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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18_02 몸짓의 말투

증도가 현각의 노래

육도만행(六度萬行)이, 체(體) 가운데 두려우니

진체(眞體)에는 같으며 다름을, 잇비 가림 없느니라


여럿이라 이르고자 하나, 한 체(體) 얼의여 고요하고,

하나라 이르고자 하나 만행(萬行)이 어지러이 펴니,

그럴새 이르시되 '육도만행(六度萬行)이 체중(體中)에 두렵다 하시니라.


하나와 여럿, 이 것도 언해불전의 말투이다. 일(一)과 다(多)를 가리킨다. 만행은 사유할 수 있는 모든 행(行)이다. 전체(全體)이다. 일체(一體)와 전체(全體)를 마주 세운다. '얼의여 고요하고', 응적(凝寂)을 이렇게 새긴다. '얼의다'는 '엉기다'의 옛말이다. 이 말은 '하나'를 향한다. 하나로 엉기고 뭉치는 방향이다. '어지러이 펴니'는 난개(亂開)이다. 이 말은 '여럿'을 향한다. 하나는 여럿을 향하고, 여럿은 하나를 향한다. 여기서는 향(向)이라는 글자, 방향이 중요하다. '어찌 세 구(句)에 거리끼리오', 대(對)가 되고 대(對)를 긋고, 작대(作對)와 절대(絶對)의 말투이다. 그 사이에 중간구가 있다. 일(一)과 다(多)의 대구, 이단이 아니다. 대(對)의 양 끝은 서로를 향한다. 얼의면 하나가 되고, 펴면 여럿이 된다. 실상일 수도 있고, 방법일 수도 있다. 나는 이 방법을 '향대(向對)'라고 부른다. 이 노래를 읽는 언해의 말투이고, 언해의 논리이다. 이 이야기는 뒤로 미뤄 두겠다.

일물(一物), '한것'의 말투, 『증도가사실』은 '염(念)'이라고 읽는다. '일념(一念) 가운데 육도만행이 본래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요즘에는 흔히 '한 생각'이라고 새기기도 한다. 언해불전의 말투는 이와 다르다. '생각'이란 말은 주로 기억을 가리킨다. 언해불전은 사랑, 생각, 사량, 사려 따위의 말을 가려서 새긴다. 다 다른 '짓'이다. 우리가 보통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하는 짓이다. 짓을 부르는 이름들, 뜻도 다르고, 씀도 다르다. 염(念)이란 글자는 그 '짓'의 조각이다. 그 짓을 관찰하고 분석하기 위한 이름, 가장 작은 조각이다. 생각의 조각일 수도 있고, 사랑이나 사량의 조각일 수도 있다.

전념(前念), 금념(今念,) 후념(後念)이 염념에 그지없는 좋은 일을 사량하며, 그지없는 모진 일을 사량하는지라, 염념이 옮아 흘러, 일어나고 없어져 머물지 않는다.


하마 제 마음이 부처와 다름 없음을 알고도, 다시 드틀마다 착(著) 없으며, 염(念)마다 남이 없어야, 이것이 진실의 발심(發心)이며


만행(萬行)은 중생이 짓는 모든 행위, 모든 짓을 가리킨다. 그 모든 짓이 '염(念)'에서 갈린다. 좋은 일을 사랑하는 일도 '염(念)'에서 갈린다. '염(念)'은 옮아 흐른다. 쉬지도 않는다. 모진 일을 사랑하는 일도 '염(念)'에서 갈린다. 도(度)라는 글자는 '건너다'라는 뜻이다. 『증도가사실』은 이 글자를 대치(對治)라고 풀이한다. 언해불전의 말투로는 '대하여 다스리다'이다. 대하여 다스리려면, 대(對)를 향해야 한다. 『증도가사실』의 말투를 따르자면 도(度)나 대치(對治)는 대(對)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염(念)'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좋은 일과 모진 일, 여러 일이다. 염(念)으로부터 갈린 여러 다른 일, 염(念)으로 돌아가 다시 보면, 얼의여 고요하다. 도(度)나 대치(對治)는 '염(念)'으로 '염(念)'을 관찰하고 다스리는 방법이다.

