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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33_01 피락지락

증도가 현각의 노래

적멸성(寂滅性)의 가운데, 마시며 찍먹음을 좇아


사량(思量) 없으며 분별없어, 시류(時流)에 섞도다

일찍 한 낱, 집 밭의 쌀을 먹으니

바로 이제 이르도록, 배 부름이 마지 아니 하여라


이 마디의 가운데 구절, 마디의 몸통이다. '놓고 잡들지 말지니', 번득한 말투가 여기서부터 꼬인다. '적멸성(寂滅性)의 가운데', 이 마디의 열쇠말이다. 이런 말은 헷갈린다. 풀이하는 이들도 대개는 '열반'이라고 슬쩍 넘어간다. 영가는 이 말에 수음탁(隨飮啄)이란 말을 마주 세운다. 언해는 '마시며 딕먹음을 좇아'라고 새긴다. 덩어리 먹이, 새처럼 찍어 먹고 쪼아 먹는단다. 겨르로운 도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남명은 사량도 없고, 분별도 없다고 한다. 애고 저 도인, 이건 철 없는 아이를 보고 혀를 차는 꼴이다. 무겁게 읽을 것 없다.

적멸(寂滅)은 고요히 없을시니,

불성(佛性)의 가운데 한 상(相)도 없을시라.

장(場)은 도리 닦는 바탕이오, 중(中)은 가운데라.


함허는 '적멸장중(寂滅場中)'이라고 한다. 언해는 저렇게 풀이한다. 멸(滅)은 열반이다. '없음'이다. '없앰'이라고 읽는 이들도 있다. 불교를 '없앰의 공부'라고 가르치는 이들도 많다. 언해는 언제나 '없음'이라고 읽는다. 공부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도리 닦는 바탕'을 꺼낸다. 이러면 또 헷갈린다. 잡들지 말라더니, 공부를 하라는 걸까? 말라는 걸까?

있음과 없음의 사이, 언해의 말투는 짝의 말투, 모순의 말투이다. 두 짝의 날개로 읽는다. 거울과 저울의 가잘빔, '빔과 평(平)함'으로 읽는다. 그래야 '대(對)가 긋는다.' 절대(絶對)의 닦음을 가리킨다.

죽살이는 사뭇 있고, 열반은 사뭇 없다. '철저(徹底)'를 '사뭇'이라고 새긴다. 그런데 요즘엔 절대를 'absolute', '사뭇'이라고 읽는다. 하지만 언해의 말투는 아주 다르다. 죽살이와 없음의 짝, 사뭇 있고와 사뭇 없고의 사이, 그 중간, 그 가운데 대(對)가 긋고', 절대가 있다. 이걸 헷갈리면 노래 전체가 뒤틀린다. '고요히 없는 사이에 마시며 딕먹음', '고요히 없음'이 닦는 바탕이라면, '마시며 딕먹음'은 '닦음'이 된다. '사람에겐 남북이 있다지만, 법은 한가지', 육조의 말은 빈말이 아니다. 차별의 말투는 도적의 말투이다. 차별의 이름과 얼굴, 사뭇 잡들지 말라고 한다. 절대의 말투도 빈말이 아니다. 도적의 말투에 죽살이가 걸렸다. 우리 모두의 살혬이 걸렸다. 말씨와 솜씨에 속으면 안된다.

봄이 깊거늘 깊은 새 돌아오지 아니하니

바위 가에 모든 꽃이 제 피락지락 하놋다


                 *


성(性)이 본래(本來) 한가지라 함은,

모든 연(緣)이 일락 없으락 하나,

그 성(性)은 한가지니,


일락 없으락 함이 곧 적멸(寂滅)이라,


연생(緣生) 버리고 무생(無生)을 구하면,

북으로 갈 사람이 동으로 감이 같아 외욤이 심한 뜻이라.


위의 구절은 앞에 나왔던 노래이다. 아래 구절은 뒤에 이어지는 언해의 풀이이다. 개락(開落)은 '피락지락'이라고 새긴다. 기멸(起滅)은 '일락 없으락'이라고 새긴다. 연기(緣起)와 연멸(緣滅)의 짝이다. 피락지락하는 꽃, 일락 없으락 하는 연(緣), 이런 게 '브터니닷', 또는 '브터나닷'의 말투이다. 우리말로 새기는 절대의 말투이다. 무르익다, 익으면 물러진다. 사뭇 익으면 떨어지고 썪는다. 뻔한 일이지만, 그걸 다시곰 알게코자 쓰는 언해의 말솜씨이다. 이름과 얼굴에 잡들지 말라고 한다.

언해는 다시 '일락 없으락'과 적멸을 마주 세운다. '일락 없으락'과 '고요히 없음'의 짝이다. 한 쪽에 '없으락'이 있고, 다른 한 쪽에 '없음'이 있다. 똑 같이 멸(滅)이란 글자이다. 짝이 갈리면 뜻도 갈린다. '없으락'의 멸은 '있음'에 속한다. '없음'의 멸은 없음에 속한다. 두 겹의 짝이다. 있음의 멸과 없음의 멸, 사뭇 있음과 사뭇 없음의 짝이다. 사뭇 있음과 사뭇 없음, 그런 걸 성(性)이라고 부른다. 이름이다. 이름을 부르면 얼굴이 따라 온다. '연생(緣生) 버리고 무생(無生)을 구하면' 이런 일, 이런 공부가 일향(一向)의 공부이다. '한갓 구함'이다. 이름과 얼굴을 '한갓 구함'이 '잡드는' 공부이다. 남명은 대착(大錯)이라고 한다. 언해는 '외욤이 심하다'고 새긴다. 그래서 없음을 알고 싶다면 죽살이를 보라고 한다. 딕먹음을 보라고 한다.

도인도 딕먹고, 부처도 딕먹는다. 누구나 하는 짓, 본연(本然), '본래 그런'이라고 부른다. 딕먹음을 보는 게 뭐가 어려운가? 그런 것도 공부일까?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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