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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19_02 브터니닷의 방법

증도가 현각의 노래

구울어 횟도는 죽살이의 바랄에, 나고자 할진댄

모로매 북두(北斗)를 좇아, 남성(南星)을 바랄지어다


글에 붙어 뜻을 찾고, 뜻에 붙어 글을 찾는 길, 언해는 저런 말투로 어떤 뜻을 찾았을까? 함허는 요연소저(了然昭著)라는 말을 쓴다. 언해는 '말갓말갓이 밝게 나타남'이라고 새긴다. 밝고 훤하여 분명하고 뚜렷하게 보인다는 말이다. 군소리 같지만, 데카르트가 했다는 명석판명(明晳判明, Clear and Distinct)이란 말이 떠오른다. '말갓말갓', 보통은 '맑다'를 떠올린다. 하지만 언해의 말투는 좀 다르다. 요(了)라는 글자, '알다'에 붙어 있다. 자전은 보통 명백(明白)이라고 풀이한다. '훤하여 번득하다'는 뜻이다. 이 것도 군소리, 언해의 쓰임이 그렇다는 말이다. 구울어 횟도는 죽살이의 바랄, 말갓말갓하고 훤하다. 말갓말갓한 말투에 밝게 나타나는 뜻, 언해는 그런 말에 어떤 뜻을 담으려 했을까? 그 말투도 아깝지만, 그 뜻도 아까워 자꾸 군소리가 낀다.

꿈은 몰랐는 끠라


이런 풀이도, 참 번득하다. 훤하다. '' 라는 말도 시원하다. 언해는 '꿈과 깸'을 '모롬과 아롬'으로 읽는다. 이런 읽기, 언해불전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다. 꿈도 깸도 평상의 일이다. 모롬도 아롬도 평상의 일이다. 그런 게 불교라고 한다. 쉽고 뻔한 소리를 거듭한다. 이런 말투에도 분명 브즐우즐하신 노파심, 할매의 마음이 담겼겠다.

남성(南星)은 생사(生死)이라.

북두(北斗)는 열반(涅槃)이라.


하다가 능(能)히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둘 아닌 땅을 밟으면,

생사(生死)에 윤회(輪廻)함이 붙지 못할새, 이르시되

윤회(輪廻)하는 '생사(生死)의 바랄에 나고자 할진대는

모로매 북두(北斗)를 좇아 남성(南星)을 바랄지어다' 하시니라.


북쪽 하늘의 별과 남쪽 하늘의 별, 남명의 노래는 좀 뜬금없다. 아는 사람만 알아 듣는다. 언해는 이를 대(對)로 읽는다. 먼 하늘의 다른 별, 이단의 대(對)이고 극단의 대(對)이다. '남성(南星)은 생사(生死)', '북두(北斗)는 열반(涅槃)', 언해의 풀이는 날렵하다. 대장경, 속장경, 말도 많다지만, 이렇게 짧고 번득한 풀이는 어디에도 없다. 생사와 열반, 무거운 짝이다. 부처의 가르침이 여기에 다 걸렸다. 언해는 평상의 말투로 가볍게 툭 던지고 만다.

1, 니원(泥洹)은 범어(梵語)이니, 예서 이르기는 살도 아니하며 죽도 아니할시니,

또 열반(涅槃)이라고도 하느니라.


2, 열반은 '없다 하는' 뜻이라.


3, 니원(泥洹)

도를 완전히 이루어 모든 번뇌와 고통을 끊고 불생불멸의 법성을 깨달은 해탈의 경지.


