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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세계

6.6 세계를 앗는 도둑


제 그러히 뫼햇 중의 집에, 고요히 앉아


가쁘거든 곧 겨르로이 졸고, 목 마르거든 곧 차(茶)로다

더위 가고 추위 옴에, 있는 배 므스고

한 올의 구름누비, 이 생애로다


언해불전에는 도둑이란 말이 참 많이 나온다. 이런 것도 뜻밖이다. 도둑은 제 것이 아닌 것을 제 것으로 앗아가는 이들이다. 제 것은, 제 소유(所有), 제가 가진 것이다. 소유(所有)를 ‘있는 배, 있는 바가’라고 새긴다. 소유(所有)라는 말, ‘있는 바’가 될 수도 있고 ‘뒷는 바’가 될 수도 있다. 요즘 말로 치자면 ‘갖는 바’가 된다.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이런 말의 차이 조심해서 들어야 한다. 자칫하다간 도둑놈이 된다.

비슷한 노래가 이어진다. '제 그러히', 원문은 우유(優游)이다. '겨르롭고 편안하다'는 말이다. 이 말을 '자여(自如)'라고 풀이한다. 제가 좋아 제가 찾은 제 삶이다. 제 겨르로움은 그래서 '제 그러히'가 된다. ‘뫼’는 산(山)의 옛말이다. 이에 비해 ‘’는 들(野)의 옛말이다. ‘묗’과 ’ 이 말에는 둘 다 ‘ㅎ’ 받침이 있었다. 그래서 ‘뫼햇 중’이다. 야승(野僧)을 이렇게 새겼다. 산에 사는 중도 들에 사는 중도 가난하고 소박하다. 야(野)란 글자에는 이런 뜻도 있다. 가진 게 없으니 거칠고 사오납다. 운납(雲衲)을 ‘구름 누비’라고 새긴다. 누비 옷 한벌로 구름처럼 살아가는 중이라는 말이다. 구름 누비의 제쥬변이다. 구름처럼 뜻가장, 떠 돈다. 더위가고 추위와도 구름 누비뿐이다. 그런 중의 집, 가진 건 둘째치고 있는 게 없다. 뭐라도 숨겨 놓고 쌓아 놓을 자리도 없다. ‘겨르롭다’는 ‘한가하다’의 옛말이다. 그래도 마실 물, 마실 차는 가졌단다. 더 갖고 싶어도 있는 거라곤 그런 거 밖에 없다. 있는 게 없으니 가질래야 가질 수도 없다.

언해불전의 뫼햇중은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소유는 ‘있는 바’이다. 소유할 주인이 없으니 가질 수도 없다. 가질 것도 없고, 가질 수도 없다. 더우면 더운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맞추어 살아간다. ‘있는 배 므스고? 그래서 구름 누비의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뫼햇중도 ‘본래 뒷논 배’가 있다. 본래 자유와 본래 평등이다. 누가 준 게 아니다. 갖고 싶어 가진 것도 아니다. 뫼햇중은 그걸 누린다. 그걸 즐긴다. 그러나, 중생의 세계, 뫼햇중의 세계와는 다르다. 뫼햇중이라도 이 세계로 들어가려면 가리고 따져야 한다. 한 올 구름누비, 차 한 그릇이라도 가진 것을 챙겨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살혬도 없다. 까딱하다간 도둑놈이 된다. 그런게 싫으면 그냥 뫼햇중으로 뫼에 살면 그만이다.

염념(念念)에 그지 없는 좋은 일을 사량(思量)하며, 그지없는 모진 일을 사량하는지라, 염염이 옮아 흘러 일어나며 없어짐이 머물지 않는다.


‘좋은 일’은 선사(善事)이다. ‘모진 일’은 악사(惡事)이다. 선악도 짝이다. 선악을 ‘좋다-모질다’의 대구로 새긴다. 사량(思量)은 ‘사랑하여 헤아림’이다. 우리의 헤아림, 좋은 일과 모진 일이 머물지 않고 이어진다.

