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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수정

1.14 함께 한 끼니


삼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이니, 과거는 지나간 뉘오, 현재는 나타 있는 뉘오, 미래는 아니 온 뉘라


『월인석보』의 구절이다. 세(世)라는 글자를 ‘뉘’라고 새긴다. 과거(過去)는 ‘지나 간’, 현재(現在)는 ‘나타 있는’, 미래(未來)는 ‘아니 온’이라고 새긴다. 세(世)나 시(時), 시간을 나타내는 글자, ‘제’나 ‘적’을 쓰기도 하고 ‘끠()’를 쓰기도 한다. 그래도 이런 말은 흔적이라도 남아 있다. ‘뉘’는 아주 잊혀버린 것 같아 아쉽다.

언해불전은 한문책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주석한 책이다. 원문의 한자말과 새로 번역한 우리말이 나란히 씌어 있다. 15세기의 우리말이다. 요즘의 우리말과도 사뭇 다르다. 이런 글, 은근 재미있다. 한자 또는 한문을 다루는 태도나 방식을 볼 수 있다. '지나간 뉘, 나타 있는 뉘, 아니 온 뉘', 쓸모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재미있다.

성중에 장자와 거사가 함께 중 이바도리라


함께 「부사」

한꺼번에 같이. 또는 서로 더불어.

<<<석보상절>←+


'이바지', 앞에서 했던 말이다. 함께라고 했지만 원문에는 ‘한끠()’라고 적혀 있다. 동시(同時)를 '한끠'라고 새겼다. 시(時)는 '끠'이다. 국어사전은 ‘함께’의 어원을 『석보상절』에서 찾는다. ‘함께’는 ‘한끠()’에서 왔다.

이 같홈을 내 듣자오니, 한끠 부쳐가 실라벌성 기원정사에 겨샤


불경은 대개 이런 말로 시작한다. 이야기가 이뤄진 시간과 장소, 모인 대중을 먼저 소개한다. 여기의 한끠는 일시(一時)이다. 언해불전은 평등이나 동등도 ‘한가지’라고 새긴다. 일(一)도 '한'이지만, 동(同)도, 등(等)도 '한'이다. '하나'이기도 하고 '같다'이기도 하다. 하나의 끠도 '한끠'이지만, 같은 끠도 '한끠'이다.

어루 행(行)할 사람을 잡아 한데 가시놋다


한데 「명사」

한곳이나 한군데.

<<석보상절>←+


가(可)를 ‘어루’라고 새긴다. 동행(同行)을 ‘한데 가다’라고 새긴다. 함께의 ‘끠’가 시간이라면, 한데의 ‘데’는 공간이다. ‘한끠’가 하나의 시간, 같은 시간이라면, ‘한데’는 일처(一處), 하나의 공간, 동처(同處), 같은 공간이다. 그런데 언해불전은 ‘한끠’와 ‘한데’를 같은 말처럼 섞어 쓴다.

구(俱)라는 글자도 있다. 요즘에도 ‘갖출 구, 함께 구’라고 부른다. 언해불전은 이 글자도 ‘한끠’ 또는 한데라고 새긴다. 이게 요즘 우리가 쓰는 ‘함께’의 뜻이다.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함께는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일이다. 시간과 공간을 나누는 일이다.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다루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 나누어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실제로 떼어 둘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세계(世界)라는 말이 있다. 언해불전에도 자주 나온다. 이 말은 요즘의 쓰임새와는 아주 다르다. 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짝이다. 세(世)는 시간이고, 계(界)는 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은 늘 짝으로 다닌다. 끠와 데도 짝으로 다닌다. 뗄 수 없는 짝이다. 뗄 수 없기 때문에 함께이고 한데이다. 시간이 함께이면 당연 공간도 함께이다.

시간을 나타내는 ‘끠()’, ‘끼()’라고 쓰기도 하고, ‘끼니(니)’라고 쓰기도 한다. 끼도 끼니도 때이다. 언해불전도 세계라는 말은 우리말로 새기지 않는다. 세계라는 말을 우리말로 옮겨야 한다면 어떨까? ‘끠데’나 ‘끼데’라고 부르면 어떨까? 이런 말은 아깝다. 그래서 이런 상상도 하게 된다. 어쨌거나 끼니는 시간이다. 그런 끼니가 변해 밥을 먹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밥을 먹는 일이 되었다. 함께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리고 밥을 먹어야 할 때 함께 밥을 먹는 일이다. 이런 말이 다 얽혀 있다. 밥 한끼니 함께 나누는 일은 세계를 나누는 일이다. 서로의 세계를 함께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