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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18_01 내 몸의 읏듬

증도가 현각의 노래

육도만행(六度萬行)이 체중원(體中圓)하니

육도만행(六度萬行)이, 체(體) 가운데 두려우니


진체(眞體)에는 같으며 다름을, 잇비 가림 없느니라


『증도가남명계송언해』, 이 노래는 끝말잇기 놀이이다. 영가가 한 구절을 부르면 남명이 이어 부른다. 언해는 바로 새기고 풀이한다. 이어 부르는 노래, 이어 읽게 마련이다. 영가의 노래에는 마디가 있다. 영가 스스로 짜 넣은 마디이다. 하지만 남명과 언해의 노래는 그저 끝말을 따라 간다. 그래서 남명과 언해의 노래에는 달리 마디가 있을 수 없다. 이 구절의 끝말은 체(體)란 글자이다. 헷갈리는 글자이다. 읽는 사람마다 읽기가 다 다르다. '몸'이라는 글자, 어떤 사람은 본체(本體)라고 읽는다. 어떤 사람은 실체(實體)라고 읽는다. 본체는 뭐고, 실체는 뭘까? 하여간 뭔가의 '몸'일텐데, 누구의 몸일까? 어떤 몸일까?

남명은 대뜸 진체(眞體)라고 잇는다. '참기름' 하니, 바로 '진짜 참기름'하는 식이다. 언해도 바로 진체(眞體)라고 받는다. 언해불전에도 자주 보이는 말이다. 대뜸 이어지는 글자들, 대뜸 따라 읽기 어렵다. 영가와 남명, 그리고 언해의 말투, 요즘의 말투와는 사뭇 다르다.

진체(眞體)는 허공(虛空) 같아 막은 바 없으니라.


진체(眞體)는 이른 바의 이(理)의 체성(體性)이니, 하다가 진체(眞體)인댄 벌써 가장 앞에 나타 막은 바가 없을시라.


이건 남명의 노래 아래에 달린 언해의 말투이다. 언해의 말투, '니라다'라는 동사로부터 뿌리를 캔다. '이르다'의 옛말, '말씀을 이르다'는 행위이다. 그릇의 말투, 부처의 말씀, 말씀에는 이치가 담긴다. 언해는 진체를 '이치의 체성(體性)'이라고 읽는다. 요즘엔 이런 일을 추상(抽象)이라고 부른다. 말씀으로부터 이치만을 뽑아 내어 '몸'이라고 부른다. 말씀의 이치와, 이치의 체성, 이런 말투는 번득하지 않다. 배우고 익혀야 한다. 저런 말투, 노래를 부른다면 차라리 그냥 듣고 그냥 넘겨 버리는 게 옳다. 노래 안에 어차피 답도 없다. 말투에 붙으면 노래의 맛도 사라진다.

육조(六祖) 이르되, 일물(一物)이 있나니


머리 없으며, 꼬리 없으며, 이름 없으며, 자(字) 없되

위로 하늘을 괴며, 아래로 땅으로 괴고,

밝음이 해 같으며, 검음이 칠(漆) 같아

상녜 동용(動用) 중에 있으되, 동용 중에 잡지 못한 것이라 하니


그러하야 비록 이 같으나

일물이란 말도 또 강(强)이 이를 따름이니


이건 『금강경삼가해』의 말투이다. 일물(一物), 선사들이 즐겨 쓰는 말투이다. 요즘엔 '한 물건'이란 말을 쓴다. 언해불전에서는 '한것'이라고 새기기도 한다. 언해불전에서는 모든 중생이 평등하게 '본래 제 뒷논 것'을 거듭 이야기한다. 본래 제가 가졌기 때문에 제쥬변, 자유(自由)이다. 제 몸이 원인이다. 모든 몸이 다 가졌기 때문에 한가지, 평등이다. 모두가 한가지로 제쥬변한 까닭, 자유롭고 평등한 까닭, 이것도 '것'이라고 부른다. 이 말도 본래 동사였다. '알다', 또는 알다의 명사형, '아롬'을 '것'으로 읽는 말투이다. 이런 말투를 따르자면 진체는 '아롬'의 이치, 그 이치의 체성이다. 아롬을 추상하고, 거기에 구태여 이름하여 이르는 말투이다. 그것도 '것'이라면 그것에도 몸이 있다. 이 말투는 체용(體用)의 짝이다. '몸'과 '씀'의 짝, 아롬에도 몸이 있고 씀이 있다. 이 짝에서 '몸'만을 따로 뽑아 부를 때, '진(眞)'이란 글자를 붙여 부른다.

체(體)란 글자, 언해불전은 이럴 때 '읏듬'이라고 새기기도 한다. '아롬'의 본체, 또는 '아롬'의 실체, 또는 '아롬' 그 자체(自體), 구태여 부른 이름, 이름도 많다. 육도만행은 모두가 함께 부처로 가는, 아롬을 이루는 길이다. '그것'의 용(用), '그것의 '씀' 또는 '쓰임'이다. 언해불전은 체와 용의 짝을 '읏듬'과 '씀'의 짝으로 새기기도 한다. 제 몸에 본래 뒷논 것, 제 몸에 두루 갖추었기 때문에 달에 가잘빈다. 이지러짐이 없는 두렷한 달이다. 내 몸은 달이다. 빠진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것의 이름', 그 많은 이름 가운데, '읏듬과 씀', 나는 이 이름이 참 좋다. 구태여 부른 이름이라지만 그래도 우리말이 쉽다. 내 몸의 본체, 내 몸의 실체, 내 몸의 자체, 이런 말 말고 '내 몸의 읏듬', 이런 말을 쓰면 좋겠다. 헷갈리는 한자말을 들을 때마다, 볼 때마다, 육백년전, 그런 말을 쓰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글자가 없을 때도, 그런 말로도 할 말은 다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글자도 새로 만들었는데, 정작 말투는 잊혀지고, 한자말로 돌아갔다. 기이할셔......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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