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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자유

3.9 말에 취해 브즐우즐


탐냄과 어림이 술 같아, 취하여 깨기 어려워라

아득하여 집으로, 돌아갈 길 알지 못해

불려 가며 잠겨 옴이, 부평초 같아라

    생사의 바다에 잠기고 굴러 브즐우즐 다닐시라

물에 뜬 부평초, 바람이 불면 바람을 따라 간다. 물이 흐르면 물을 따라 간다. 부는 대로 잠긴 대로 떠다니는 모습을 ‘브즐우즐 다니다’라고 그린다. 브즐우즐, 이 말도 참 재미있다. 전전긍긍이란 말이 있다. 무서워서 벌벌 떠는 모습이다. 언해불전에는 전전규규(翦翦規規)란 말이 나온다.

전(翦)은 ‘자르다’는 말이다. 이 글자를 겹쳐서 ‘자르고 잘라, 자잘해진 모습’을 그린다. 잘게 부숴진 모습, 마음이 자잘하면 ‘쩨쩨하다.’ 쩨째한 사람은 자잘한 일에 냉정하다. 차갑다. “문디 콧구멍에 마늘 빼 먹을 놈” 이런 게 딱 ‘바사차다’는 말의 뜻이다. 이에 비해 규규(規規)는 넋이 나간 모양이다. 일에 닥쳐 안절부절, 허겁지겁하는 모습이다. ‘브즐우즐하신 자비’란 말도 있다. 개돼지의 맞서는 부처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기도 한다. 잠기고 굴러도 어쩔 줄 모른다.

근본(根本)과 지말(枝末)이란 대구가 있다. 두 개의 대구를 겹으로 세웠다. 근(根)은 뿌리이고 지(枝)는 가지이다. 뿌리와 가지의 대구이다. 본(本)은 밑이고 말(末)은 끝이다. 밑과 끝의 대구이다. 뿌리와 가지는 비유이다. 부평초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풀이다. 뿌리를 내리는 자리가 본(本)이고 밑이다. 그 자리를 집에 비유했다. 명상(名相)은 보고 듣는 물건의 이름이고 모양이다. 말로 하는 사유, 사랑을 가리킨다. 지말(枝末)은 뿌리를 잊은 가지의 사랑이다. ‘오아롬’은 ‘전체, 또는 완전하다’는 말이다. 말로 하는 사랑에는 뿌리가 있어야 한다. 뿌리를 잊은 사랑, 그게 브즐우즐이다.

‘밑도 끝도 없는 말’, 요즘에도 이런 말을 자주 쓴다. 이런 말도 참 좋다. 밑은 본(本)이고 뿌리이다. 끝은 말(末)이고 가지이다. 말이란 것도 밑과 끝 사이에서 이뤄진다. 뿌리와 가지 사이에서 통한다. ‘근거’라는 말도 있듯, 말에도 뿌리가 있다. 내가 하는 말, 뿌리와 가지 사이에 어디쯤일까? 스스로 돌아 보고 스스로 따져 봐야 한다. 말이 꼬인다면 밑으로 돌아가야 한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런 일이 반성(反省), 돌이켜 살피는 일이다. 말의 밑과 끝, 이런 말만 잊지 않아도 헛소리를 하고 다니지는 않는다. ‘근본을 모르는 놈’, 이런 욕도 있다. 똑 같은 말이다. 뿌리가 있고 밑이 있다. 그걸 돌이켜 살필 줄 모른다면, 그런 게 다 브즐우즐이다. 술에 취한 자는 길을 잃고, 집을 잃는다. 뿌리로 돌아갈 줄을 모른다. 돌이켜 살필 수 없기 때문이다. 부평초 인생이 따로 없다. 근거를 놓치면 브즐우즐이다. 뿌리를 살피지 못하고 뿌리로 돌아갈 줄 모르면 브즐우즐이다. 브즐우즐 살다 보면 세월도 유달리 빨리 간다.