착취(搾取) [명사]

1. 계급사회에서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이 생산 수단을 갖지 않은 직접 생산자로부터 그 노동의 성과를 무상으로 취득함, 또는 그런 일.

2. 동물의 젖이나 식물의 즙을 꼭 누르거나 비틀어서 짜 냄.


착취(搾取)는 누르거나 비틀어서 짜낸다는 말이다. 국어사전은 이 말을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마르크스의 말로 풀이한다. 소유한 자가 소유하지 않은 자를 착취한다. 가난한 자의 노동을 비틀고 쥐어 짜 가져간다. 착취라는 말, 게다가 노동착취, 또는 무상착취, 이건 말하자면 빨갱이의 말이다. 자유대한에서는 써서도 안되고 들어서도 안되는 고약한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말은 도대체 어디서 왔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썼다는 말 착취는 ‘엑스플로이타찌온(Exploitation)’을 번역한 말이란다. 영어로는 ‘엑스플로이테이션’이라고 읽는다. 그런데 이 말의 쓰임새는 뜻 밖으로 넓다.

우리는 한 목소리로 선언합니다. 우리는 성의 착취와 학대를 저지르거나 받아주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이런 범죄를 유엔의 깃발로 덮도록 놓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용서는 절대 없다’는 원칙을 실현 합시다.


이건 유엔 사무총장의 선언이다. 일본 군대가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했던 일도 ‘섹슈얼 엑스플로이테이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성적인 착취라고 새긴다. 이런 일, 이런 말은 마르크스의 말이 아니다. 빨갱이의 일이 아니다. 누구도 유엔 사무총장을 빨갱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일만도 아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늘 벌어지는 일이다. 착취란 말, 아니 엑스플로이테이션이란 말은 ‘다른 사람의 약한 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일’을 가리킨다. 이런 말에도 세계가 담긴다 사전의 풀이만 가지고는 알기 어려울 때가 많다.

착취라는 번역어, 이 말은 간섭에 가깝다. 착취는 사람과 사람, 세계와 세계가 붙고 겹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예를 들어 버스에서 사람을 밀치고 들어가는 일도 착취, 엑스플로이테이션이다. 사람을 밀쳐내는 일은 사람의 세계를 밀쳐내는 일이다. 제 것이 아닌 남의 공간과 시간을 제 공간과 시간으로 빼앗기 때문이다. 그렇게 빼앗은 세계로부터 제 이익을 찾고 누리기 때문이다. 저보다 몸도 작고 힘이 없는 사람은 그냥 밀어 제친다. 하지만 저보다 크고 무서운 사람은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런 게 부당한 간섭이다. 남의 세계를 빼앗고 이용하는 일이다. 언해불전은 그런 일을 악사(惡事), 모진 일이라고 부른다. 그런 일을 지어대는 사람을 도적, 도둑놈이라고 부른다. 할머니가 아기의 볼을 꼬집는 일도 모진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면 할머니도 도적이 된다. 아기의 세계를 건드리고 앗아간다. 착취나 엑스플로이테이션은 늘 있는 일이다. 다만 빨갱이의 일이 아니다. 누구나 늘 조심해야 한다. 이런 일이 쌓이면 나라도 훔치고 세계도 망친다.

음란한 자리에 들여 음란한 몸으로 스쳐, 계체(戒體)를 장차 헐려 하더니


『능엄경언해』라는 언해불전은 야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스쳐’라고 했지만 원문은 무마(撫摩)이다. 어루만지고 문지른다. 살과 살이 붙는 이야기, 요즘엔 애무(愛撫)란 말을 쓴다. 먼저 젊고 귀여운 남진과 겨집이 등장한다. 귀여운 남진은 아난이다. 예쁜 겨집은 마등가녀이다. 아난은 석가모니의 제자이다. 출가한 스님이다. 아난이 밥을 빌어 먹으려 길을 나선다.

