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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세계

6.7 보이지 않는 손


살활자유지수단(殺活自由底手段)

죽이며 살림을 쥬변하는 손을 보라.


자유의 수단, 쥬변하는 손, 나는 이 말을 보면 그냥 ‘보이지 않는 손’이 떠오른다. 이 말은 20세기에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말이다. ‘쥬변하는 손’은 15세기에 한문을 우리말로 새긴 말이다. 뜻도 비슷하긴 하다. 하지만, 내가 이 두마디를 함께 떠올리는 까닭은 그 말투가 닮았기 때문이다. 까다로운 경제 이론, 맞서고 다투는 이론의 역사, 때로는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여기서 말의 뜻을 따져 봐야 부질없다. 나는 다만 이 말투에서 희망을 본다. 이런 우리말투로도 까다로운 이론을 얼마든 따질 수 있겠다는 희망이다.


내며 드리며 이(利) 불우미 다른 나라해 가득하며 상고(商估)와 고객(賈客)이 또 심(甚)히 하더니

상고(商估)는 댱사이오 고객(賈客)은 흥졍바지라


『월인석보』의 구절이다. ‘댱사’는 ‘장사’의 옛말이다. 언해불전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백성 가운데 상(商)을 ‘흥정바지’라고 새긴다. 상고(商估)는 장사꾼이고 고객(賈客)은 흥정꾼이다. 장사꾼은 물건을 옮기는 사람이다. 있는 자리에서 없는 자리로 옮겨, 없는 사람들을 돕는다. 흥정꾼은 물건을 쌓아 두고 감춰 두고, 값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출입(出入)은 ‘내며 드리며’라고 새기고, 식리(息利)는 ‘이(利) 불움’이라고 새긴다. 옮기는 일에서 이익이 나고, 기다리는 일에서 이익이 난다. 장사나 흥정, 이익을 불리는 일이다. 장사치나 흥정바지의 이익이다. 여러 나라에 가득하다니, 요즘말로 치자면 수출과 수입, 무역이다. 장사와 무역으로 이를 불려 가장 어진이, 가장 가사면 이가 된 장사치, 흥정바지의 이야기이다. 나고 들고, ‘이(利) 불움’, 이런 일이 장사치와 흥정바지의 얼굴이다.

이 구절은 『법화경』에서 따온 구절이다. 불교는 장사와 흥정에 아주 익숙하다. 불교는 장사와 흥정의 길, 실크로드를 통해 여러 나라, 여러 세계로 퍼졌다. 『법화경』의 장사와 흥정은 주로 바다의 길을 따라 이뤄진다. 이 길은 바다의 실크로드라고 부른다. 장보고의 시대, 우리 민족도 이 길을 지배하던 때가 있었다. 장사와 흥정의 길을 따라, 장사꾼과 흥정꾼의 눈과 귀를 따라 많은 것들이 오고 갔다. 실크로드는 하나의 길이 아니다. 아시아 대륙을 가로 세로 누비던 그물망이다. 장사와 흥정의 네트워크이다. 이 길은 전쟁과 단단하게 엮여 있다. 장사꾼 흥정꾼은 전쟁을 피해 다닌다. 크건 작건 다툼이나 싸움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문이 닫히고 길이 막힌다. ‘내며 들이며’ 요즘엔 나들목이란 말도 쓴다. 나들목이 막히면 길이 막히면 장사도 막힌다. 장사가 막히면 이익도 막힌다. 그래서 장사꾼들은 늘 다른 길목, 나들목을 찾는다. 길이 바뀌면 이익의 길, 이익의 그물도 바뀐다. 설산과 사막의 오아시스로 이어지던 육지의 실크로드는 전쟁 때문에 아주 막혀 버렸다. 그대신 바다의 실크로드가 육지의 실크로드를 대신했다. 가사면 사람, 가사면 동네, 가사면 나라들도 바다의 길을 따라 이어졌다. 장사와 흥정의 길을 따라, 장사꾼과 흥정꾼에 붙어 전해진 불교, 불교의 역사도 장사의 길을 따라 부침(浮沈), 뜨기도 하고 잠기기도 했다. 장사와 흥정, 불교에도 흔한 이야기이다.

장사꾼이건 흥정꾼이건 장사로 이문을 불리려는 사람은 닫힌 길을 싫어한다. 열린 길을 좋아한다. 이익의 길이다. 동서고금, 흥정바지는 으레 열린 길을 찾아 다닌다. 이게 흥정바지의 얼굴이다. 본질이다. 서양 흥정바지의 역사, 흥정바지의 얼굴을 ‘자유’라고 부른다. 서양의 자유도 흥정바지의 자유에 큰 빚을 졌다. 자유시장, 자유무역, 자유시장경제, 자유방임경제…… 자유란 말이 하염없이 늘어진다. 그러다 끝내 신자유주의란 기이한 말도 나왔다. 하지만 이런 자유,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런 자유는 장사치, 흥정바지의 자유이다. 장사치가 걸어가는 길의 자유이다. 넓게 봐 주어도 흥정의 자유이다. 흥정은 파는 이와 사는 이 사이의 일이다.