브즐우즐, 말의 도적에 홀린 모습이다. 말에 끌려 주변하지 못한 모양을 이렇게 그렸다. 말이 끈이 되고 말이 줄이 된다. 끈과 줄이 나를 옭아 맨다. 말의 끈이 나를 잡고 놓는다. 말에 홀려 괴뢰가 되고 곡도가 된다. 브즐우즐은 그런 모양이다.

얼굴의 그르메로 겹겹이 서로 들게 하고


앞에서 했던 거울놀이, ‘얼굴의 그르메’, 형영(形影)을 이렇게 새겼다. 얼굴을 본질이라고 했다. 몸이 있고 살이 있다고 했다. 그 때의 얼굴은 질(質)이었다. 그런데 이제 형(形)을 얼굴이라고 한다. 이런 말, 이런 번역, 참 헷갈린다. 요즘의 말투와 다르기 때문이다. 말을 다루는 방식, 말로 하는 사랑이 다르다. 

형질(形質): 사물의 생긴 모양과 성질. ≒꼴바탕.

형상(形相): 사물의 생긴 모양이나 상태, 『철학』=에이도스.

질료(質料): 형식을 갖춤으로써 비로소 일정한 것으로 되는 재료. 물질의 생성 변화에서 여러 가지의 형상을 받아들이는 본 바탕이다.


국어사전의 설명은 이렇다. 형과 질은 아주 다르다. 형(形)은 사물의 모양이다. 이에 비해 질(質)은 사물의 성질, 또는 사물을 구성하는 물질, 재료이다. 그런데 언해불전은 형(形)도 질(質)도 나아가 형질도 똑 같이 얼굴이라고 새긴다. 하물며 형상(形相)이란 말조차 그냥 얼굴이다.

얼굴: 『옛말』, 모습. 형체.


아롬이 없거늘 식(識) 닷으로 얼굴을 알아 망심(妄心)이 되니 (월인석보)

얼굴이 여위며 정신이 아득하여 머리 세며 낯이 살찌어 (능엄경언해)

마음이 하마 얼굴 없거니, 법(法)이 어찌 얼굴이 있으리오 (선가구감)


사전의 설명, 옛말이라고 하지만, 이런 풀이도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랐다. 그래서 풀이 아래에 언해불전의 쓰임새를 여럿 달아 준다. 이게 볼수록 더 헷갈린다. 모습이나 형체라는 풀이를 따라 언해불전을 다시 읽으면 말이 되지 않는다. ‘마음이 하마 얼굴 없거니’, 무슨 소린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왜 그럴까?

얼굴 있는 것과 얼굴 없는 것


유형(有形)과 무형(無形)을 이렇게 새긴다. 이 얼굴은 모습도 형체도 아니다. 추상(抽象)이란 말도 있다. 관념(觀念)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추상의 모습, 관념의 형체라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다. 저 말은 실제로 있는 것과, 실제로 없는 것을 가리킨다. 그냥 모습이나 형체가 아니다.

에이도스

「명사」『철학』

형상을 인식론적 관점에서 표현하는 플라톤의 용어. 그는 한 사물의 확정된 모습은 다른 사물과 그것을 구별해 주는 일차적 기준이 된다고 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형상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표현할 때는 이데아를 주로 사용하였다.


