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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34_01 제행무상

증도가 현각의 노래

제행(諸行)이 덛덛함이 없어, 일체(一切) 비니


연(緣) 일며 연(緣)마침에, 성(性)이 본래(本來) 한가지니라

연생(緣生)을 버리고, 실(實)한 뜻을 구하고자 하린댄

북녘 물을 이가 도리어, 동으로 감이 같으리라

국토(國土)에, 일며 있으며 헐며 빔이 있고,

몸에, 나며 늙으며 병하며 죽음이 있고,

마음에, 나며 있으며 다르며 없음이 있나니,


이 이름이 제행(諸行)이니,

행(行)은 옮아 흐르는 뜻이라.


제행무상, 흔한 말이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늘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아니함.' 사전은 이렇게 풀이한다. 언해는 행(行)을 '올마흘롬'이라고 풀이한다. '옮아 흐름'이다. 천류(遷流)라는 한자말을 이렇게 새긴다. 상(常)은 '덛덛함'이라고 새긴다. 옮아 흐름과 덛덛함의 짝이다. 이제 이런 말은 누구도 쓰지 않는다.

성주괴공(成住壞空)

국토(國土)에, 일며 있으며 헐며 빔이 있고,


생노병사(生老病死)

몸에, 나며 늙으며 병하며 죽음이 있고,


생주이멸(生住異滅)

마음에, 나며 있으며 다르며 없음이 있나니,


꽃은 '피락지락'하고, 연(緣)은 '일락 없으락'한다. 기멸(起滅)을 '일락 없으락'이라 새긴다. 옮아 흐름을 그리는 말이다. 언해는 다시 국토와 몸과 마음으로 나누어 풀이한다. 이게 '모든 행'이다. 몸과 마음은 중생을 가리키는 짝이다. 국토는 중생이 함께 살아가는 땅, 나라이다. 중생과 나라의 짝, 또는 사람과 나라의 짝이다. 한자말을 다루는 언해의 솜씨, 글자 하나 하나를 쉬운 우리말로 옮긴다. 이런 말투는 15세기 이후 아주 잊혀졌다. 요즘엔 저런 한자말, 누구도 구태여 새기려고 하지 않는다. 저런 쉬운 말을 제쳐 두고, 궂이 한자말을 써야 하는 까닭은 뭘까? 언해불전은 진보를 '나아걷다'라고 새긴다. 퇴보는 진보의 짝이다. '무르걷다'라고 새긴다. 진퇴는 '나소물리다'라고 새긴다. 15세기 세종이 실험했던 우리말투, 마냥 '무르걷다'의 길을 걸어왔다. 이런 말투, 부러 공부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다들 쉬운 길을 놓아두고, 어려운 길을 돌아서 다닌다.

일며 있으며, 헐며 빔, '며'로 이어지는 옮아 흐름, 말로는 금을 그을 수 있다. 그러나 옮아 흐름에는 금이 없다. 그츤 슻도 없다. 의의사량(擬議思量), 너겨 의론하며 사량하는 사이에 금을 긋는다. 옮아 흐름을 금으로 너기고 따진다. 언해는 없는 금과 있는 금 사이에서 잘못을 가린다. 번득한 우리말로 풀이하고 증명해 간다. 우리말로 하는 사랑, 언해의 우리말 솜씨, 그 긴 길이 이 짧은 구절에 고스란히 담겼다.

과거는 지나간 뉘오, 현재는 나타 있는 뉘오, 미래는 아니 온 뉘라.


이건 세(世), 시간의 옮아 흐름이다. 옮아 흐름에는 덛덛함이 없다. 옮아 흐르기 때문이다. 잠깐도 쉬지 않는다. 제행무상, '옮아 흐름'과 '덛덛함이 없음', 이건 동어반복이다. 같은 말, 같은 뜻을 다시곰한다. 강조의 말투이다. '나고 늙고, 병하며 죽음', 사람들은 옮아 흐름에 금을 긋는다. 그리고 그 금에 이름을 낀다. 이름을 끼면 얼굴이 나톤다. 남의 얼굴, 늙음의 얼굴, 병의 얼굴, 죽음의 얼굴, 사람들은 다시 이름과 얼굴에 붙는다. 받당긴다. 비비고 버믄다. 금의 이름과 금의 얼굴, 본래 비었다. 국토와 몸과 마음과, 모두가 비었다. 영가의 노래를 읽는 언해의 솜씨이고 말씨이다.

