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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32_01 도적의 공부

증도가 현각의 노래

사대(四大)를 놓아,

잡들지 말리니,


마음이 평(平)하면, 어찌 잇비 계를 지니며,

마음이 바르면, 무슨 선(善)을 닦으료.


이 마디의 한쪽 날개, 놓으라고 한다. 파착(把捉), 잡을 파, 잡을 착, 언해는 '잡들다'라고 새긴다. 잽싸게 잡고, 꽉 잡는 일이다. 놓고, 다시는 잡들지 말고, 한마디면 될 말을 다시곰한다. 강조의 말투이다. 언해불전은 '받당기다', 또는 '붙당기다'는 말을 쓴다. 반연(攀緣)이란 말을 이렇게 새긴다. 반(攀)이란 글자, 암벽등반을 한다면 손가락 몇 개에 제 몸을 실어야 한다. 깍아지른 빙애, 제 손가락에 제 목숨이 걸렸다. 그만큼 붙당기고 잡들어야 한다. '원초적 본능'이란 영화도 있다지만, 받당기다, 또는 잡들다, 생명이 지닌 본능이라고들 한다. 내 마음이 하는 일, 또는 내 몸이 하는 일, 언해불전은 '받당기다', 또는 '잡들다'는 말로부터 시작한다. 스톱! 그런데 그 짓, 다 그만 두라고 한다.

'마음이 평(平)하면', 그리고 '마음이 바르면', 이 구절도 육조(六祖)의 말씀,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의 구절이다. 앞에서 했던 이야기, 함허는 감공형평(鑑空衡平)이란 말을 쓴다. 그리고 언해는 '거울이 비며, 저울이 평(平)함'이라고 새긴다. '놓고 잡들지 말고', 언해는 이런 일을 '평(平)함'이라고 풀이한다. '평(平)'이란 글자, 언해는 구태여 새기지 않는다. 평평하다는 말이다. '마음이 평평하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함허의 '거울이 비며, 저울이 평함', 나는 이 말을 들으면 얼른 눈 가리고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을 떠올린다. 동서양이 다르다지만, 다 사람 사는 곳이다. 몸과 마음이 하는 짓은 닮았다. 거울과 저울, 이런 말투도 똑 닮았다. 그래서 육조는 '사람에는 남북이 있다지만, 법은 한가지'라고 한다. 육조의 이 말은 빈말이 아니다.

육조는 남방의 오랑캐였다. 그의 스승 오조홍인은 만나자 마자 '남방 오랑캐에게는 불성이 없다던데', 어린 행자를 놀려 먹었다. 정말 못됐다. 이런 물음은 법문이 아니다. 가르침도 아니다. '여자의 몸은 더러우니', 어린 용녀를 놀려 먹던 사리불도 떠오른다. 어린 듣보잡, 흙수저 개돼지를 놀려 먹는 갑질이고, 왕따이다. 저 어린 행자들은 날 때부터 갑질과 왕따를 겪으며 살아 남아야 했다. 신수의 제자들은 아예 남방 듣보잡을 잡아 죽이려 들었다. 그래도 육조는 살아 남았다. 조계의 구절도 그래서 나올 수 있었다. 갑질과 왕따야 말로 조계의 열쇠말이다. 육조가 주는 살혬이다.

저울과 거울, 비유이다. 까다로운 가잘빔이 아니다. 개돼지도 늘 하는 일이다. 거울과 저울, 한끼니라도 때우려면 늘 써야 하는 그릇이다. 몸이 튼튼하다면 달리 배우고 공부하지 않아도 제 밥은 제가 찾아 먹는다. 그런데 선종의 큰스님들도 갑질과 왕따를 놓는다. 그런 걸 방편이라고 부른다. 도리어 차별을 가르친다. 어린 개돼지들, 이건 차별의 노예가 되던지, 그냥 굶어 죽으란 소리이다. 평평하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다. 그런 계율, 그런 선(善)을 제 돈을 들이고, 제 밥을 걸고 배우라고 한다. 열심히 공부하라고 한다. 잡들지 마라, 그래서 하는 소리이다. 영가의 『증도가』, 언해의 풀이는 훤하다. 번득하다. 그런 공부라면 거짓말이다. 거짓말을 한다면 부처도 아니고 스승도 아니다. 도적의 소리일 뿐이다.

사대(四大)를 놓다 함은

몸과 마음이 본래 빈 줄을 사뭇 알아

연(緣)을 좇아 임운(任運)하야 가림없이 자재할시라.


하마 몸과 마음이 본래 빈줄 알면,

명상(名相)이 있지 아니하리니,

어느 곳을 향하여 잡들리오.


'사대(四大)를 놓아, 잡들지 말리니', 언해는 똑 같은 풀이를 다시곰한다. 몸과 마음이 본래 빈줄 알면, 이게 이 구절의 한 날개이다. 염라대왕만 거울을 가진 게 아니다. 여신만이 저울을 가진 것도 아니다. 몸을 가졌다면 거울도 하마 가진 것이다. 저울도 하마 가졌다. 염라대왕과 여신을 구태여 가리는 까닭은, '비우고 평평하게 함'을 가리키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의 비움과 평평함을 따라 하라는 뜻이다. 나의 거울도 가림이 없어야 비출 수 있다. 나의 저울도 평평하게 해야 달 수 있다. 그런 걸 누가 모르나. 그래도 그런 소리를 다시곰 거듭한다. 으레 받당기고 잡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운을 따르라'고 한다. 거울에 비치는 대로, 저울에 다는 대로, 받당기지도 말고 잡들지도 말라고 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염라대왕도 여신도 따로 없다. 육조의 말이 빈말이 아니듯, 영가와 언해의 말도 빈말이 아니다. 갑질하고 왕따 놓는 거울과 저울, 그런 데 홀릴 것 없다. 도적의 말이고 도적의 그릇이고, 도적의 공부이다. 내가 본래 가진 거울과 저울, 그걸 처음 믿으라고 한다. 여기에 우리 모두의 살혬이 걸렸다. 이게 우리의 본능이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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