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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세계

6.1 세계는 사차원


세계(世界) [명사]

1. 지구상의 모든 나라. 또는 인류 사회 전체

2. 집단적 범위를 지닌 특정 사회나 영역

3. 대상이나 현상의 모든 범위


세계(世界)라는 말, 불교에서도 흔히 쓰는 말이다. 물론 언해불전에도 자주 나온다. 흔하다고 했지만, 그런 말로는 부족하다. 책 한권에도 몇십번씩 나온다. 세계란 말를 빼면 이야기를 이어가지도 못할 지경이다. 그만큼 쓸모가 많았던 말이다. 그만큼 중요한 뜻을 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언해불전의 세계, 요즘 우리가 쓰는 세계와는 사뭇 다르다. 이게 참 기막히다. 사전의 풀이도 그렇지만, 요즘의 세계는 서구의 말, 말하자면 월드(world)를 번역한 말이다. 서구의 말을 한자말로 번역하면서, 오래 전부터 써오던 '세계'를 빌어 썼다. 뜻이나 쓰임새가 닮은 점도 있지만, 전혀 다른 점도 있다. 세상이 바뀌고 말투도 바뀌면서 '다른 점'은 아주 잊혀 버렸다. 이게 참 아깝다.

세(世)는 옮아 흐름이오, 계(界)는 방위(方位)이니


언해불전의 풀이는 이렇다. 지난 몇 년간 언해불전 우리말투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저 말도 참 자주 했다. 이게 뭔 소리? 언해불전에 ‘빈 골이 소리 맛갈몸 갇혼디라’란 말이 나온다. 공곡(空谷)을 '뷘 골'이라고 새긴다. 응성(應聲)은 '맛갊다'라고 새긴다. ‘맛갊다’는 ‘응(應)하다’라는 뜻의 옛말이다. 빈 골짜기가 소리를 응하면 메아리가 된다. 허공의 메아리, 맛갊는 것 같지만, 맛갊는 게 아니라고 한다. 듣는 이들의 속이야 어찌 알겠냐만, 내 속은 늘 그랬다. 별로 어려운 소리도 아니고, 쓸모도 많다지만 다들 무던히 흘려 듣는다. 허공의 메아리, 그렇다고 꼭 흘려 듣는 것만도 아니다. 한번은 세계란 말 쓰지 말라고 핀잔을 듣기도 했다. 세계란 말은 신자유주의자들이나 쓰는 말이라고도 했다. 애고, 어찌 그런 막말을…… 그래도 부질없다. 익숙하지 않은 말투, 이상하게 들린다. 익숙하다는 말, ‘닉다’이다. ‘익다’의 옛말이다. 익어도 아주 푹 익은 말, 고치기 어렵다. 그래서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시방삼세(十方三世)란 말도 있다. 십방(十方), 열 개의 방향이다. 불교의 말투로는 ‘시방’이라고 읽는다. ‘사방팔방’이란 말도 있다. ‘여기저기 모든 방향이나 방면’이란 뜻이다. 사방은 동서남북이다. 팔방은 동서남북에다 동북, 동남, 남서, 북서의 간방(間方)을 합한 것이다. 사방팔방은 평면의 방위이다. 말하자면 이차원이다. 여기에 ‘위와 아래’ 두 방향을 합한 것이 시방(十方)이다. 시방은 삼차원의 공간이다. 이것이 방위이고, 그리고 이것이 계(界)이다.

육합(六合)에 저지시며 시방에 저지샤

육합은 천지(天地)와 사방(四方)이라


육합(六合)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이다. 동서남북 사방에 하늘과 땅을 더했다. 비가 내리면 위와 아래, 하늘과 땅을 적시고, 사방을 적신다. 이 것도 삼차원이다. 시방이 인도에서 온 불교의 말투라면, 육합은 한자문화권의 말투이다. 삼차원의 공간, 삼차원의 말투, 아시아에서는 이처럼 오래 됐다.