국어사전의 풀이, 형상(形相)을 따라 가면, 그리이스 말 에이도스(eidos)로 이어진다. 참 친절하다. 이 풀이를 따르자면 15세기 언해불전의 ‘얼굴’은 형상(形相)처럼 되고, 에이도스처럼 되고, 이데아처럼 된다. 이게 옳은 걸까? 얼굴이 그렇다면 질료는 또 뭘까? 얼굴이란 말은 형상에 앞서 질료처럼 쓰이던 말이었다. 몸이 있고 살이 있다. 그런데 국어사전의 우리말 풀이는 언해불전의 쓰임새를 따랐다고 한다. 하지만 한자말에 대한 풀이는 서구의 말, 서구철학의 쓰임새를 따르고 있다. 얼굴이나 그르메와 같은 15세기의 우리말, 한자말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썼던 말이다. 훈민정음을 만들고 처음으로 우리 글자로 적은 기록이다. 언해불전은 얼굴이나 그르메 같은 말, 따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미 다들 알고 쓰던 우리말이기 때문이다. 오륙백 년이 흘러 우리에겐 오히려 낯선 말이 되었다. 더 이상 알지도 못하고 쓰지도 않는다. 얼굴이나 그르메, 이런 말을 알기 위하여는 한자말을 거꾸로 따라 가야 한다. 어떤 문맥에서 어떤 뜻으로 쓰이는지 돌이켜 살펴 보아야 한다.

얼굴에 대응하는 형질이나 형상과 같은 한자말, 이런 말의 쓰임새도 만만치 않다. 동아시아 한문문화권에서도 아주 오랜 뿌리를 갖고 있다. 우리의 국어사전만으로는 그런 뿌리를 따라 갈 수 없다. 그러는 사이 중국, 일본, 대만의 사전을 함께 뒤적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형질이나 형상, 우리 국어사전은 일본의 사전과 비슷하다. 일본말의 풀이를 그대로 번역했다 싶은 경우도 있다. 일본 사전의 두드러진 특징은 에이도스의 경우처럼 서구의 말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형질이나 형상, 한자말이라기 보다는 서구 말의 번역어로 다룬다. 서구의 말, 서구의 철학의 말을 모르면 알기도 어렵고 쓰기도 어렵다.

대만의 사전은 일본의 사전과는 좀 다르다. 형질이나 형상, 한자말의 역사를 먼저 따진다. 중국 고전의 쓰임새에서 뜻을 찾아, 예를 들어 준다. 간혹 일본 사전처럼 서구의 말투를 따르기도 하지만, 언제나 한자의 뜻을 앞세운다. 똑 같은 형질이나 형상이라도 대만사전과 일본사전의 풀이는 다르다. 중국의 사전은 일본과 대만의 중간쯤에 서있다. 의외로 일본 사전의 번역말투를 널리 따른다. 중국 사회주의의 역사, 마르크스 고전을 일본의 번역어로 읽던 역사의 흔적일까?

우리 국어사전은 언해불전의 쓰임새와 서구철학의 쓰임새, 그 중간쯤에 서 있다. 얼굴과 그르메, 여기에 얽힌 한자말들, 사전의 풀이를 따라 가다 보면 그래서 넋이 나가고 얼이 빠진다. 말과 풀이가 돌고 돈다. 한자말과 우리말 사이에 돌아갈 자리가 없다. 서양철학 책을 더 봐야 할까? 중국고전을 더 읽어야 할까? 동쪽으로 불까? 서쪽으로 흐를까? 말도 브즐우즐, 나도 따라 브즐우즐, 뿌리를 잃고 떠다닌다. 말에 취했달까? 이게 참 딱하다. 이건 나만의 탓도 아니다. 나 홀로 딱한 것도 아니다. 우리말이건 한자말이건 함께 쓰는 말, 딱히 어쩔 도리도 없다. 뿌리를 찾기도 힘든 말, 그래서 반성하기도 어려운 말, 혼자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무튼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형(形)도 질(質)도, 형질도 모두가 얼굴이다. 얼굴은 언제나 몸에 대응하여 쓰인다. 내 몸 밖의 물건, 형태도 있고 성질도 있다. 물건의 형태나 성질은, 물건의 얼굴에 속한 것이다. 얼굴의 형태이고, 얼굴의 성질이다. 그런 얼굴이 내 몸 안에 어리면 그르메라고 부른다. 우리는 우리 몸에 어린 그르메에 붙어 물건의 얼굴, 그 형태와 성질을 짐작한다. 언해불전은 얼굴과 그르메, 그 차이를 보라고 한다. 그 차이를 강조한다. 얼굴에는 몸과 살이 있지만, 그르메에는 몸과 살이 없다. 이런 차이이다. 이런 차이로부터 갖가지 문제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양이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리킨다. 언해불전에서는 이럴 때 ‘양자’라는 말을 쓴다. 달의 얼굴, 그 얼굴의 양자가 눈에 그르메로 어린다. 얼굴에는 눈에 보이는 모양이나 양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냄새도 있고 소리도 있다. 맛도 있고 감촉, 느낌도 있다. 그런 게 모두 얼굴이 가진 것들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람, 귀로 들을 수 없는 사람도 얼굴을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다. 얼굴이라는 말, 굳이 서구철학의 말투에 견주어야 한다면 ‘물자체’에 가깝다.

