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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간섭

5.4 낄 데 안낄 데


간섭(干涉)

「명사」

「1」직접 관계가 없는 남의 일에 부당하게 참견함.

「2」『물리』두 개 이상의 파(波)가 한 점에서 만날 때 합쳐진 파의 진폭이 변하는 현상. 음파(音波)에서는 굉음(轟音)이, 빛에서는 간섭 무늬가 나타난다.


간섭은 나쁜 일이다. 국어사전의 풀이가 그렇다. ‘관계가 없는 남의 일’, ‘부당하게 참견함’, 과연 나쁘다. 남의 일에 간섭하면 안된다. 그렇다면 물리현상으로서의 간섭은 어떨까? 서로 다른 파동과 파동이 겹친다. 파동의 결이 부딪치면서 결이 바뀐다. 상쇄되거나 증폭된다. 서로가 서로를 바꾼다. 서로 바꾸고 바뀌어 새로운 파동이 만들어 진다.

상쇄와 증폭도 대구이다. 그런데 이런 대구는 좀 이상하다. 대구는 보통 서로를 향한다. 서로를 닮는다. 상쇄라는 말, 한자로는 상살(相殺)이다. 살(殺)이라고 쓰고 ‘쇄’라고 읽는다. 살(殺)의 짝은 생(生)이다. 상생의 짝은 상살이 되는 게 자연스럽다. 아무튼 상쇄는 ‘상반되는 것이 서로 영향을 주어 효과가 없어지는 일’이란다. 반대로 증폭은 결의 폭이 늘어난다. 골과 마루가 같은 파동이 마주치면 증폭이 이뤄진다. 이와 반대로 골과 마루가 반대인 파동이 마주치면 상쇄가 이뤄진다. 상쇄가 간섭이라면, 증폭도 간섭이다. 자연의 일이다. 줄어 든다고 나쁠 것도 없고, 늘어 난다고 좋을 것도 없다.

색(<色)을 봄이 색에 븓디 아니하며, 소리를 들음이 이 소리 아니니

두 끝에 다 븓디 아니 하야사, 비로서 여여(如如)에 맞음을 득(得)하리라


두 개의 ‘븓디’, 앞의 ‘븓디’는 간(干)이다. 뒤의 ‘븓디’는 섭(涉)이다. 간도 섭도 모두 ‘븓다’이다. ‘붙다’이다. 간섭은 그냥 ‘붙다’이다. 언해불전의 우리말투가 이렇다. 붙는 이야기, AI 가 대세라는데, 상상을 좀 바꿔 보자.

컴퓨터가 스테이크를 해석해 주는 것이거든. 컴퓨터가 우리 대신에 스테이크를 번역해 주는 거야. 컴퓨터는 다시 만들어 낸다기 보다는 다시 생각하는 거야. 컴퓨터가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뭔가가 빠지고 있는 거지.


살.

살이 컴퓨터를 미치게 해야 해.


애기들 볼을 꼬집는 할머니들처럼 말이지. 하지만, 컴퓨터는 미치지 않아. 아직은 아니야. 살, 닭고기, 스테이크 때문에 미치는 것까지는 아직 컴퓨터에게 가르치지 않았거든. 지금서부터 그걸 가르쳐야겠어.


SF 영화 ‘더플라이(The Fly)’의 장면이다. 컴퓨터에게 '살의 맛'을 가르치겠단다. AI의 상상도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아무튼 애기 볼을 꼬집는 것도 ‘붙다’이다. 애기의 볼도 살이지만, 할머니의 손도 살이다. 살과 살이 붙는다. 살과 살이 간섭한다. 할머니는 미친다. 꼬집히는 아기는 어떨까? 꼬집는다니 아프고 놀라서 울 수도 있겠다. 귀여워서 미칠 수도 있지만, 아파서 미칠 수도 있다. 붙는 일은 간섭이다. 살과 살이 간섭한다. 그렇다면 미치는 일은 또 뭘까? AI에게 그 걸 가르칠 수 있을까?

닭고기건 소고기건 스테이크도 살이다. 스테이크를 먹는 사람의 입도 혀도 살이다. 살과 살이 붙는다. 맛이 좋아 미칠 수도 있다. 채식주의자라면 보기만 해도,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날 수도 있다. 먹는 것도 ‘붙다’이지만, 보는 것도 ‘붙다’이다. ‘붙다’로부터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난다. 간섭은 간섭에서 그치지 않는다. 붙는 순간, 붙는 자리에서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난다. ‘브터니닷’은 이런 말이다. 간섭이 부당하고 나쁘다고는 하지만, 이것도 다 붙고 난 다음의 일이다. 붙는 일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좋고 나쁨의 차이는 붙어서 일어날 때 생긴다. 언해불전은 이 차이를 매우 무겁게 다룬다.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正義), 인도(人道), 생존(生存), 존영(<尊榮)을 위(爲)하는 민족적(民族的) 요구(要求)이니, 오즉 자유적(自由的) 정신(精神)을 발휘(發揮)할 것이오, 결(決)코 배타적(排他的) 감정(感情)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


기미독립선언서, 자유적 정신, 배타적 감정, 요즘에도 이런 말을 듣는다. 15세기 언해불전의 우리말투,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의 우리말투를 돌이켜 보면 불편하고 불안하다. 저런 말투를 ‘국한문혼용체’라고 부르기도한다. 국어와 한문이 섞였다지만, 국어라고는 한자 뒤에 붙은 토(吐) 밖에는 없다. 15세기의 우리말투는 저렇지 않았다.

