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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세계

6.5 서로 버믈어 쥬변못하니

한산(寒山)은 감이 옳고, 습득(拾得)은 옴이 옳거늘

한산이 습득과 더불어서는, 오고 감을 알지 못하고

습득이 한산과 더불어서는, 가고 옴을 알지 못해

서로 버믈어 쥬변못하니, 웃음 취함이 여기 있도다


언해불전에는 옛날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것도 말을 다루는 기술이다. 말을 바라보는 눈이고 손이다. 관점이고 수단이다. 말은 그릇이다. 그릇에 뜻이 담긴다. 의의(意義), 의도와 의미가 담긴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 문득 ‘세계는 넓고 토낄 곳은 많다’, 이런 말을 들었다 하자. 사전만 가지고 이 말에 담긴 뜻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말의 뜻을 알려면 천상 재벌 회장의 이야기로 돌아 가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뭘 하던 사람인지, 속셈은 어땠는지…… 말은 하염없이 늘어진다. 저 회장님의 세계와 언해불전의 세계는 조금 다르다. 회장님의 세계는 월드이다. 공간이다. 그저 넓다고 한다. 언해불전의 세계는 시공간이다. 한끠이고 한데이다.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말에는 세계가 담긴다. 시간과 공간이 담긴다. 입에서 말이 나온 시간과 공간이다. 회장님과 같은 세계에서 저 말을 듣는다면 금방 안다. 하지만 십년이나 백년쯤 지난 뒤에, 저 말을 듣는다면 어떨까? 옛날 이야기를 해야 한다. 말하자면 옛날 이야기는 옛날의 세계로 들어 가는 길이다.


상연부자유(相緣不自由)

서로 버믈어 쥬변못하니


'서로 버믈어', 무엇보다 이 말이 좋다. 연(緣)이라는 글자도 무거운 글자이다. 연기(緣起), '브터니닷', 부처의 가르침을 대표하는 말이다. 언해불전은 우선 '붙다'라고 새긴다. 뭔가가 붙으려면 적어도 두가지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한다. 들에 나가면 진드기가 살에 붙는 일도 있다. 진드기는 몰래 붙는다. 붙는 걸 몰라야 실컷 피를 빨아 먹을 수 있다. 상연(相緣)은 서로 붙는다. 서로가 님자이고, 서로가 손님이다. 님자도 알고, 손님도 안다. 서로 알고 서로 붙는다. 그런데 여기서는 연(緣)을 '버믈다'라고 새긴다. 그냥 살짝 붙는 게 아니다. 붙어서 얽히고 섥힌다. 김치나 나물을 버무리는 까닭은 양념이 골고루 섞이고 배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늘과 고추가 손 맛에 섞여 새 맛을 낸다. 한산과 습득이 서로 붙고 서로 버믈어 새맛을 낸다. 한산도 습득도 본래 뒷논 것이 있다. 한가지 제쥬변의 님자들이다. 그런 이들이 붙고 버믈면 제쥬변을 잃는단다. 한산과 습득의 노래를 부르는 까닭은 바로 이 것 때문이다. 이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제쥬변한 사람이 제쥬변을 잃어 버리는 까닭, 그걸 묻고 싶기 때문이다. 제쥬변의 사람들이 붙고 버믈어 사는 세계, 그 사이에 서로 잃어 버리는 제쥬변, 그게 기이하기 때문이다. 이 노래에도 세계가 담겼다. 그것도 여러 세계가 겹으로 담겼다. 세계의 뜻을 알지 못하면 저 노래도 알기 어렵다. 그래서 옛날 이야기로 돌아간다. 한산과 습득은 전해오는 이야기 속의 사람이다. 때는 당나라 때이고 곳은 천태산의 국청사라는 산과 절이다.


한산은 양자가 여위시들어, 베옷은 다 떨어지고, 벗거플로 고깔쓰고, 나무신 쓸며 국청사에 끼어 든다. 습득에게 가서 중이 먹던 즛의 밥과 즛의 나물을 얻어먹더니


‘벗거플’은 벗나무 껍질이다. ‘즛의’는 찌꺼기란다. 한산은 기이한 사람이다. 이름도 모른다. 천태산의 차가운 굴속에 살았다. 그래서 한산(寒山), ‘차가운 산’이라고 불렀다. 습득은 국청사 절에서 부엌일을 하던 중이었다. 즛의 밥과 나물을 대나무 통에 담아 두었다가 한산이 오면 함께 지고 나갔다. 둘이 만나면 늘 시끄럽게 웃었다.