형질(形質): 사물의 생긴 모양과 성질. ≒꼴바탕.


꼴바탕, 느낌이 참 좋다. 형질이란 말 보다야 아무래도 꼴바탕이 좋다. 국어사전은 ‘꼴’도 ‘바탕’도 언해불전에서 어원을 찾는다. 그런데 언해불전의 쓰임새를 따라가 보면 이 말도 헷갈린다. ‘꼴사납다’거나 ‘바탕이 곱다’거나, 이런 쓰임새야 헷갈릴 것도 없다. 어려운 일도 어려운 말도 아니다. 대강 써도 다 알아 듣는다. 별 일 없다.

한바탕 설움을 면치 못하리


인생은 일장춘몽이란 말도 있다. 일장(一場)을 ‘한바탕’이라고 새긴다. 인생은 ‘한바탕 봄 꿈’이다. 예전에는 놀려면 마당으로 나가야 했다. 마당으로 나가야 장을 벌일 수 있다. 장(場), 바탕은 노는 마당이다. 노는 자리이다. 사람이 하는 일, 자리도 중요하다. 놀아야 할 자리도 있지만 잠자코 있어야 할 자리도 있다. 바탕이란 말도 별거 아니다. 어려울 것도 없고 헷갈릴 일도 없다.

그런데 꼴과 바탕이 더해져, 형질(形質)이란 뜻으로 써야 한다면 이건 아주 괴롭다. 꼴바탕이라는 우리말이 좋다지만, 형질이란 한자말도 국어사전에 실린 우리말이다. 이 말에는 오래 전부터 한자문화권에서 쓰이던 뜻도 담겨 있다. 게다가 서구철학, 서구언어의 번역어로서의 뜻과 쓰임도 담겨 있다. 이런 말, 이런 뜻도 다 우리말이다. 그런데 우리말과 한자말, 번역말투가 다 다르다. 밑도 다르고 끝도 다르다. 그래서 괴롭다. 헷갈린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월인천강’, 이 말의 밑과 끝, 이 말에 담긴 논리와 사유를 따라 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저런 말을 만나게 된다. 저런 말을 거쳐 가야 한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렵다. 21세기 개돼지 이야기도 우연이 아니다. 15세기 세종대왕이 꺼냈던 평등 이야기, 까맣게 잊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 사이 말이 꼬여도 심하게 꼬였다. 말이 조금만 길어지고 복잡해져도 밑과 끝을 찾기가 어렵다.

거울을 잡으면 낯을 보려 하지 않아도, 낯의 골이 제 나타나는 듯 하니라


언해불전의 이런 구절, 역시 눈의 감각을 다룬다. 눈을 뜨면 보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르메가 어린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르메가 어리고 느낌이 이뤄진다. 눈을 뜨고 있다면, 그르메와 느낌은 끊이지 않는다. 마치 어디에나 걸려 있는 cctv랄까, 언제나 보고 어디엔가 담긴다. 어디 눈 뿐이겠는가? 깨어 있다면 감각도 의식도 언제나 열려 있고, 언제나 움직인다. 때로는 드러나고, 때로는 잠긴다.