나소믈리며 횟돌아

후대의 아손(兒孫)은 또 어느 곳을 향하여 나아 걸으리오


진퇴(進退)와 순환(循環)을 이렇게 새겼다. 15세기 우리 말투가 이랬다. 진보(進步)는 ‘나아 걷다’라고 새긴다. 역사는 조금씩이라도 진보한다고들 한다. 앞으로 갈까, 뒤로 갈까? 우리 말투만 생각한다면, 15세기로 횟돌아 가는 편이 옳지 않을까? 거기서부터 다시 나아 걷는다면 어떨까?

사람은 이제 제 동의에 의해서만 다스려져야 한다. ‘자기결정’은 빈 말이 아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행동의 원칙이다.


1918년 1월, 미국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Wilson)의 연설문이다. 평화를 위한 14조 연설이라고 한다. 사람과 나라의 ‘자기결정’, 우리는 ‘민족자결주의’라고 부른다. 1919년 3월 1일, 우리의 기미독립선언서, 자주(自主)와 자유(自由), 자존(自存)의 바른 권리를 주장한다. 하늘의 명령이고 시대의 대세이며 모든인류가 공존하고 동생(同生)하는 정당한 권리라고 선언한다. 자결(自決), 자기결정, 이런 말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맞닥치는 사이에서 나왔다. 간섭이란 말도 그 사이에서 나왔다. 자결과 간섭은 짝이 되었다. 이 말도 물론 서구의 말을 한문으로 번역한 말이다. 셀프-<디터미네이션(Self-determition)과 인터피어런스(Interference)의 짝은 자결과 간섭의 짝이 되었다.

물론 간섭이 먼저 있었다. 힘센 나라가 힘없는 나라에 간섭한다. 무력으로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는다. 힘센 나라들끼리는 간섭으로 경쟁을 한다. 식민지 경쟁이 세계 전쟁으로 커진다. 세계가 온통 불바다에 피바다에, 헤아릴 수도 없는 생명이 부질없이 스러진다. 간섭은 과연 무섭다. 간섭은 그래서 자유와 자결의 짝이 되었다. 힘없고 조그만 식민지, 우리도 전쟁을 치렀다. 전쟁터에서 숱한 사람이 죽었다. 간섭과 자결, 남의 일이 아니다. 그만큼 간절하다. 간섭이란 말, 그래서 두렵다. 함부로 하다가는 그르 알기 쉽다. 그렇다면 다툼이 일 수 있다. 부질없는 아롬이고, 속절없는 다툼이다.

죽이며 살림을 쥬변하시는 손을 보라.


죽이고 살리고 살활(殺活)의 짝이다. 죽이고 살리는 짓과 일의 짝이다. 내가 하는 간섭, 상대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쥬변은 물론 자유(自由)이다. 수단(<手段)을 그냥 ‘손’이라고 새겼다.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나 수완’이다. <내 손이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언해불전의 우리말투, 간섭은 ‘붙다’이다. 간섭에는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이 없다. 붙는 자리에서 손이 낀다. 수가 난다. 좋고 나쁜 것은 손이나 수다. 이걸 구태여 가리고 따지는 까닭은 우리의 삶이 간섭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붙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붙는 사이에서 죽음과 삶, 죽임과 살림이 갈려나기 때문이다.

붙는 일에는 상대가 있다. 붙을 자리, 붙을 얼굴이 있어야 한다. 붙는 자와 붙는 자리, 사는 수와 죽는 수가 서로 다를 수 있다. 아기의 볼을 꼬집는 할머니, 이유야 어떻건 아기 탓을 할 수는 없다. 아기가 아무리 예쁘다지만, 간섭을 시작한 건 어쨌건 할머니이다. 붙어서 일어 나는 일, 서로 좋고, 서로 나쁘다면 어려울 게 없다. 아기가 울면 얼른 손을 떼면 된다. 아기가 웃으면 마주 웃어 주면 된다. 서로 좋으면 딱 붙으면 된다. 서로 나쁘다면 얼른 떨어지면 된다. 누구는 좋고 누구는 나쁘다면 이게 문제다. 그럴 때 부당한 간섭, 나쁜 참견이 된다. 브터니닷, 이 말은 본래 평등한데 평등하지 않은 까닭, 본래 자유인데 자유롭지 못한 까닭을 가리고 따지는 손이다. 방법이고 수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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