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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간섭

5.3 브터니닷

브터니닷

연(緣)은 브틀시오, 기(起)는 닐시니, 브터니닷 말이라.


‘닐다’는 ‘일다’ 또는 ‘일어나다’의 옛말이다. 연기(緣起)를 ‘브터니닷’이라고 새겼다. ‘붙어일다’는 말이다. 연영(緣影), 그르메에 버믄다. 연(緣)이란 글자, 앞에서는 ‘비비거나 버믈다’고 했다. 이제는 ‘붙다’이다. 비비거나 버므는 짓에 붙는 일이다. 붙어서 비비고 버믄다. 다시 비비고 버므는 데 붙고 일어난다. 뭔가 새로 생긴다. 이게 다 사람이 하는 짓이다. 동작이다. 동사이다.

이게 있는 젼차로 저게 있다.

이게 나므로 저게 난다.

이게 없는 젼차로 저게 없다.

이게 지므로 저게 진다,


석가모니의 말씀이다. 놀라움 바로 다음에 이 말씀이 나왔다. 본래 평등한데 평등하지 않은 까닭, 본래 자유인데 자유롭지 않은 까닭, 그 까닭을 나누고 가린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연기(緣起)라고 부른다. 상의상관(相依相關), 이런 말로 풀이하기도 한다. ‘불교는 연기법’이란 말을 하는 사람도 참 많다. 불교의 핵심이자 골수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연기라는 말은 불교로 들어 가는 관문이다. 자물쇠이고 열쇠이다. 그런데 이런 말, 한문이나 한자 없이는 말을 꺼내기도 어렵다. 어느 누구도 우리말로 새기려 하지 않는다. 물론 쉽게 풀어주려는 사람들은 있다. 그래 봐야 한자말이다. 알듯 모를듯한 한자말투, 풀어가다 보면 늘어지고 헸갈린다. 그래서 “번역이나 풀이가 더 어렵다”고도 한다. 말이 좀 우습긴 해도 마냥 빈말도 아니다.

그런데 언해불전의 말투는 짧다. 상의(相依)도 상관(相關)도 다만 ‘서로 붙다’이다. 이런 말, 구태여 풀고 설명할 까닭도 없다. 말이 번득하면 뜻도 번득하다. ‘브터니닷’, 호박손이 이파리 하나를 더위잡는다. 더위잡은 자리를 붙어 다시 손을 올린다. 내게는 문득 이런 그림이 그려진다. 절벽을 기어 오르는 사람의 모습도 그려진다. 땅을 붙어 넘어지고, 땅을 붙어 일어난다. 브터니닷, 살아 있는 생명체가 하는 행동, 짓과 일이다. 잠깐도 쉬지 않고 하는 짓이다.

모든 법의 연(緣)이 허(虛)한지라, 실(實)치 아니함이 거울의 상(像)과 물의 달 같음을 아롬이오, 법의 브터 니러남이 상녜 거짓의 것이며, 상녜 공(空)한 줄 알면 멀리 구모(龜毛)에 다르고 분(分)이 경상(鏡像)과 같으니라


얼굴과 대가리, 얼굴과 그르메, 말이 이어진다. 물의 달, 거울의 그르메, 월인천강으로 돌아간다. 이런 말이 서로 단단하게 붙어 있다. 빈대가리 쪼고, 그르메를 비비고 버믈고, 이 모두가 ‘브터닐어’의 ‘–붙이’ 들이다. 붙어야 일어난다. 낭떠러지를 맨손 맨발로 기어 오르는 이, 붙을 자리가 비었다면 속절없다. 자유낙하, 자유롭지만 살혬도 없다. 살고자 한다면 붙어야 할 자리에 붙어야 한다. 빈대가리가 아니라, 얼굴을 가진 단단한 자리를 잡아야 한다. 바위 조각의 얼굴이건, 나무 뿌리의 얼굴이건, 얼굴을 잡고, 얼굴에 붙어야 살혬이 나온다.

나는 언해불전을 불교책으로 읽지 않는다. 언해불전에 담긴 글, 내겐 익숙한 글이다. 한문으로도 여러 번 보고 여러 번 읽었다. 나는 언해불전을 우리말 책으로 읽는다. 불교를 영어로 부디즘(Buddhism)이라고 부른다. ‘브터니닷’, 나는 이 말에 붙은 -붙이들을 ‘브티즘’이라고 부른다. ‘븓다의 철학’ 브디즘이라고도 부른다. 그냥 심심풀이 말노릇이다. 그래도 ‘붙어 일어’, 이 말에는 단단한 사유, 사랑과 살혬이 담겼다. 그렇다고 굳이 사랑과 살혬을 찾지도 않는다. 언해불전에도 복잡하고 정교한 논리와 논증이 담겨 있다. ‘브터니닷’, 나는 이 말을 보면서 확실하게 알았다. 아무리 복잡하고 정교한 논리라도, 한문이나 외국말 없이 우리말로 읽고 쓸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말로 철학하기’, 이런 말도 제법 오래 된 말이다. 나는 언해불전에서 그런 가능성을 읽는다. 그런 모범을 읽는다.

모(模)는 주물(鑄物)하는 거플이오, 범(範)은 법이라,

모범(模範)은 법(法)이니, 나무로 본을 만들씨 모(模)요, 대로 만들씨 범(範)이라.


모범은 거플이다. 대가리이고 거푸집이다. 같은 것을 거듭 찍어내는 본이다. ‘브터니닷’, 이런 말은 우리말의 거플이고 본이다. 말을 찍어내는 표본, 뜻을 담는 대가리가 정해지면 담기는 뜻, 말의 얼굴도 정해진다. 정해진 얼굴대가리, 서로 소통하는 표본이고 표준이 된다. 붙다의 –붙이들, 짧고 또렷하다. 헷갈리는 한자말을 쉽게 새긴다. 언해불전의 우리말, 말의 거플은 씩씩하고 번득하다. 설명도 풀이도, 긴 말이 필요없다. 이런 말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다. ‘브터니닷’, 내게는 이 말이 편안함의 상징이다. 이런 말을 쓰면 편안해 진다. 쉬운 거플, 쉬운 표본의 편안함이다. 어린 사람, 어린 백성도 편안하게 해 준다.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 세종의 말씀이다. 과연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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