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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22_01 세계의 그친 슻

증도가 현각의 노래

손(損)과 익(益)이 없으니


다시 어찌 의심(疑心)하리오

불조(佛祖)도 예부터 옴에, 자기가 알지 못하시니라

남북동서(南北東西)에, 그친 슻이 없거늘

조과(鳥窠)가 속절없이, 베의 터럭 잡아 부니라

영가의 노래와 남명의 노래, 이어 부른다지만 다른 사람의 다른 노래이다. 사람도 다르고 노래도 다르다. 말로 부르는 노래, 말투도 다르다. 언해의 풀이를 보면 그 다름이 뚜렷이 보인다. 언해를 새기고 풀이한 이들도 그 다름을 번득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름의 거리가 제법 멀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언해의 새김이 줄타기 같다는 느낌도 든다. 이 구절도 그렇다. 듣기에 따라서는 아주 다른 노래가 되기도 한다. 거리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다름의 거리, 대충 얼버무리는 이들도 많이 봤다. 부처와 조사의 일이라지만, 오래 전 큰 스님들의 노래라지만, 다른 것은 다른 거다. 얼버무릴 일이 아니다.

언해는 이런 거리를 솜씨 좋게 끌어 간다. 이런 솜씨도 쉽지 못한 솜씨다. 이런 솜씨도 말솜씨다. 언해불전의 말투에는 이런 솜씨들도 담겨 있다. 자잘한 다름이야 슬쩍 넘어간다. 예를 들어『증도가사실』의 풀이, 이전의 풀이들을 참고했다지만, 슬쩍 슬쩍 넘어간다. 풀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고집(固執)이란 말이 있다. '굳이 잡아'라고 새긴다. 꼭 짚어야 할 다름이라면 '굳이 잡아' 타고 가른다. 꼭 잡고 놓치지 않지만 '노릇의 말씀'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이런 말솜씨, 솜씨라 부르기엔 그냥 아깝다.

죄(罪)와 복(福)이 없으며

망(妄)과 진(眞)을 버리니


손(損)과 익(益)이 없으니

다시 어찌 의심(疑心)하리오


남명의 노래, 죄와 복은 망과 진으로 노래한다. 그러나 손과 익은 구태여 타서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언해는 이 구절을 '기리다'와 '헐다'로 나누어 풀이한다. 하늘이 기린다면 익(益), 더함이다. 마왕과 외도들이 헐뜯는다면 그건 손(損), 덞이다. '기룜'도 없고, '허롬'도 없다. 남명은 '이제'와 '본래' 사이에서 '처음 신(信)호라'라고 노래했다. 여기서는 '다시 어찌 의심하리오'라고 한다. 믿음과 의심, 뜬금없다는 느낌도 들지만, 어쨌건 남명의 스타일, 남명의 투이다. 그런데 '의심하리오?'라고 묻지만, 대뜸 '부처와 조사도 알지 못한다'로 넘어간다. 이게 말이 되나? 부처도 모른다는 일, 뭘 믿으라는 거지? 구태여 타고 가리자면 말이야 되기는 한다. 그래도 '구태여'라는 말, 억지라는 뜻이다. 맛깔스런 노래에 구태여의 억지, 남의 노래까지 맛을 버린다. 남명도 그걸 안다. 그래서 '속절없이 뵛터럭 잡아 부니라', 옛날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새처럼 살던 조과(鳥窠) 이야기, 재미는 있다. 그런데 언해는 그 사이에 '향상(向上)'이란 말을 툭 던져 넣는다. 쉽지 못한 언해의 말투다.

남북동서(南北東西)에 무간단(無間斷)커늘

남북동서(南北東西)에 그친 슻이 없거늘


간단(間斷)을 '그친 슻'이라고 새긴다. ''은 '사이'의 옛말이다. 나는 이 새김이 좋다. 남북동서,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간은 '허공의 슻'이다. 언해불전의 열쇠말 가운데, '올마흘롬'이란 말이 있다. '옮아 흐름'이다. 세(世)는 시간이다. 이건 '끠의 슻'이다. 끠도 옮아 흐르고, 우리의 생각이나 사랑도 옮아 흐른다. 옮아 흐름에는 슻이 없다. 이건 언해의 열쇠말이기도 하지만, 제행무상 불교의 열쇠말이기도 하다. 시간과 공간, 불교에서는 '세계'라고 부른다. 언해의 세계에는 '슻'이 없다. 그런데 사람의 의식은 없는 슻에서 슻을 가린다. 의식의 믿얼굴, 그 본질은 슻이다. 허공에도 을 긋고, 옮아 흐름에도 금을 긋는다. 금을 그으면 슻이 생긴다. 점심(點心), 마음에 점을 찍는다. 지나간 마음, 이제의 마음, 아니 온 마음, 흐르는 마음에 점을 찍는다. 이게 의식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묻는다. 점심? 어디에 점을 찍는데?

