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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말의 얼굴

1.8 아롬을 잡는 그릇

筌, 고기잡는 그릇전(筌), 고기잡는 그릇


오늘날 세존이 우리를 제법(諸法) 농담의 의론(議論)의 똥을 사랑하여 덜게 하실새

농담의 의론을 거꾸로 가려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에 똥이라고 했다.


『월인석보』의 구절이다. 세종의 말투이다. ‘농담의 의론(議論)’은 희론(戱論)을 번역한 것이다. ‘똥을 사랑하다’라고 한다. ‘사랑’은 물론 사유(思惟)이다. 똥을 사랑하고 똥을 덜라고 한다.

무릇 말씀이 있으면 다 노릇의 말씀이 되며


희론(戱論), 불교에서 참 자주 쓰는 말이다. 언해불전에서는 이 말을 ‘노릇의 말씀’이라고 새긴다. 여기서 노릇은 놀이이다. 농담이라는 말, 말을 놀린다. 가지고 논다. 희론(戱論)은 목적과 의도를 벗어난 논란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독화살의 비유’라는 게 있다. 독화살을 맞았다면 화살을 뽑고 약을 쓰고, 어떤 조치라도 얼른 해야 한다. 당장 해야할 일은 제쳐 두고, 독이 어떠니 화살이 어떠니 시시비비를 따진다면 그런 것이 희론이다. 이런 논란은 감정에 휘둘리고 지식과 이론에 집착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언해불전의 ‘노릇의 말씀’은 웃자고 하는 농담, 그냥 말장난이 아니다. 그렇다고 목적과 의도를 벗어난 논란 만을 탓하는 것도 아니다. ‘노릇의 말씀’은 말씀의 본질이다. 말의 얼굴이다. 말은 개념이나 논리, 나름의 규칙을 따라 노는 놀이이다. ‘노릇의 말씀’은 말하자면 불교의 언어관이다. 소통의 철학이다. 개념이나 논리를 따라 가는 말씀, 이런 말씀을 따라 가다 보면 생각이 뒤집히고 마음을 더럽힌다. 그래서 ‘노릇의 말씀’은 모두가 똥이라고 한다.

부혈기지속(夫血氣之屬)이 필유지(必有知)하고, 범유지자(凡有知者)가 필동체(必同體)하니

피와 기분(氣分)의 류(類)는 반드시 아롬이 있고, 무릇 아롬이 있는 것은 반드시 체(體)가 한가지이니


언해불전의 구절이지만, 이건 유교의 경전 『예기(禮記)』에서 빌어온 말이다. 혈기(血氣), 기(氣)를 ‘기분’이라고 읽는다. 피와 기분을 가진 무리들, 언해불전은 이 구절을 불교의 중생(衆生)으로 읽는다. 몸과 생명을 가졌다. 지(知)를 ‘아롬’이라고 새긴다. 피가 흐르고 기가 흐르는 중생들은 반드시 아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롬을 가졌다면 모두가 동체(同體), 한 몸이다. 이렇게 읽으면 유교도 불교도 다툴 것도 없다. 언해불전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까닭은 이 구절에 언해불전에서 하고 싶은 말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몸이 한가지로 가졌다는 ‘아롬’이다. 아롬은 ‘알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요즘에야 ‘앎’이라고 한다. ‘알다’라는 동사는 ‘모르다’와 짝을 이룬다. 언해불전은 이 말의 명사형을 ‘모롬’이라고 쓴다. ‘모롬과 아롬’의 짝이다.

구태여 아롬을 앞세우는 까닭은 ‘모롬’이 있기 때문이다. 언해불전은 뒤집힌 ‘아롬’을 다룬다. 뒤집힌 ‘아롬’이 ‘모롬’이다. 모롬과 아롬 사이에 말이 있다. 모롬을 다시 뒤집어 아롬으로 바꾸고자 한다. 말은 모롬을 아롬으로 바꿔 주는 수단이다. 길이다. 언해불전은 ‘니라다’라는 동사를 쓴다. ‘(말을) 이르다’의 옛말이다. 그리고 이 말의 명사형은 ‘니롬’이라고 한다. ‘니라다’의 짝은 ‘듣다’이다. 이 말의 명사형은 ‘드롬’이다 .‘니롬과 드롬’의 짝이다. 니롬과 드롬의 길을 통하여 모롬이 아롬으로 바뀐다. 모롬을 아롬으로 바꾸는 말의 길이다. 이 두 개의 짝을 순서대로 맞춰보자면 ‘모롬-니롬-드롬-아롬’이 된다. 언해불전의 말투가 이렇다.

이 두 개의 짝 , 요즘에는 쓰지 않는 옛말이다. 그래도 나는 이 짝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운이 맞는다. 입에 착착 붙는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말투에 관한 이야기이다. 15세기 언해불전에 담긴 우리말투이다. 이 말투에는 말을 하는 기술과 말을 듣는 기술이 담겨 있다. ‘니롬과 드롬’의 짝이다. 그리고 이 짝은 ‘모롬과 아롬’의 짝을 향한다. 모르는 상태를 아는 상태로 바꾸어 가는 방향이다. 이 두개의 짝, 내 입에 착착 붙는 말, 그래서 나는 이 짝 만큼은 그냥 쓰려고 한다. 오래된 옛말이다. 요즘 문법에 맞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말로 바꾸어 보려고도 했다. 그러다 보니 말도 길어지고 짝도 맞지를 않았다. 낯설고, 이상하더라도 그러려니 들어주길 바란다.

전(筌)은 고기 잡는 그릇이오, 제(蹄)는 토끼 그물이니 고기를 잡으면 전(筌)을 잊고, 토끼를 잡으면 제(蹄)를 잊는다.


이건 『장자(莊子)』에서 따온 말이다. 고기 잡는 그릇, 전(筌)을 전(詮)으로 비겨 읽는다. 그리고 ‘니라다’, 또는 ‘니롬’으로 새긴다. 니롬과 드롬, 말을 그릇과 그물에 비긴다. 모롬을 아롬으로 바꿔 주는 그릇이다. 니롬과 드롬의 그릇으로 아롬을 잡는다. 이게 말의 쓰임새이다. 아롬을 잡는 그릇, 아롬을 잡으면 잊으라고 한다. 고기 잡는 그릇, 쓰고 나면 창고든 어디든 던져 두면 된다. 그런데 니롬과 드롬의 그릇, 던져 두기가 쉽지 않다. 고기를 잡은 뒤에도 오락 가락 놀린다. 그러다 보면 노릇의 말씀이 되고, 똥이 된다. 고기를 잡기는커녕, 나와 남을 함께 더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