여래 이른 마음들이,

다 마음이 아니라,

이 이름이 마음이니,

*

염념(念念)이 옮아 흘러,

일며 없음이 머물지 아니하나니,


이런 마음을 이름이 여러 마음이니,


위의 구절은 『금강경』의 말이다. 아래의 구절은 함허의 말이다. 지나간 뉘의 마음, 나타 있는 뉘의 마음, 아니 온 뉘의 마음, 마음도 옮아 흐른다. 옮아 흐르는 마음에 금을 긋는다. 슻을 두고 나누고 가린다. 나누고 가린 마음, 이름을 끼자면 여러 마음이 된다. 염념이 일락 없으락 한다지만, 옮아 흐르는 마음에, 일어나는 상(相)도 없고, 없어지는 상도 없다. 일락 없으락에 얼굴은 없다. 덛덛함이 없는 옮아 흐름, 일체가 비었다고 한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여 일체개고(一切皆苦)하니라.

여러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다 고(苦)니라.


개고(皆苦)는 다른 판본에서 개공(皆空)이라고 했다.

공이란 글자가 (뜻에) 가깝다.

『금강경삼가해』, 야보의 말이다. 일체가 고(苦)라고 한다. 이 말 아래에 한문으로 된 주석이 달려 있다. 함허가 달아 놓은 주석이다. 다른 판본들을 찾아 보다가, '공(空)'으로 쓰인 판본을 찿았다고 한다. 그래서 교정을 했다는 말인데, 그래도 함허는 원문을 고치지는 않는다. 아래에 주석만 달아 놓고 넘어간다.

내가 지난 해 이 노래를 대중들에게 가르칠 때,


이 구절을 새기던 차에 문득,

증도가 가운데 '제행무상 일체공'이란 말이 생각났다.

바로 개고라는 말이 개공의 잘못임을 알았다.


개고라는 말은 노래의 뜻이나, 경의 뜻에 맞지 않으니,

개공의 잘못임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증도가의 말을 이끌어 증명을 하였다.


뒤에 다른 판본을 보니 과연 개공이란 말이 있었다.


함허의 풀이는 친절도 하다. 교정을 하던 중에 있었던 일들을 따로 모아, 결의(决疑)라는 이름으로 책 뒤에 묶어 두었다. 결의(决疑), '의심을 풀다'는 말이다. 함허는 원문에 손을 쓰지는 않는다. 다만 제 이름으로 풀이를 하고 주석을 단다. 그래도 못했던 말, 책 뒤에 부록으로 남겨 둔다.

내 비록 어진 의원의 짝이 아니나,

다행히 문의(文義)를 잠깐 알아,

진위(眞僞)를 잠깐 가린 젼차로,


경과 소(疏) 가운데,

시혹 떠지며, 시혹 부르며, 시혹 갓갈며, 시혹 외욤을 가려내어,

여러 본(本)에 마초며, 여러 스승께 마게와,

써 정하노라.


그러나, 여느 본에 붙은 밖에,

잠깐도 한 자, 한 구도 간대로 그 사이에 더하며 덜지 아니 하노니,


무릇 의심하는 바가 있고,

다른 본에 의거한 곳이 없는 것은,

의리에 붙어 결하여 권의 나중에 부칠 따름이니라.


탈(脫), 연(衍), 도(倒), 오(誤), 이 네 글자는 교정의 기술을 다루는 이를테면 전문용어이다. '떨어지고, 불리며, 뒤집히고, 외욤', 함허는 그렇게 교정을 했다. 언해는 증명하다를 '마게오다'라고 새긴다. 여기서는 질(質), 스승께 묻는 일이다. '물어서 마게오다'는 뜻이다. 그래도 풀리지 않은 의심도 남는다. 의리를 따져 결정을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원문에 손을 대지 않는다. 제 이름을 걸고 써서 남기는 까닭은 후학, 뒤에 보는 사람들에게 알게코자 함이다. 그래도 문의(文義), 읽는 이에게 달렸다. 풀이는 하지만, 손을 쓰지는 않는 까닭이다.

이 구절, 『금강경삼가해』와 『증도가남명계송』의 관계를 증명하는 또 다른 증거이다. 함허는 『증도가남명계송』의 구절을 이끌어 『금강경삼가해』의 잘못을 교정한다. 『증도가남명계송』의 언해는 『금강경삼가해』의 구절, 함허의 풀이와 교정을 다시 이끌어 『증도가남명계송』을 새기고 풀이한다. 세종과 두 아들은 이 두 책을 동시에, 한끠에 함께 번역했다. 언해의 말투에 '서로를 비추다'는 말이 있다. 세종과 두 아들은 두 책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둘을 서로 비추어 가며 우리말로 새겼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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