위의를 싁싁이 하며 가자기 하여, 재법(齋法)을 공경하더니

웅의(雄毅)는 게엽고 날랠씨라


앞에서 인용한 구절, 이게 바로 아난의 다짐이다. 아난은 음광과 공생의 일을 되새긴다. 빌어먹을 집을 제뜻대로 고르면 안된다. 밥의 평등, 법의 평등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아난은 법에 따라 ‘싁싁이, 가자기’ 몸가짐을 차린다. 절에 가면 한 가운데에 대웅전이 있다. 부처를 대웅(大雄)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웅(雄)이란 글자가 재미있다. 자전은 이 글자를 '수컷 웅'이라고 부른다. 수컷 가운데서도 읏듬가는 '두목'이라도 한다. 대웅은 '큰 수컷', '큰 두목'이다. 이건 좀 우습다. 그래서 그런지 언해불전은 이 글자를 '게엽다'라고 새긴다. 싁싁하고 가자기한 모습을 가리킨다. 밥을 비는 부처의 모습, 사람들은 싁싁하고 가자기한 모습에서 저픔을 느낀다. 그것도 큰 싁싁함, 큰 저픔이다.

귀여운 아난은 오직 게여운 스승에 붙는다. 귀엽고, 게엽고, 이런 말도 참 좋다. 번득하기도 하거니와, 입에도 착착 붙는다. 아난은 걸리는 대로 일곱 집을 차례로 돈다. 스승의 게여운 몸가짐을 따라 한다. 그러다가 걸린 게마등가녀의 집이다. 이 집안은 마술의 주문으로 사람을 홀리는 집이다. 이건 우연(偶然)이다. ‘우히’, 이 말은 한자말에서 왔지만, 언해불전은 이 말을 우리말처럼 쓴다. 우연은 필연(必然)에 대응한다. 필(必)은 ‘반다기’라고 새긴다. ‘반드시’의 옛말이다. 우(偶)는 ‘만나다’라고 새긴다. 지나가다 만나서 그런 일이다.

귀여운, 그리고 게여운 아난이 마등가의 동네로 들어갔다. 마등가의 세계로 들어갔다. 이게 이야기의 시작이다. 예쁜 딸이 홀딱 반했다. 이야기는 예쁜 딸이 주문을 걸어 아난을 홀렸다고 한다. 이건 예쁜 딸이 아난의 세계를 건드리는 일이다. 하지만 우연이라지만, 예쁜 딸을 먼저 건드린 것은 아난이다. 아난이 먼저 예쁜 딸의 동네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도 않았다. 아난이 건드리고 예쁜 딸이 건드린다. 서로의 세계가 만나고 겹치는 일이다.

예쁜 딸은 아난을 음란한 자리로 들여, 음란한 몸으로 스쳤다. 계체(戒體)란 말도 재미있다. 계율을 받아 지닌 몸이다. 계는 약속이다. 이미 약속한 몸이란 말이다. 음란한 곳으로 가지도 않고 음란한 짓을 하지도 않겠다는 몸이다. 계체란 말은 '계로 된 몸'이다. 계를 얼굴로 삼은 몸이다. 예쁜 딸은 그런 몸을 제 몸으로 스쳤다. 사람들은 누구나 예쁜 딸을 탓한다. 계의 몸, 약속의 몸을 헐고, 더럽히려 했다고 한다. 저 딸을 탓하는 까닭은 아난의 몸이 약속의 몸이기 때문이다. 약속을 헐고 더럽히기 때문이다. 요즘이라면 꽃뱀 따위를 떠올릴 만한 장면이다. 이게 좀 얄궂다. 석가모니는 아난과 딸을 데려 온다. 그리고 여러 대중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재판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딸의 입장도 있을 법한데 딸 이야기는 더 이상 없다. 부처와 아난이 묻고 답한다. 엄청난 주문을 걸었다니 더 할 말은 없다. 석가모니의 가까운 제자라고 하더라도 주문에 걸리면 어쩔 도리가 없었나 보다. 아무튼 『능엄경언해』의 시작이 이렇다.

