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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세계

6.4 레디메이드 세계



레디메이드 인생이 비로소 겨우 임자를 만나 팔리었구나


1934년의 세계, 어린 아들을 인쇄소에 팔아 넘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슬픈 건 슬프다. 이 이야기가 슬픈 까닭은 저 아버지와 저 아들의 삶이 고달프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아직도 슬픈 까닭은 고달픈 삶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남았기 때문이다. 할 일은 없고, 나맟은 비었다. 애를 쓴다지만 살혬이 꽉 막혔다.

그 나머지는 모두 어깨가 축 처진 무직 인테리요, 무기력한 문화 예비군 속에서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주인없는 개들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다.


레디메이드는 영어다. 저 아버지는 스스로를 ‘인테리’라고 부른다. 이처럼 1930년대 인테리도 영어를 즐겨 썼다. 레디메이드, 기성(旣成) 또는 기성품(旣成品)이다. 이미 만들어진, 미리 만든 물건이다. 아들을 팔아 넘기는 아버지는 이 말을 마치 ‘운명’이란 말처럼 중얼거린다. 제 삶도 아들의 삶도 이미 만들어졌다. 미리 정해졌다. 아무리 애를 써도 되돌릴 수도 없고 거스를 수도 없다. 아버지는 그런 처지를 레디메이드라는 말로 주절주절 따진다. 그는 역시 인테리다. 그에게는 논리가 있다. 인테리는 분석한다. 이미 정해진 것, 세상 탓이라고 한다. 누구 탓, 남 탓을 한다. 그런데 그 아들의 삶은 아버지에게 단단히매어 있다. 아직 어린 아들은 아버지의 삶을 벗어 날 수 없다. 아버지의 삶과 함께 미리 정해져 버렸다. 누구 탓이고 남 탓이다. 그렇다면, 그 아들의 삶을 샀다는 새로운 임자, 인쇄소 주인은 어떨까? 아들의 새 임자는 그 아이를 또 누구에게 팔아 먹을까?

세계와 여래가 서로 들어 가림 없으니......


진근(眞根)이 하마 일어 시방의 중생이 다 내 본성이라 성이 두려이 일어 중생을 잃지 않으니, 이 이름이 일체중생을 따라 순(順)하여 평등하게 보는 회향이라


나의 선(善)이 하마 일운 젼차로 능히 일체중생의 선근을 이루었으나, 이름이 없으며, 위아래가 없으며 수순하여 평등히 봄이라.


레디메이드, 기성이란 말, 언해불전에도 자주 나온다. ‘하마 일다 = 하마 이루다’라고 새긴다. 기(旣)는 ‘하마’이다. ‘이미’의 옛말이다. 성(成)은 ‘이루다’이다. 레디메이드가 기성(旣成)이라면, ‘하마 일운 것’이다. 하마 이루어진 인생,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주인없는 개들’이라고 한다. 그런 개들도 아기를 낳는다. 하마 이루어진 인생, 그들의 아기들도 따라서 하마 이루어진다.

여래는 부처이다. 부처와 세계가 서로 들어간다. 섭입(涉入)이라고 쓰고 ‘서로 들다’라고 새긴다. 이 세계는 중생의 세계이다. 중생들이 망(妄)을 짜 서로 이룬 세계이다. 이 세계는 기성의 세계이다. 레디메이드 세계이다. 부처도 하마 일운 세계, 레디메이드 세계로 들어간다. 부처가 레디메이드 세계에 간섭한다. 레디메이드 세계는 부처에게로 들어간다. 세계는 부처를 간섭한다. 서로 들어 간다. 서로 간섭한다. 중생이 망을 짜고 서로 들어가는 문, 그 통로는 중생의 뿌리이다. 눈과 귀 따위의 여섯가지 뿌리이다. 부처에게도 몸이 있다. 몸의 뿌리가 있다. 눈도 있고 귀도 있다. 부처가 세계로 들고, 세계가 부처로 드는 길도 몸이다. 몸의 뿌리이다. 부처의 얼굴과 중생의 얼굴은 한가지이다. 한가지 제쥬변이다. 중생과 중생의 세계를 평등하게 바라보는 부처의 눈, 그의 뿌리를 진실하다고 부른다. 착하고 좋다고도 한다. 부처와 중생, 누구나 본래부터 한가지, 평등하게 가지고 있는 뿌리의 성질, 얼굴이다. 한가지이기 때문에 이름도 없고 위아래도 없다. 차별이 없다. 세계로 들어가는 그의 뿌리도 기성이다. 레디메이드 뿌리, 하마 일운 뿌리이다.

