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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11_01 평평하고 옹근 얼굴

증도가 현각의 노래

실상(實相)을 증(證)하면


증(證)은 알시오, 실(實)은 평실(平實)이오, 상(相)은 체상(體相)이니, 평(平)하고 실(實)하야, 거츠롬 없는, 두려이 덛덛한 체상(體相) 아롬을 이르시니라.


'실상(實相)을 증(證)하면', 이런 말도 어렵다. '실상'도 어렵고, '증'도 어렵다. 증(證)이란 글자, 언해는 그냥 '알시오'라고 새긴다. '알다' 또는 '아롬', 이런 말투는 요즘 눈으로 보아도 산뜻하다. 한자말을 바라보는 눈이 요즘과는 사뭇 다르다. 글자의 쓰임도 다르다. 『증도가』는 요즘에도 유명한 노래이다. '도를 깨친 노래', '깨달음의 노래', '도를 증득한 노래', 요즘의 말투는 이렇다. '알시오', 이 말투를 따르자면 이 노래는 '길을 안 노래'이다. '알시오', 내게는 마법의 주문이라고나 할까, 언해불전의 우리말투로 가는 열쇠말이 되었다. 증(證)이란 글자도 돌아 보게 되었고, '알다'라는 말도 되새기게 했다.

실(實)이란 글자는 허(虛)나 공(空)의 짝으로 쓴다. '비다', 또는 '속절없다'의 상대어, 또는 반대말이다. 이 글자는 '열매' 또는 '여름'이란 뜻이다. 가을이 되면 대가리 안에 속이 꽉 찬다. 먹으면 맛도 있고, 배도 부르다. 요즘엔 '알차다', 또는 '옹글다'는 말이 있다. 언해는 이 글자에 평(平)이란 글자를 더해 새긴다. 평이란 글자, 이것도 언해에서 즐겨 쓰는 글자이다. 남도의 평야는 평평한 땅이다. 울퉁불퉁, 들쭉날쭉이 없는 땅이다. 둘러 보아도 별 다를 게 없다. 평등이란 말은 '한가지'라고 새긴다. 평평하기 때문에 차이가 없다. 언해불전에는 평상(平常)이나 '평상심(平常心)이란 말도 자주 나온다. 늘 평평한 상태를 가리킨다. 요즘에는 '보통', 또는 '일상'이란 말을 쓴다. '쳇바퀴 도는 일상'이란 말도 있다지만, 특별할 게 없는 평평한 사람들의 평평한 일상, 평평한 일상을 바라보는 평평한 마음, 현각은 하염없는 겨르로운 도인으로부터 제 노래를 시작한다.

평은 평평함이다. 평평하면 훤하다. 가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훤하면 쉽다. 훤하고 뻔한 나날, 어려울 게 없다. 누구나 보면 단박에 안다. 실(實)은 속이 꽉찬 여름이다. 쉽고 뻔한 일이지만 알차고 옹글다. 그래서 맛도 있고 배도 부르다. 누구나 아는 일, 보통의 일이고, 일상의 말이다. 일도 말도 달리 배울 필요가 없다. 쉽지만 알차고 옹근 얼굴, '거츠롬'은 망(妄)이다. 쉽고 훤하기 때문에 거짓이 없다. 헷갈릴 것도 없다. '두려이'는 원(圓)이다. 알차고 옹글기 때문에 빠진 게 없다. '덛덛한'은 상(常)이다. 언해불전은 '상녜'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상녜롭다', 형용사로도 쓴다. 평평함을 시간의 흐름으로 나토는 말이다. 어제도 평평하고 오늘도 평평하다. 내일도 평평하겠지. 평상(平常)은 그런 말이다. 늘 평평함, 그게 실(實)이다. 알차고 옹근 현실이고, 진실이다. '잇비 경하할' 일도 아니다.

무상불상(無相不相) 고명실상(故名實相) 증차실상(證此實相) 즉무인법이공야(卽無人法二空也)


상(相)도 불상(不相)도 없기 때문에, 실상(實相)이라고 한다. 이 실상을 증(證)하면, 곧 인(人)과 법(法)의 두가지 공(空)이 없다.


실상(實相)이나 체상(體相), 이런 말도 헷갈린다. 사전이나 해설서를 보면 더 헷갈린다. 위의 구절은 『증도가사실』의 말투이다. 이런 글은 아무나 읽을 수 없다. '법수에 있나니라', 이런 글은 법수나 사전을 끼고도 읽을 수 없다. 글자 하나마다 뿌리를 캘줄 알아야 한다. 노래를 따라 부르기는커녕, 글자 하나에 매달려 몇 달도 가고 몇 년도 간다. 나는 그래서 언해의 말투가 고맙다. 언해의 말투는 일상의 말투이고 평상의 말투이다. 노래 구절에 맞추어 평평하고 알찬 말투를 골라 쓰고자 한다. 그래도 쉽지 못한 노래, 이 말투도 얼마간은 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면 말투가 몸에 익는다.

읏듬을 알지 못하고, 망상(妄想)을 쓰는 닷이니


체상(體相), 체(體)는 '몸'이다. 사물, 물건의 몸이다. 나무 하나가 있다고 하자. 몸통이 있고, 가지가 있다. 땅 밑에는 뿌리가 있다. 근본(根本)이란 말은 뿌리와 몸통을 짝으로 쓰는 말이다. 이에 비해 본말(本末)이란 말은 몸통과 가지를 짝으로 쓴다. 나무의 몸통, '것'의 몸통, 언해는 이럴 때 '읏듬'이란 말을 쓴다. 예를 들어 전체(全體)는 '온몸'이 되기도 하고, '온읏듬'이 되기도 한다. 온몸이라 부르면 몸의 뿌리와 몸통, 가지와 잎이 모두 담긴다. 이에 비해 온읏듬이라 하면 '몸통'을 가리킨다. 나무의 몸통이 나무의 온몸을 대표한다. 체용(體用)이란 짝도 있다. '읏듬-씀'의 짝으로 새긴다. 나무의 몸통, 집도 짓고 가구도 만든다. 나무의 '씀', 또는 '쓰임'이다.

상(相)이란 글자는 물건의 모습에서 온 말이다. 언해의 말투는 '물건의 양자'이다. 이 글자는 사람의 '눈', '보다'의 짝이다. 물건, '것'의 양자를 눈으로 본다. '것'의 몸통, 몸통의 양자가 눈을 채운다. 눈에 어린 몸통은 상(像)이다. 영상(影像), '그르메의 상(像)'이다. 사람은 그르메의 상을 물건의 몸통으로 '너긴다'. 사람의 '너김'은 몸통을 가리기 때문이다. 물건의 몸통이 눈을 채우고, 그것이 물건을 대표하는 모습이 된다. '나무'는 물건의 이름이다. 이 이름을 부르면 나무의 몸통이 떠오른다. 이것이 나무란 이름에 따라 다니는 '읏듬의 상(相)'이다. 체상(體相)이다.

실상(實相)을 증(證)하면


평평하지만 알찬, 훤하고 쉽지만 옹근 읏듬을 '아는' 일이다. '두려이 덛덛한' 읏듬, 속이 꽉찬 상녜의 여름이다. 현각의 노래는 세 글자 뿐이다. 남명의 노래는 세 글자를 이어 부른다. 말이 길어지니 풀이도 길어진다. 평평하고 알찬 말투라야 노래의 맛을 모로기 느낄 수 있다. 헷갈리면 앞의 구절을 되뇌어 보길 바란다. 현각의 말투와 남명의 말투를 가려 보길 바란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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