'1,' 의 풀이는 바로 이 노래, 『증도가남명계송』의 풀이이다. '2,'의 풀이는 『금강경삼가해』의 풀이이다. '3,'의 풀이는 불교어 사전의 풀이이다. 열반(涅槃), 또는 니원(泥洹), 보통 '멸(滅)이라고 새긴다. 언해는 이 글자도 '없다', 또는 '없게 하다'로 새긴다. 요즘의 불교책을 보면, 으레 '3,'같은 풀이가 길게 늘어진다. 모르는 말을 모르는 말로 풀이한다. 그 뒤에는 꼭 '무슨 경지', 이런 말이 붙는다. 딱히 인도말이나 한자말이라서 어려운 게 아니다. 언해의 풀이와 견주어 보면 그 차이를 금방 알 수 있다. '없다', 또는 '없애다', 쉬운 말이다. 풀을 태워 없앨 수도 있고, 몸을 태워 없앨 수도 있다. 핵폭탄으로 지구를 날려 없앨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없게 하다', 동사이다.

그런데 곡도같이 된 빈 몸, 본래 없던 몸이다. 된 몸, 또는 빈 몸, 구태여 없애지 않아도 본래 없다. 꿈에서 겪던 일도, 깨면 그냥 없다. 이건 동사가 아니다. 꼭 번뇌와 고통을 끊어야만 니원이 아니다. 꼭 법성을 깨닫고 경지에 올라야만 열반이 아니다. '없음', 또는 '없앰', 이것도 이름이고 그릇이다. 똥도 담을 수 있고, 밥도 담을 수 있다. 뭐라도 담을 수 있다. 생사와 열반이라지만, 언해는 뭘 담을지는 따지려 들지 않는다. 없음일까, 없앰일까? 그저 그릇만 가리킨다.

언해는 '죽살이'와 '없음'을 마주 세운다. 한 끝에 '죽살이'를 두고, 다른 한 끝에 '없음'을 둔다. '꿈과 깸', '모롬과 아롬', '죽살이와 없음' 짧고 훤한 우리말이다. 언해는 이런 대구로 이 노래를 읽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 '붙다'라는 동사를 끼운다. '붙다'는 언해불전만이 가진, 언해불전의 열쇠말이다. 집착도 '붙다'로 풀고, 연기도 '붙다'로 푼다. 한자말투의 불교와는 다른 우리말투의 불교이다. 우리말투의 우리 불교가 '붙다'에 걸렸다.

죽살이에 붙을까, 없음에 붙을까? '구울어 횟도는 죽살이의 바랄에, 나고자 할진댄', 이래서 죽살이는 없음을 향한다. 없음으로 붙는다. 죽살이의 없음, 또는 없앰이다. '북두(北斗)를 좇아, 남성(南星)을 바랄지어다', 이건 남명의 말투이다. 이건 또 뭐람? 언해의 풀이는 번득하다. 눈길을 거꾸로 돌린다. 없음에 붙어 다시 죽살이를 바라본다. 향대(向對), 양 끝의 구절이 서로를 바라보게 한다. 언해의 말투 사이에는 대구를 읽는 나름의 손, 방법이 담겼다.

약인(若人)이 신득급(信得及)하면 북두(北斗)를 면남간(面南看)하리라.

하다가 사람이 아롬이 미치면, 북두(北斗)를, 남녘을 향하여 보리라.


이건 『금강경삼가해』, 야보(冶父)의 노래이다. '남녘을 향하여 북두를 보리라', 이 것도 유명한 선불교의 공안이다. 남녘 하늘을 향하였는데, 어찌 북녘 하늘의 별을 볼까? '남북의 차별을 넘어, 절대의 경지에 도달함을 가리킨다.' 오래 전, 이런 풀이를 읽은 적이 있다. 이 것도 흔한 말투이다. 선불교의 공안, '알음알이로 헤아리지 말라'는 경고도 숱하게 들었다. 차라리 말이나 말지.