잎 따며 가지 찾음을, 내 능히 못하노니

헤아려 가며 돌아 옴에, 므스글 득(得)하리오

어엿브다 노니는 아들이, 옷곳함을 좇아

홍진(紅塵)이 낯빛을 좀 먹는 줄, 아지 못하놋다


레디메이드 인생의 아들, 태어나면서부터 하마 일운 세계, 레디메이드 세계로 들어간다. 간난 아기는 세계로 들어간다. 세계를 간섭한다. 세계가 아기에게로 들어간다. 아기가 세계로 들어간다하지만, 아기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 아니다. 그럴 리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아기가 들어가는 세계는 망(妄)으로 짜인 세계이다. 차별이 있다. 위아래가 있다. 천개의 입을 가진 이도 있고, 제 입 하나도 많다고 절절대는 어린이들도 널렸다. 저 아기가 들어가는 세계는 초상집의 개 같은 레디메이드 세계이다. 이것만 해도 기가 막힌데, 아버지라는 자는 제 아이를 인쇄소에 팔아먹기까지 한다. 정말 개 같은 인생이다. 개 같은 세계이다. 그렇다 해도 제 아이를 팔아먹는 일은 아버지의 선택이다. 개 같은 아버지가 개 같은 세계로 들어가는 짓이다. 세계가 아무리 개 같다 하더라도, 제 인생이 아무리 개 같다 하더라도, 제 선택은 제 짓이다. 제 아이를 개 같은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것도 제 짓이다. 이런 것도 가리지 못한다면 더 할 말이 없다. 레디메이드 인생, 그래서 슬프다. 가련(可憐), 어엿브다.

사람이 손과 발이 편안하며, 온몸이 고르며 맞아 살아 있음을 문득 잊어 성(性)에 어기며 순함이 없었다. 그 사람이 까닭도 없이 두 손바닥으로 허공에서 서로 스치면 두 손 가운데서 머흘고 맷맷하며, 차고 더운 여러 상(相)이 간대로 나리니……


이 모든 환(幻)한 감촉이 허공으로부터 오지 않으며, 손바닥으로부터 나지 않는다. 이같이 하다가 허공으로부터 온다면, 하마 능히 손바닥을 닿아야 하니 어찌 몸을 닿지 않겠느냐? 허공이 가려 와서 닿는 것이 아니다. 하다가 손바닥으로부터 난다면, 반드시 어울음을 기다리지 않으리라.


선택(選擇)을 ‘가리다’라고 새긴다. ‘머흘고 맷맷하며’는 삽활(澁滑), 꺼칠꺼칠한 느낌과 매끄러운 느낌이다. 이 느낌은 허공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고, 손바닥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다. 손바닥이 어울어짐, 손바닥을 합(合)하여 스치는 사이에 나는 것이다. 아기가 세계로 들어 가듯, 부처도 세계로 들어간다. 그들이 들어가는 세계는 레디메이드 세계이다. 그런데 여기에 차이가 하나 있다. 아기는 제가 선택하지 않지만, 부처는 제가 선택한다. 알지도 못하고 들어가는 이도 있지만, 알고 들어가는 이도 있다. ‘가리다’의 차이이다. 부처는 제가 가리지만, 아기는 제가 가리지 않는다. 제 아버지가 대신 가린다. 가리는 일이 들어 가는 일이다. 부처의 뿌리는 가리지 않는다. 레디메이드 세계를 가릴 필요도 없다. 그래도 가리는 까닭은, 그래도 망으로 짜인 세계, 레디메이드 세계로 들어가는 까닭은 이 세계가 ‘기이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뒤집고 싶기 때문이다. 아기의 아버지도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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