낯의 골, 면상(面像)을 이렇게 새겼다. 골은 상(像)을 새긴 말이다. 국어사전은 꼴은 골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상(像)이란 글자, 코끼리 상(象)에 사람 인(人)을 더했다. 국어사전을 찾아 보면 대상(對象), 상징(象徵), 추상(抽象) 따위의 말에는 상(象)을 쓴다. 이에 비해 영상(影像), 동상(銅像), 우상(偶像) 따위에는 상(像)을 쓴다. 이 차이는 뭘까?

언해불전은 상(象)을 얼굴이라고 새긴다. 이에 비해 상(像)은 그르메라고 새긴다. 이 두 글자의 차이는 사람 인(人)자이다. 상(象)은 사물, 우리의 몸 밖에, 실재하는 물건이다. 이에 비해 상(像)은 상(象)이 우리의 몸, 우리의 감각에 어린 그르메이다. 상(象)과 상(像), 얼굴과 그르메의 다름을 번득하게 나타낸다. 몸 밖의 얼굴, 사람이 없어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내 몸에 어린 그르메, 이건 오롯이 나의 일이고 사람의 일이다. 대상(對象)과 영상(影像), 상(象)이나 상(像), 요즘도 자주 쓰는 글자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이런 글자의 차이를 잊고 지낸다. 한자말에도 밑이 있고 끝이 있다. 뿌리도 있고 가지도 있다. 밑을 잊으면 끝이 헷갈린다. 뿌리를 잊으면 반성을 하더라도 돌아갈 자리가 없다.

형질(形質)이란 말은 형(形)과 질(質)을 더한 말이다. 형은 사물의 모양이다. 이에 비해 질은 사물의 성질이다. 국어사전의 풀이가 그렇다. 이 말을 꼴바탕에 대응시키면, 사물의 모양이 꼴이 된다. 이에 비해 사물의 성질은 바탕이다. 그렇다면 에이도스가 되었건 이데아가 되었건, 저 형과 질은 사람과는 상관이 없다. 누가 보건 말건 거기에 있다. 이런 게 꼴바탕이라면 이건 언해불전의 말투가 아니다. 15세기의 한자말도 아니다. 언해불전의 '골'은 상(像)이다. 사람의 눈에 어린 그르메의 모양이다.

서구철학에 현상(現象) 또는 현상학(現象學)이란 말이 있다. 그리이스 말의 누메논(noumenon)-파이노메논(phainomenon)의 대구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여기서도 상(象)을 쓴다. 그렇다면 이게 누메논이다. 물자체(物自體)라는 말도 있다. 내 몸 밖에 실재하는 사물이다. 이게 얼굴이다. 누메논이 우리의 눈이나 귀에 대응하면 파이노메논이 된다. 이게 현상이다. ‘상(象)이 나토다’ 또는 ‘드러나다’는 뜻이다. 드러난 상(象)이 눈에 어리면 상(像)이 된다. 이게 ‘골’이다. 그르메이다.

경(境)은 눈에 뵈는 것이라.