양이 도사(屠肆)에 들어 걸음마다 죽을 땅에 감 같으니라.

도사(屠肆)는 중생 죽여 파는 져재


사(肆)는 흥정버리는 것이니


자맛구슬과 촌맛구슬이 어찌 져재 들리오

‘어찌 져재 들리오’라 한 것은, 이 보배는 사람마다 귀하게 여겨 천하게 팔지 않는다는 말이다.


져재는 시장, 저자의 옛말이다. 흥정을 ‘물건을 늘어 놓고 값을 받고 물건을 주는 일’이라고 풀어준다. 자맛구슬은 한자나 되는 벽옥이다. 촌맛구슬은 손가락 한마디나 되는 구슬이다. 값이 없는 구슬이라고도 한다. 세상에는 값이 없는 구슬도 있다. 값이 없으니 흥정도 없다. 저자에 내놓을 일도 없다. 중생을 죽여 파는 저자는 또 어떤가? 누군가에게는 죽을 땅일 뿐이다. 불교가 장사와 흥정에 익숙하다 하더라도 저자와 흥정은 천한 곳이 되기도 하고 죽을 땅이 되기도 한다. 파는 이와 사는 이, 이익을 좇는 사람들의 땅이다.

자유대한 나의 조국


태극기와 성조기를 나란히 내 걸고 군가를 부르는 사람들도 자유를 말한다. 자유대한의 자유시장경제를 외친다. 그들의 자유는 시장의 자유이다.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무슨 혁명에 견주기도 한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민족과 인류 보편의 가치라고도 한다. 그런데 미국의 신자유주의, 대안우파의 사람들은 미스 리버티를 탓한다. 미스 리버티의 목을 치라고 한다. Free를 내걸고 Liberty를 탓한다. 자유를 소리치며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으라고 한다. 문을 닫고 길을 막으라고 한다. 그게 새로운 자유라고 한다. 자유도 변하는 것일까? ‘관수조관(寬數粗觀)’, ‘넓은 혬으로 멀터이 봄’, 자유에도 이런 금을 그을 수 있는 걸까?

어쨌거나 '시장의 자유', 이런 말도 다 서구에서 들어 온 한문 번역어이다. 언해불전의 자유는 제쥬변이다. 제닷이다. 제가 임자고 제가 원인이다. 이게 아시아의 자유였다. 15세기의 우리말투였다. 생명에 값이 없는 까닭은 생명 하나하나가 번득하고 두렷하기 때문이다. 완전하기 때문이다. 중생이 본래 제 뒷논 것이다. 자맛구슬과 촌맛구슬을 이야기하는 까닭도 중생의 한가지 제쥬변, 자유와 평등을 견주려는 것이다. 남의 목숨에 본래 뒷논 것, 저자에 내놓고 흥정할 물건이 아니라고 한다. 중생의 세계에 값이 없는 것도 있다. 중생의 목숨, 그들의 한가지 제쥬변이 흥정의 자유일 까닭이 없다. 

문명한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과 시간은 부자들의 편안과 호사를 위해 희생된다. 집주인은 세입자의 노동으로 게으름과 호사를 누린다. 가면 이는 부지런한 흥정바지나 돈이 필요한 사람이 그의 돈을 (빌려) 쓰는 대가로 살아간다. 그러나, 모든 야만의 사람들은 제 노동의 열매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 집주인도 없고, 고리대금업자도 없고, 세금을 걷는 사람도 없다.


자유시장의 상징이라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말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문명한 나라가 좋은 나라일까, 야만의 나라가 좋은 나라일까? ‘보이지 않는 손’이란 말도 했단다. 이 말도 저자와 흥정의 상징으로 쓰인다. 파는 이의 자유와 사는 이의 자유, 그 사이에 간섭하는 손이란다. 보이지 않는 손은 자연의 법과 이성의 빛이다. 저자와 흥정을 빛으로 이끈다. 그럴 수도 있다. 사람이 모여 사는 세계에 저자와 흥정이 없을 수 없다. 실크로드의 장사꾼들이 그랬듯이 장사와 흥정의 길은 물건의 흐름을 돕는다. 동쪽의 비단을 서쪽으로 흐르게 하고, 서쪽의 옥과 구슬을 동쪽으로 가져다 준다. 비단이나 구슬과 함께 소식과 문화도 흐른다. 불교도 따라 흐른다. 저자와 흥정은 문을 열고 길을 연다. 이건 좋은 일이다.