삼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이니, 과거는 지나간 뉘오, 현재는 나타있는 뉘오, 미래는 아니 온 뉘라


『월인석보』의 구절이다. 세(世)라는 글자를 ‘뉘’라고 새긴다. 과거(過去)는 ‘지나 간’, 현재(現在)는 ‘나타 있는’, 미래(未來)는 ‘아니 온’이라고 새긴다. 한자의 뜻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겼다. 세(世)나 시(時), 시간을 나타내는 글자, ‘제’나 ‘적’을 쓰기도 하고 ‘끠()’를 쓰기도 한다. 이런 말은 흔적이라도 남았지만, ‘뉘’는 아주 잊혀졌다. 이런 말도 아깝다. 시방(十方)은 계(界)이다. 요즘엔 공간이라고 부른다. 삼세(三世)는 세(世)이다. 시간이다. 시방삼세가 바로 세계이다.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합하여 부르던 말이다. 삼차원의 공간에 시간을 더했으니 사차원이다. 그래서 세계는 사차원이다. 이 말에 시간과 공간을 바라보던 태도가 담겼다. 세와 계는 늘 붙어 다닌다. 세를 이야기하면 계가 반드시 따라 온다. 거꾸로 계를 이야기하면 세가 당연히 따라 온다. 시간과 공간은 추상의 관념이다. 떼어서 분석할 수는 있지만, 뗄 수 있는 관념이 아니다.

물리학에서 시공간(Spacetime)은 공간의 삼차원과 시간의 일차원을 하나의 사차원 연속체로 융합하는 수학의 모델이다. 시공간(Spacetime)의 다이어그램은 상대론의 효과를 시각화하고 이해하는 데 쓸모가 있다. 예를 들어 “서로 다른 관찰자들이, 언제 어디서 일이 벌어나는지를 어떻게 알게 되는지”와 같은 문제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로 시공간(Spacetime)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이해하고 표현한다. 20세기 초의 일이었다. 이전까지 철학이나 물리학에서도 시간과 공간은 다른 말, 다른 범주였다. 물리학이나 수학의 모델, 흥미롭긴 해도 잘 모르는 이야기 더 늘어 놓을 재주는 없다. 아무튼 ‘세계’와 ‘시공간’은 아주 닮았다. 말도 닮았지만, 말에 담긴 뜻, 의도도 닮았다. 아인슈타인이 세계라는 말을 진작 알았다면, 그의 상상이나 실험도 훨씬 쉽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은 하게 된다.

세계 다함 없으나, 모도아 한 접음이라

펴면 곧 참치(參差)하고, 걷으면 곧 한가지로다

참치는 가작하지 아니할시라


불교에서는 권서자유(卷舒自由), 또는 권서자재(卷舒自在)란 말을 즐겨 쓴다. ‘걷고 펴고 제쥬변’이라고 새긴다. 주먹을 예로 든다. 쥘 수도 있고 펼 수도 있다. 쥐면 한 주먹이지만, 펴면 다섯 손가락이다. 참치(參差), 들쭉날쭉, 가지런하지 않은 모습이다. '가작하다'는 '가지런하다'의 옛말이다. 우리가 살아 가는 우리의 세계, 시간과 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을 걷고 편다. 모든 중생은 제 나름의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 간다. 제 세계이다. 나의 세계와 남의 세계가 겹치고 간섭한다. 나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가 된다. 나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를 바라 보는 눈이다. 융합(融合)은 ‘녹여 합하다’는 말이다. ‘녹이다’는 ‘나누다’의 짝처럼 쓰인다. 융합은 분석의 짝이다. 분석은 펴는 일이다. 반대로 융합은 걷는 일이고 모도아 접는 일이다. 나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 걷어 볼 수도 있고 펴 볼 수도 있다. 분석할 때도 있고 융합할 때도 있다. 주먹을 쥐는 까닭이 있듯, 손바닥을 펴는 까닭도 있다. 무엇보다 쓰임이 다르다. 그래 봐야 내 손바닥, 쥐고 펴고 뭐가 어렵겠나. 그래서 제쥬변, 자유자재이다. 세계, 시간과 공간, 거두어 볼 수도 있고, 펴 볼 수도 있다.

권서자유, 또는 권서자재, 말이야 까다롭다. 나는 요즘의 사진기나 컴퓨터의 ‘줌인-줌아웃’을 연상한다. 한번 클릭으로 펴기도 하고 접기도 한다. 컴퓨터나 핸드폰의 지도를 볼 때마다 권서자재의 힘과 쓸모를 느낀다. 자유와 자재를 실감한다. 펴고 접는 일이 이렇게 편하다면, 살혬을 찾는 일도 이렇게 편해진다. 펴고 접는 세계, 사차원의 세계는 이런 일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쉬운 방법, 세계를 살아가는 빠른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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