불조(佛祖)도 예부터 옴에, 자기가 알지 못하시니라


이런 말도 선사들이 즐겨 쓰던 말이다. 부처와 조사도 모르는 일이 있단다. 그런데 끠와 데, 시간과 공간에 '슻이 없음', 알고 보면 뭐 대단한 일도 아니다. 나도 아는 일, 불조가 모르실 리가 없다. 그래서 남명의 노래, '때로는 뜬금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향상(向上), 언해의 풀이가 절묘하다. 다른 사람의 다른 노래, 사람의 슻과 노래의 슻을 타고 가리는 언해의 솜씨가 놀랍다. 이건 알고 모르고, 아롬과 모롬의 슻이다. 불조의 노래, 브즐우즐 얼버무리는 이들의 슻이다.

정명대지(正明大智)로 상구보리(上求菩提)하샤 대전(對前)의 대비(大悲) 로 하화중생(下化衆生)하시니라.


정(正)히 대지(大智)로 위의 보리를 구하심을 밝히어, 앞의 대비(大悲)로 아래 중생(衆生) 화(化)하심을 대(對)하시니라.


『원각경언해』의 구절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불교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보리를 위라고 한다. 중생은 아래라고 한다. 위를 바라 보면 향상이다. 반대로 아래를 바라 보면 향하이다. 향상과 향하, 이 것도 흔히 쓰는 말이다. 언해는 이 말을 작대(作對)와 향대(向對)로 새긴다. 언해의 이분법, 짝을 가르는 까닭은 본래 짝이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의 말이나 사랑, 금을 긋지 않으면 세울 수도 없다. 짝을 가르는 일은 차이, 다름을 나토기 위해서이다. 다름을 나토는 까닭은 다름을 서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그은 금, 다름에도 슻이 없다. 짝을 향하게 하면 다름은 중간구에서 만나게 마련이다. 향상과 향하, 짝을 다루는 방법이다. 그대를 향하여 노래를 부른다. 남명은 그대가 되어 영가의 노래를 향한다. 때로는 다시 그대를 향하여 제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처음 믿으라'고 한다. 그대라고 다 모르나? 영가의 노래도, 남명의 노래도 방향에 달렸다. 방향을 놓치면 짝도 없고 노래도 없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경치도 바뀌기 때문이다.

위의 한 길은 천성(千聖)도 전하지 않거늘,

배울이 들의 잇븐 꼴이, 납이가 그르메 잡듯 하니라.


『선문염송』의 구절이다. 향상, 보통은 '위를 향하여'라고 읽는다. 그런데 언해의 말투는 좀 다르다. '부처의 향상', 언해는 그냥 '위'라고 새긴다. 부처에게도 조사에게도 '위의 일'이 있다. 향상일로(向上一路), 즈믄의 성인, 부처도 조사도 전하지 않는다. '전하지 못한다'고 새기는 이들도 있다. 그게 그거다. 알지도 못한다는데 전할 일이 있을까? 바라보지도 않는다는 데 알 리가 있을까? 이런 향상은 작대의 향상이 아니다. 향대의 향상도 아니다. 오직 위, 여기엔 아래가 없다. 한길로 위만 바라 본다면, 짝일리가 없다. 그런데 이걸 '절대(絶對)'라고 읽는 이들이 있다. '절대의 깨달음', 또는 '절대의 경지', 이런 저런 말을 쓴다. 이런 이름을 걸고 학파를 세우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건 대(對)가 아니다. 대가 아니기 때문에 '대 그친'도 아니다. 이건 그냥 절(絶)이다. 이럴 때 언해불전은 이 글자를 '높다'고 새긴다. 그냥 위이고, 그냥 높다이다. 이 말은 아래나 낮다의 짝도 아니다. 이럴 때 언해불전은 '철저'라는 말을 쓴다. '사뭇 위'이고 '사뭇 높음'이다. '맏 위'이고 맏 높음'이다. 부처와 조사에게도 위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위를 보지 않는다. 몸을 돌리지도 않고 향하지도 않으니 향상이 아니다. 보지 않으니 알리도 없다. 불(佛)이른 글자, 언해는 각(覺)이라고 읽고, '아롬'이라고 새긴다. 부처는 '아는 이'이다. 아는 이도 모르는 일, 이것도 아는 이의 가르침이란다. 언해의 풀이가 이렇다.

구울어 횟도는 죽살이의 바랄에, 나고자 할진댄

모로매 북두(北斗)를 좇아, 남성(南星)을 바랄지어다


위를 보고자 한다면 위를 좇아 아래를 보라고 한다. 영가의 노래, 남명의 노래, 그리고 언해의 노래, 이런 게 짝을 읽는 방법이다. 사뭇 위, 사뭇 아래, 이런 일이 붙을 자리가 없다. 몸으로 하지 않는 일, 저런 말투는 순전히 관념의 일이다. 위 아래를 사뭇 '슻'으로 가리는 말투이다. 언해의 절대는 서로 향하는 사이에 있다. 향하지도 않는데 알리도 없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