언해의 풀이는 『증도가사실』의 풀이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이 자리에 어울리는 말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몸에 두루 갖춘 것, 염(念)이라고 이름 부르면, 염(念)을 따라 가게 된다. 영가의 구절, 여기서는 하나를 향한다. 본래 뒷논 것, 그 몸의 두려움이다. 그런데, 남명은 '같고 다름', 또는 그 가림을 노래한다. 말하자면 이런 것은 '할배의 마음'이다. 언해는 '얼의여 고요함', '어지러이 폄' 대(對)의 방향으로 풀이한다. 이 구절은 다만 '얼의여 고요함'을 향한다. 내 몸의 읏듬, 그 모든 짓을 두려이 갖추었다. 지금은 그걸 향하면 된다. 그걸 바라보면 그만이다.

육도만행(六度萬行)이, 체(體) 가운데 두려우니

꿈 속에 명명(明明)히, 육취(六趣)가 있나니


영가는 육도(六度)와 함께 육취(六趣)를 나란히 노래한다. 육취는 여섯 가지로 윤회하는 길이다. 윤회는 제가 짓는 짓, 행위의 결과이다. 육도는 그런 행위들을 '대하여 다스리는' 짓이다. 육도와 육취, 윤회의 짓과 대치의 짓, 이 이름에 중생의 짓이 빠짐없이 담겼다. 내가 짓는 모든 짓, 내 몸이 원인이라는 말이다. 윤회도 대치도 내 몸에 달렸다. 그러니, '그대는 어쩔래?' 영가의 노래는 그대를 향한다. 그대에게 묻는다.

높고 깊은 긴 솔 아래

일념(一念)이 얼의니, 만가지 사려(思慮)가 재 되도다

'만가지 사려가 재 되다' 함은 몸이 이운 나무 같으며, 마음이 찬 재 같아, 날이 맟도록 얼의여, 만려(萬慮)를 잊을시라.


모르는 때에는 역겁(歴劫)을 속절없이 닦고

아는 때에는 당체(當體) 얼의여 고요하니라


위의 구절은 『증도가』의 말투이다. 아래 구절은 『선종영가집』의 말투이다. 영가의 노래를 따라 읽는 언해의 말투, 이런 구절들을 때때로 이끌어 풀이한다. 영가는 '꿈과 깸'을 노래한다. 『선종영가집』도 영가가 지은 글이다. 여기서는 '모롬과 아롬'으로 가른다. 언해는 이런 구절 사이를 잇비 오고 간다. 그 사이 '꿈과 깸'을 '모롬과 아롬'으로 풀이한다. 당체(當體)라는 말, '바로 그 체(當)'라는 말이다. 진체(眞體)라는 말과 같은 말투이다. '꿈과 깸', 그리고 '모롬과 아롬', 다 동사이다. 중생이 짓는 '짓'에 구태여 낀 이름이다. 진체(眞體)나 당체(當體), 이 또한 '짓'의 이름이다. 꿈의 진체(眞體)이고, 깸의 당체(當體)이다. 중생의 짓을 대(對)로 갈라 분석하는 말투이다. 나의 몸, 꿈을 꿀 수도 있고, 꿈에서 깰 수도 있다. 나의 몸, 모를 수도 있지만, 알 수도 있다. 모두가 내 몸에 갖추어진, 그래서 내 몸이 할 수 있는 짓이다. 내 몸이 하는 짓, 동작이고 동사이다. 그래서 나는 언해의 말투를 '몸짓의 말투'라고 부른다. 언해의 풀이는 언제나 몸짓을 향한다. 영가의 노래, 이 구절에서는 이런 소리도 다 사족이긴 하다.

식(識)의 물결이 안으로 솟으면, 곧 경(境) 바람이 일어 상녜 뮈고,

지혜의 물이 안으로 얼의면, 곧 바람과 드틀이 상녜 고요하니,

정(靜)하되 정(靜)한 상(相)이 없어야, 진실의 밞음이 제 비취리니


이것은 『금강경삼가해』, 함허의 말투이다. 물과 물결을 가잘빈다. 동(動)이란 글자를 '뮈고'라 새긴다. 쓸모가 많은 말, 이 말도 참 아깝다. '솟다'와 '얼의다', '뮈다'와 '고요하다', 다 '짓'을 가리킨다. 지혜와 의식, 이런 이름도 내 몸의 짓으로 읽는다. 이런 이름에는 다 방향이 있다. 내 몸이 가리고 선택하는 방향이다. 대(對)하는 방향, 짓이기 때문에 방향이 있다. '상(相)이 없어야', 이름에 머물지 말라는 경고이다. 나는 이런 말투, 모두 동사로 읽는다. 동사의 명사형이다. 언해의 우리말투가 그렇다. 한자말투와 우리말투, 동사와 명사를 다루는 방식, 이 차이가 참으로 크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