이 뒤로 엄청 긴 이야기가 이어진다. 원인은 짧다. 젊은 남녀, 몸과 몸, 살과 살이 스친다. 말하자면 이것도 착취이다. 남의 몸을 건드리는 일은 남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다. 남의 세계를 빼앗는 일이다. 아난과 마등가녀가 서로 버믄다. 하지만 아난도 마등가녀도 서로 웃지 못한다. 함께 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 일은 도적의 일이 된다. 도적이 꾀를 부린다. 『능엄경언해』는 열 권으로 짜인 긴 책이다. 살과 살이 스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세계를 앗아가는 일로 이어진다. 세계를 앗아가는 도적의 일이고 도적의 꾀이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된다.


염념(念念)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생각,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일, 좋은 일과 모진 일이 겹친다. 서로 짜인다. 굳이 누구를 꼭 누르거나 비틀어 짜야만 착취가 아니다. 그런 놈만이 도둑놈이 아니다. 제가 편하자고 남의 몸을 밀쳐 낸다면 그게 도둑이다. 제 기분에 남의 몸을 스친다면 그게 도둑이다. 말 한마디라도, 낯빛 하나라도 남의 기분을 건드린다면 그게 도둑이다. 남의 시간과 공간을 간섭하여, 그 간섭으로부터 이익을 찾는다면 그게 도둑이다. 문을 열고 길을 나서면 도둑의 준비가 된 셈이다. 누구를 만나 꾀를 쓴다면 스스로 도둑이 된다. 남의 세계를 빼앗는 도둑이다. 도둑에도 겹이 있다. 안의 도둑도 있고 밖의 도둑도 있다. 서로 버믈어 쥬변 못하는 한산과 습득, 이것도 말하자면 도둑의 모델이다. 아난과 마등가녀의 일도 도둑의 모델이다. 본래 자유로운 사람 둘이 서로 만나 자유를 잃는 장면이다. 웃는 경우도 있지만 울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이야기를 거듭하는 것은 차별이 생기는 까닭을 살피고 싶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을 잃은 까닭, 어진이와 어린이가 갈리는 세계를 되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계급사회에서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이 생산 수단을 갖지 않은 직접 생산자로부터 그 노동의 성과를 무상으로 취득함, 또는 그런 일.


이런 일을 착취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 도둑이 부러 모진 일, 부러 도둑질을 하기 때문이다. 제 이익을 챙기기 위해 고의로 남의 몸, 남의 세계를 간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모진 일을 탓하는 까닭은 부러 저지르는 도둑질이 서로 짜이기 때문이다. 도적의 꾀가 제도가 되고 사회가 되고 나라가 된다. 아난의 몸은 약속의 몸이다. 밥의 평등, 법의 평등을 실천하기로 약속했다. 마등가녀는 왜 약속의 몸을 건드렸을까? 아난은 왜 약속의 몸을 헐려 했을까?

홉스의 사회계약도 약속이다. 남의 몸 하나, 손가락 하나라도 부러 건드린다면 그것도 도둑질이다. 남의 세계를 착취하는 일이다. 남의 몸은 남의 세계이다. 하물며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는 우리의 세계, 온세계이다. 온세계를 법이 됐건 제도가 됐건 통째로 부러 간섭하려 든다면 온 세계를 앗는 도적인 셈이다. 도적 중에서도 상도적이다. 이런 도적, 그냥 놓아 둘 수는 없다.

한 올의 구름 누비, 제 몸의 제쥬변을 하염없이 노래하는 까닭은 세계를 앗는 도적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도적의 세계가 싫기 때문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 절에 이런 속담이 있다. ‘대중이 원하면 소도 잡는다.’ 이런 속담도 있다. 사람이 모이면 대중이 된다. 세계와 세계가 만나, 세계가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나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로 바뀐다. 제쥬변과 제한가지가 만나 쥬변과 한가지를 서로 잃는다. 서로 웃을 수도 있지만, 서로 다툴 수도 있다. 그런 게 대중의 세계이고 사회의 세계이다. 언해불전이 가리고 따지는 세계도 이런 세계이다. 대중이 우선이고 사회가 먼저다. 나의 세계보다 큰 세계가 먼저다. 큰 세계가 함께 바란다면 계율도 부질없다. 그게 싫다면 스스로 나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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