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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09_03 소탕(掃蕩)과 건립(建立)

증도가 현각의 노래


소탕(掃蕩)은 쓸어 버릴시오, 건립(建立)은 세워 둘시라.


앞 구절에 탈쇄구가 있었다면, 이 구절엔 소탕(掃蕩)과 건립(建立)이 있다. 이 말도 '툭 던지고' 넘어간다. 바람이 불어 뜬 구름을 쓸어 버린다. 뜬 구름은 맑고 좋은 '빈 하늘'을 가린다. 뜬 구름은 번득히 있는 것 같지만, 실(實)이 아니란다. 얼굴이 없다. 그래서 속절없는 뜬 구름이다. 바람이 쓸어 버리면 산하가 다투어 솟아 난다. 쓸어 버리면 솟아 나는 게 있다. 가린 것이 사라지면 산하가 훤히 솟아난다. 미세먼지의 세계를 살아 가는 일은 잇브다. 괴롭다. 어지간한 바람으로는 어림도 없다. 비라도 세게 내리고, 아침에 해가 뜬다면 누구나 볼 수 있다. 산하가 새롭다. 다투어 솟아 난다. 다투어 제 모습을 나톤다. 미세먼지를 쓸어 버리면, 만리의 산하가 솟아 나톤다. 이런 일이야 어려울 게 없다. 누구나 다 느끼고, 누구나 다 안다. 소탕과 건립도 속절없는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툭 던지고 넘어간다.

반야(般若) 한 법(法)이 능(能)히 오온(五蘊)을 비워, 진체(眞體) 홀로 나타나니


그렇다 해도 이런 말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오온(五蘊)이야 법수에 있다지만, '반야(般若) 한 법(法)'이야 또 어쩌란 말인가? 이런 말 다 따지고 들자면 이 노래는커녕, 이 구절도 벗어날 수 없다. '한 무리 서풍'은 '반야(般若) 한 법(法)'을 가잘비는 말이다. 뜬 구름을 쓸어 버리고 오온을 비워 버린다. 그렇게 오온의 몸을 비워 버리면, 진실의 몸이 나타난다. 언해의 말투, 읽는 순서를 바꾸어 준다. '반야가 뭐지?', 또는 '한 법은 뭐지?', 이 노래는 이렇게 읽으면 안된다. 미세먼지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그 '봄', 그 '느낌'을 노래한다. 그걸 따라 부르고, 그걸 따라 보고 느끼면 그만이다. 모르는 게 있다면 법수를 보면 된다. 그래도 모르는 게 있다면 반야경을 읽으면 된다. 그런 일, 각자 제가 알아서 할 일이다. 노래의 맛이 우선이다.

이엔 본래, 자각(字脚)이 없으니,

공중에 뉘 즐겨, 강(强)이 이름 짓느뇨.


자(字)는 글월이오, 각(脚)은 글의 주(註)이라.


이건 『금강경삼가해』의 구절이다. 함허가 '반야(般若) 한 법(法)'을 이르는 책이다. 자각(字脚), '글자의 다리'이다. 함허는 주각(註脚)이라고 읽는다. 글자와 글월을 풀이하는 일이다. 강(强)은 '구태여'라고 새긴다. '반야(般若) 한 법(法)'에는 본래 자각도 주각도 없다. 사족(巳足), 뱀에게는 본래 발이 없다. 반야의 법에는 본래 풀이가 없다. 영가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세종의 말투, 언해의 말투는 함허의 말투를 따른다. 『금강경삼가해』의 말투이다. 오온을 모르면 법수를 보면 된다. 반야를 모르면 이 책을 보면 된다. 이 노래를 따라 부르려면, 이 노래가 먼저이다. 먼저 노래를 불러라. 노래를 따라 부르기 위해, 꼭 필요한 몇 마디, 언해는 그런 정도만 '툭 던지고' 넘어간다. 본래 없는 발이나 다리, 그게 궁금하다면 함허의 『금강경삼가해』, 함허의 말투를 따라 읽으면 된다. 세종과 두 아들이 이 노래와 함께 『금강경삼가해』를 읽고 새긴 까닭이 있다. 누군가 오온과 삼독, 두통거리 법수를 가리고 따진 까닭이 있다. 세종과 두 아들이 『금강경삼가해』를 국어로 새기고 풀이한 까닭도 있다. 당장은 모르더라도 그대의 노래를 불러라. 그대의 낯과 눈을 보아라. 그래도 의심스럽다면 찾아 보면 된다. 누군가 '잇비' 그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북과 동서가 다 내가 화(化)한 것이니, 일체가 나를 붙어, 다 막음이 없느니라. 그러면 일으켜 세움이 또 내게 있으며, 쓸어 버림도 또 내게 있느니라.


관(觀)하는 지(智)로 법성(法性)의 물결에 들면, 옳으면 다 옳고, 외면 다 왼지라, 쓸어 버림이 또 내게 있으며, 세움이 또 내게 있나니, 내가 법왕(法王)이 되어, 법에 자재(自在)하도다.


이건 함허의 자각(字脚)이다. 소탕(掃蕩)과 건립(建立)을 구태여 가린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함허의 자각으로 이끄는 일도 구태여 하는 짓이다. 사족이다. 속절없고 부질없다. 그래도 이 구절을 혀는, 인용하는 까닭은 언해에 준비된 순서를 일러 주고 싶기 때문이다. 언해가 툭 던지고 넘어간 말, 다 까닭이 있다. 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 '그대'들, 언젠가는 이 구절, 함허의 자각으로 돌아 가길 바란다. 어쨋거나 나는 함허의 자각이 시원하고 후련하다. 쓸어 버리는 것도, 일으켜 세우는 일도 다 '내'게 달렸다고 한다. '나를 붙어', 유아(由我)를 이렇게 새긴다. 내가 원인이다. 나의 자유이다. 내게 달렸다. 내가 법의 임금이다. 내가 부처다. 함허가 바라보는, 언해불전이 바라보는 자유와 자재이다. 모든 중생이 본래 뒷논 '제쥬변'이다. 세종도 두 아들도 함허의 구절을 읽었다. 그래서 이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노래와 저 책을 함께 국어로 새기고 풀이했다. 이 노래도, 저 책도 보거나 말거나, '내'게 달렸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