상고(商估)나 고객(賈客), 이런 말을 들으면 무협지도 떠오른다. 무림이란 말도 떠오른다. 무림은 저자가 중심이다. 상고(商估)나 고객(賈客) 뒤에 협객도 있다. 협객이 저자와 흥정을 지킨다. 흥정의 자유를 지킨다. 말하자면 무협지의 저자에서는 협객이 보이지 않는 손이다. 정파와 사파, 저자를 두고 다툰다. 저자의 손을 자처한다. 그들에겐 초절정의 협객도 있고 책사도 있다. 주먹이나 칼도 있고, 꾀주머니도 있다. 보이지 않는 손, 자연의 법, 자유시장, 언해불전의 말투로 보자면 이런 것도 도적의 꾀이다. 저자와 흥정의 쓸모가 아무리 크더라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자연의 사람을 따라 법의 사람을 만든 것도 사람의 일이다. 자연의 법을 따라 저자와 흥정의 법을 만든 것도 다 사람의 일이다. 

본래 뒷논 것, 자유와 평등은 자연도 아니고 인연도 아니다. 한가지 제쥬변은 그 이전의 일이다. 제쥬변의 일을 두고 누군가 카냥한다면, 꾀를 빌미로 제 이익을 불린다면, 그게 도적이다. 도적의 꾀이다. 저자와 흥정의 쓸모, 애를 써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물건을 옮겨 흥정을 한다면, 얼마간 이익을 불릴 수 있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이익, 웃어 줄 수도 있고 참아 줄 수도 있다. 칭찬해 줄수도 있고 떡 하나 쯤이야 더 줄수도 있다. 하지만 이익을 불리는 일이 법이 되고 법인이 되고, 제도가 되고 세습이 된다면, 그건 도적질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자유라지만, 법의 손과 꾀를 앞세워 1%의 사람이 온나라 이익의 대부분을 가져간다면, 이게 무슨 법이고 이게 무슨 나라인가? 고약하고 모진 도적의 세계이다.

가면 이는 천 입이 적음을 츠기 여기고

가난한 이는 한 몸이 함을 애와티니라


법으로 다스리는 나라라지만, 법으로 만든 사람이 자연의 사람이 될 수 없다. 자연의 사람을 다스릴 수도 없다. 법으로 만든 저자와 흥정의 자유, 이런 자유를 중생이 본래 뒷논 자유에 견줄 수는 없다. 사람이 지어낸 것, 픽션이다. 저자와 흥정의 자유도 환(幻)이다. 괴뢰이고 곡도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지만 손은 역시 사람을 잡고 놓는다. 곡도 뒤에는 누군가의 손이 있다. 제쥬변의 사람을 홀려 곡도로 만들고, 곡도의 제쥬변을 앗아 제쥬변을 불린다. 흥정할 수 없는 것을 흥정거리로 삼아 이익을 불린다. 사람의 제쥬변을 놀리는 저자와 흥정, 그런 것도 자유라고 불러야 할까? 말이야 어쨌든 이건 분명 중생의 제닷, 제쥬변은 아니다. 천개의 입을 가지고도 가엾다고 애태우는 어진이들, 단 하나의 입조차 너무 많다고 절절대는 어린이들, 그런 세계를 놀리는 손, 중생의 세계를 앗는 도적이고 도적의 꾀이다.

죽이며 살림을 쥬변하는 손을 보라.


쥬변하는 손은 부처의 손이다. 모르면 중생, 알면 부처, 부처에게 손이 있다면 내게도 손이 있다. 장사와 흥정에 손이 있다지만, 내게도 손이 있다. 본래 뒷논 한가지 제쥬변의 손이다. 님자의 손으로 세계에 붙는다. 님자의 손은 손님의 손이 된다. 손과 손이 버믄다. 꽉 잡을 수도 있고 얼른 뗄수도 있다. 손을 보라지만 저 손은 보이는 손일까? 흥정의 손은 또 어떨까? 나의 손이 꾀가 되고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누군가의 세계를 건드리는 건 아닐까? 남의 이익을 앗아 내 이익을 불리는 건 아닐까?

파수공행(把手共行)하리라

손잡아 한데 녀리라


이런 손도 있다. 간섭하는 손, 착취하는 손, 잡아야 할지, 뿌리쳐야 할지, 빼앗기지 않으려면 손을 봐야 한다. 도적의 꾀, 제 이익을 불리기 위해 갖가지 손을 쓴다. 간섭하고 착취하고, 빼앗기지 않으려면 꾀가 붙는 자리, 스치는 손을 봐야 한다. 손잡아 한데 녀는 까닭은 우리의 세계가 이미 도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모질고 고약한 도적의 손, 나 혼자 본다고 뿌리치기 어렵다. 벗어나기 어렵다. 한가지 제쥬변, 내가 님자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나의 한표, 이것도 한가지 제쥬변의 손이다. 도적의 꾀와 손, 맞서고 다투긴 힘들어도 싫으면 싫다고 해야 한다. 비록 한표라도 잘 보고 잘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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