욤없이'이다. 구태여 울지 않으려 해도 눈물이 흐른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릴 비는 내린다. 언해불전은 '부러', 또는 '구태여'라는 말을 붙여 쓰기도 한다. '부러'는 고의(故意)이다. '구태여'는 강(强), 억지로 하는 일이다. 부러도 없고, 구태여도 없는 게 '하염없이'이다. '시름에 싸여야'만 '하염없이'가 아니다. '멍해야' '하염없이'도 아니다. 본래부터 그런 일, 이제라도 믿으라고 한다.

하다가 한갓 닦으며 증(證)함에 붙으면,

이 유위(有爲)의 공행(功行)이라,


이 구절, 언해의 열쇠말은 '한갓'과 '하욤'이다. 한갓은 일향(一向)이다. 하나의 가, 하나의 쪽이다. 한결같이 하나의 방향만을 바라 보는 일이다. 부처와 중생, 아롬과 모롬, 짝의 말투이다. 아는 부처는 죽살이의 바랄, 모르는 중생을 향한다. 그런데 죽살이의 중생들은 부처를 바라 본다. 부처의 아롬, 부처의 열반을 향한다. 도 닦는 수행자들도 한갓 부처를 바라본다. 부처를 바라 봄, 그걸 닦음이라고 부른다. 공부라고 부른다. 언해는 그런 닦음, 그런 공부, '하욤 있는' 공부라 부른다. 한갓 하욤, 그건 부처를 거스르는 하욤이다. 무위과(無爲果)에 맞음이 어려울새, 부처의 아롬과는 맞기 어렵다. 그래서 영가는 나무 사람을 끌어 내어 다시곰 묻는다. 그런 공부, 어느 제 이루리오?

런! 포레스트 런! 포레스트 검프도 한갓 달린다. 달리는 포레스트, 사람들은 바보라 부른다. 한갓 달리는 일, 사람들도 이미 다 안다. 한갓 달리는 일, 바보나 하는 짓이다. 그런데 기이한 일, 제 귀한 아이들에게도 외친다. 공부 좀 해라. 달려라, 내 아이, 앞만 보고 달려라. 달리는 포레스트, 어디를 향할까? 달리는 아이들, 어디를 바라 볼까? 부처라면 뭐라 할까? 영가라면 뭐라 할까?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