한산과 습득이 서로 만나 웃나니

또 일러라, 므스글 웃나뇨?

한데 하녀 걸음 들지 못하는 줄

웃으면서 이른다.


동행(同行)을 ‘한데 하니다’라고 새겼다. 한산과 습득, 두 사람은 동행과 웃음을 상징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 둘의 동행과 웃음을 알지 못한다. 이상하고 기이하다. 저들은 왜 함께 다닐까? 저들은 왜 시끄럽게 웃을까? 이상한 이들, 그래서 그들의 동행과 웃음은 이야기가 되었다. 전설이 되었다.


천태산은 중국 절강성에 있는 산이다. 중국 땅이나 중국 역사라면 흔히 서안이나 낙양, 북경을 떠올린다. 삼국지의 위나라, 오나라, 촉나라, 천태산은 옛날 오나라 땅이다. 우리에게 오나라는 장보고 시절의 뱃길을 상징한다. 땅의 길을 따라 가면 중국의 북쪽으로 가게 된다. 바다의 뱃길을 따라 가면 양자강을 낀 오나라 땅으로 들어 가게 된다. 뱃길만 잘 안다면 오나라로 가는 길이 훨씬 더 빠르고 편했다. 천태산과 국청사, 고려적만 해도 뱃길을 따라 자주 오가던 곳이었다. 고려적의 천태산과 지금의 천태산, 말은 같아도 뜻은 다르다. 고려적의 세계와 지금 우리의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고려적 사람들은 함께 하니던 한산과 습득, 그들의 웃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이 전설이 된 까닭도 잘 알고 있었다. 한산과 습득, 이 말을 들으면 ‘서로 버믈어 쥬변 못하니’, 그냥 이 말을 떠올릴 줄 알았다. 한산과 습득의 이야기로 들어 가는 일은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만나는 일이고, 겹치는 일이다.


저 노래는 세계가 간섭하는 일을 노래한다. 한산의 세계와 습득의 세계가 서로 마주친다. 한산은 습득의 세계로 들어가고, 습득은 한산의 세계로 들어 간다. 둘의 이야기가 전설의 이야기로 남은 까닭은 둘의 세계가 아주 달랐기 때문이다. 아니 주위의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도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산은 꼴은 사나와도 자유로운 사람이다. 말하자면 산속에 사는 도사이다. 아는 것도 많고 시도 잘 쓴다.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온다. 자유의 상징이다. 그래도 늘 춥고 늘 배고프다. 그것도 제가 가린 살혬이다. 이에 비해 습득은 절의 부엌에 매인 사람이다. 계율도 있고 일도 있다. 그래도 따뜻하고 배부르다. 그것도 제가 가린 살혬이다. 살혬과 살혬이 만난다. 부딪친다. 서로 버믄다. 사람들은 이게 참 이상했다.


한산과 습득의 동행과 웃음은 님자와 손님의 짝처럼 쓰인다. 다른 살혬, 다른 세계가 부딪치고 버므는 장면이다. 세계가 부딪치면 자유도 부딪친다. 세계가 간섭하면 자유도 간섭한다. 한산과 습득, 오고 감과 가고 옴, 그냥 말장난이 아니다. 한산과 습득의 세계가 간섭하는 장면이다. 한산은 굴속에서 나왔고, 습득의 부엌에서 나왔다. 한산은 굴속으로 돌아가야 하고, 습득은 부엌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고 가는 일에도 세계가 있다. 한산과 습득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세계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다. 여기에도 님자와 손님이 번득하다. 우리가 함께 살아 가는 세계는 이런 세계이다. 둘이 만나도 쥬변 못한데, 수십 수백이 만난다면 어떨까? 함께 하니는 일은 자유를 잃는 일이다. 만나는 수십, 수백이 내 자유를 앗아간다. 도적이고 도적의 꾀이다. 저 노래는 그런 노래이다. 한산과 습득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까닭은 내 자유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부딪치는 자리에서 제 세계, 제쥬변을 챙기라는 뜻이다.


이 누비는 저 같지 않아 오며 가매 자낙자낙하도다.


이것은 함허의 감상이다. 누비는 조각천을 누벼 기운 옷이다. ‘이 누비’는 스님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종용(從容)을 ‘자낙자낙하다’라고 새긴다. 가볍고 느긋한 모습이다. 자낙자낙, 말에서 그냥 느낌이 온다. 한산과 습득은 웃는다지만, 저 누비는 자낙자낙하단다. 저 누비가 세계에 버므는 모습이고, 제쥬변을 스스로 버리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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