경(境)은 대상이다. 눈은 보고 경은 뵌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 ‘보다’와 ‘뵈다’가 마주한다. 이런 번역, 이런 풀이도 참 산뜻하다. 상대(相對)니 대상(對象)이니 한자말을 쓰지 않고, 우리말 만으로 뜻과 맛을 잘 살렸다. 월인천강도 뵈는 것을 따진다. 사람의 눈, 사람의 일이다. 물에 어리고 눈에 어리고, 감각을 자극하여 현(現), ‘드러났다’. 언해불전에서는 ‘드러나다’ 보다는 ‘나토다’는 말을 쓴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 ‘보다’와 ‘뵈다’가 마주한다. 이런 번역도 참 산뜻하다. 상대(相對)니 대상(對象)이니 한자말을 쓰지 않고, 우리말 만으로 뜻과 맛을 잘 살렸다. 드틀은 진(塵)을 새긴 것이다. 이 때의 진(塵)은 띠끌이나 먼지가 아니다. 눈이나 귀에 상대한 대상(對象), 뵈는 것이고 들리는 것이다. 언해불전은 한문으로 쓰인 불전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기록한 책이다. 한문 불전은 물론 인도의 말, 범어를 번역했다. 보다-뵈다의 번역은 한문보다는 오히려 범어의 말투에 가깝다. 보다나 뵈다, 상대나 대상처럼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각에 마주선 대상, 진(塵)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경(境)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때로는 경계(境界)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번역에 공을 들이는 까닭은 이런 글자들, 헷갈리기가 쉽기 때문이다. 하나라도 헷갈리면 온 이야기가 흔들리고 뒤집힌다. 아무튼 하늘에 있는 달은 상(象)이다. 이에 비해 가람에 비친 달은 상(像)이다. 하늘에 있는 달은 얼굴이다. 내 눈동자에 어린 달은 그르메이다. 가람이나 눈동자가 있건 말건, 보건 말건, 달은 언제나 상(象)으로 존재한다. 몸과 살을 가진 얼굴로 존재한다. 얼굴이란 말의 쓰임새가 이렇다. 얼굴과 그르메의 차이는 누메논과 파이노메논의 차이를 닮았다. 언해불전은 그 차이를 ‘잇비’ 풀이한다. ‘잇브다’는 ‘애를 쓰다’는 말이다. 잇비 풀이 하는 것, 그만큼 잇비 읽어야 한다. 그만큼 중요한 말이기 때문이다.

월인천강, 달의 얼굴과 달의 그르메, 이런 차이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한 것도 없는 나맟’으로 돌아가 보자. 나맟은 대가리이다. 대가리 안에 담기는 것, 나맟의 진짜 얼굴은 ‘남은 물건’이다. 천 입도 적다 가엾어 사는 나맟과 한 몸도 많다 애태우는 나맟, 그 차이는 뭘까? 나맟이 빈다면 삻혬도 없다. 이런 게 얼굴의 차이이다. 이런 게 중요하지 않다면 뭐가 중요할까? 그르메에는 얼굴이 없다. 빈대가리이다. 텅 비었다. 불교에서는 고상한 말로 공(空)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말도 필요 없다. 오히려 헷갈린다. 빈대가리 쪼아 봐야 허탈할 뿐이다. 나맟이 빈 사람은 뻔히 안다. 그런 말에 목숨이 걸렸기 때문이다. 빈 것은 나맟 만이 아니다. 그르메 좇는 취한 시인, 어린 납이, 자칫하면 빠져 죽는다. 그래서 “오셔도 오신 게 아니라”고 한다. 같아도 같은 게 아니다. 평등해도 평등한 게 아니다. 달빛이 아무리 곱다 한들, 물에 비치고 눈동자에 어린 달, 얼굴이 없다. 살이 없다. 아무 맛이 없다. 살혬도 없다.

사람의 사유(思惟), 사랑은 그르메와 느낌으로부터 시작한다. 눈에 어린 그르메는 사랑의 밑천이다. 그 다음에 벌어지는 일에는 상(想)이란 글자를 쓴다. 언해불전에서는 ‘너기다-너굠’이라고 새긴다. 여기다-여김의 옛말이다. 그르메를 뭔가로 여기는 일이 시작되고 뭔가를 아는 일로 이어진다. 느낌과 여김 다음에 쓰는 글자는 상(相)이다. 달에 대한 관념이다. 달에 대한 느낌과 여김은 달에 대한 관념으로 굳어진다. 달의 그르메를 재료로 달에 대한 여김이 달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글자 몇 개만 잘 알고 써도 이야기가 아주 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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