남명은 면(面)이란 글자를 종(從)이라고 고쳐 부른다. 언해는 '좇아'라고 새긴다. 이 차이는 뭘까? 면(面)으로 읽으면 이 말은 모순이다. 남녘을 면하여는 북두를 볼 수 없다. 내 몸의 내 눈, '보다'의 한계이다. 종(從)으로 읽으면 말은 된다. 북두의 관점에서 남녘을 보라는 말이다. ' 남명의 종(從)은 남명의 읽기이다. 야보의 면(面), 언해는 향(向)으로 읽는다. '......로부터', 조사로 쓰는 '부터'도 '붙다'에서 나왔다. 죽살이로부터 벗어나는 일, 없앰을 향한다. 죽살이를 없게 하는 일이다. 중생의 선택이다. 중생의 바람이다. 죽살이로부터 없음을 바라 본다. 남명도 언해도, 그러고 싶다면, 붙는 방향을 바꾸라고 한다. 없음으로부터 죽살이를 바라 보라고 한다. 나는 향대(向對)의 논리, 향대의 방법이라고 부른다.

하다가 능(能)히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둘 아닌 땅을 밟으면,


비면 밑이 사뭇 비고

있으면 밑이 사뭇 있나니

비거나 있거나 함에 낱낱이 대(對) 긋거니

어찌 세 구(句)에 거리끼리오


언해의 풀이, 툭 던지고 넘어 가는 듯 싶지만, 할 말은 하고 간다. '죽살이와 없음이 둘 아닌 땅', 언해불전에서 '중간구'라고 부르는 땅이다. '대(對) 긋거니', 이게 절대(絶對)의 땅이다. 절대의 땅은 추상의 땅이다. '밑이 사뭇 비고', '밑이 사뭇 있고', 이건 양 극단의 추상이다. 있고 없고의 짝, '있고'는 '없고'에 붙는다. '없고'는 '있고'에 붙는다. 브터니닷, 붙으면 일어난다. 서로를 향하는 사이에 작대와 절대의 추상이 녹아난다. 죽살이와 없음, '사뭇 죽살이'와 '사뭇 없음'이 서로를 향한다. 서로에 붙으면, 서로가 다 녹아난다. 이게 불교란다. 추상의 땅, 가잘빔의 땅은 땅이 아니다. 경지가 아니다. 선사들은 투과(透過)라는 말을 쓴다. 언해는 '사맟다'라고 새긴다. 세종의 훈민정음서문, 바로 그 '사맟다'이다. 유통(流通), 흐름이고 통함이다. 열린 문으로 드나드는 일이다. 중간구는 열린 문을 가리킨다. 드나드는 일은 사람의 일이다.

하다가 사람이 아롬이 미치면, 북두(北斗)를, 남녘을 향하여 보리라.


남북동서가 다 나의 화(化)한 것이니,

일체 나를 붙어 다 막음이 없으니라.

그러면 일어 세움도 또 내게 있으며,

쓸어 버림도 또 내게 있느니라.


야보의 노래에 함허가 토를 달았다. 남북동서가 다 내가 지어낸 것이란다. 나를 '붙어', 또는 나로'부터', 일어난 일이란다. 함허는 '브터니닷', 연기(緣起)를 가리킨다. 죽살이와 없음, 일으켜 세움도 나에 붙고, 쓸어 버림도 나에 붙는단다. '막음이 없는 땅'은 '둘 아닌 땅'이다. 함허의 말투는 참으로 친절하다. 죽살이에 붙어 없음을 찾는다. 다시 없음에 붙어 죽살이를 찾는다. 그렇게 찾으면 다 녹는다. 다 없다. 함허와 언해는 영가의 노래, 남명의 노래를 이렇게 읽는다. 언해의 연기(緣起)는 방법의 연기이다. 브터니닷의 방법, 브터니닷의 말투, 연기법은 사유하고 소통하는 방법이다. 말에 붙어 뜻을 찾고, 뜻에 붙어 말을 찾는 기술이다. 이런 방법, 또는 기술, 요즘에는 변증법이란 말을 쓴다. 언해의 말투는 훨씬 가볍고 번득하다. '브터니닷'은 동사이다. 건립과 소탕, 이 모든 일이 내 몸에 달렸다. 나 하기에 달렸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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