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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04_01 망상이 뭐길래

증도가 현각의 노래

망상(妄想) 덜지 않으며, 진(眞) 구하지 않나니

진(眞)과 망(妄)이 다, 거울 속의 듣글 같으니라


이제 진(眞)과 망(妄)의 대구를 다룬다. 망(妄)이라는 글자, 언해불전은 '거츨다'라고 새긴다. 잊혀진 옛말이다. 국어사전은 '허망하다', '망령되다'라고 풀이한다. 망(妄)은 '거츨다'이고, '거츨다'는 망(妄)이다. 망(妄)이라는 글자의 뜻을 모르면, '거츨다'의 뜻도 알 수 없다. 언해불전은 이 글자, '거짓'이라고도 새긴다. 진망(眞妄)의 대구, 진실과 거짓의 대구이다. 이건 쉽다. 그러니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자.

진실이란 말은 다시 진(眞)과 실(實)의 대구이다. 진(眞)은 요즘 말로 치자면 '진짜와 가짜'의 한 짝이다. 이에 비해 실(實)은 허(虛)와 실(實)의 한 짝이다. 예를 들어 땅콩이나 호두의 껍데기를 깠다. 속이 비었다면 '허(虛)'이다. 속이 찼다면 실(實)이다. 허와 실,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얼굴대가리의 대구이다. 대가리 속에 얼굴이 찼다면, 실이다. 대가리 속에 얼굴이 비었다면, 이건 허이다. 땅콩 대가리 속에 콩의 얼굴이 들었다면, 이건 땅콩의 '진짜 얼굴'이다. 땅콩 대가리 속에 벌레만 찼다면 이건 땅콩의 '가짜 얼굴'이다. 대가리 속에 진짜의 얼굴이 담겼다면 이게 '진실'이다. 진짜이면서 실하다.

진실의 땅콩과 거짓의 땅콩, 이것도 진(眞)과 망(妄)의 대구이다. 여기서는 땅콩이 아니라, 상(想)이란 글자를 다룬다. 진실의 상(想)과 거짓의 상(想)이다. 저 노래의 저 구절, 거짓의 상을 덜지도 않고, 진실의 상을 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상(想)이란 글자는 또 뭘까? 국어사전은 '생각'이라고 풀이한다. 망상(妄想)은 '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된 생각을 함. 또는 그 생각.'이다. 거짓의 생각, 이치에 맞지 아니한 생각, 망령된 생각, 이런 건 덜어야 하는 것 아닌가? 헷갈릴 수 밖에 없다.

이 어떤 낯인고

너겨 의론(議論)하며 사량(思量)하면, 어지러운 뫼에 가리리라


앞의 구절로 돌아 가 보자. '의의사량(擬議思量)', 언해불전에 자주 나오는 말이다. 네 개의 한자, 네 가지 서로 다른 일을 가리킨다. 의(擬)란 글자를 '너기다'라고 새긴다. '너기다'는 '여기다'의 옛말이란다. 사전을 찾아 보면 '여기다'는 다시 '마음 속으로 그러하다고 생각하다', 또는 '주의깊게 생각하다'라고 한다. 망상은 '망령된 생각'이고, 의(擬)와 '너기다'도 '생각하다'라고 한다. 사전의 풀이를 따라 노래를 읽다 보면, 점점 더 헷갈린다. 아예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인가? 언해불전의 우리말투와 요즘의 우리말투, 이런 자리에서 갈리기 시작한다. 뜻은 커녕, 말투가 다르다. 달라진 말투, 그 차이를 모르면 이 노래를 부르기 어렵다.

기러기는 새북(塞北)에 낢을 사랑하고

제비는 옛 깃에 돌아옴을 생각하놋다


기러기는 사랑하고, 제비는 생각한다. 사(思)는 '사랑하다'라고 새긴다. 이에 비해 억(憶)은 '생각하다'라고 새긴다. 사유와 기억의 차이이다. 이런 말투, 이제는 없다. '사랑하다'라는 말, 이제는 연(戀)이나 애(愛)를 가리킨다. '사랑하다'라는 말이 품고 있던 뜻, 이제는 모두 '생각하다'로 옮겨 왔다. '사랑하다'는 말, 사량(思量)에서 왔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언해불전에서도 비슷한 말로 섞어 쓰기도 한다. 하지만 사(思)와 양(量)은 다른 말이다. 그래서 언해불전에서는 '사랑하여 헤아려'라고 가려 새기기도 한다. '헤아리다'라는 말은 '혜다'에서 왔다. 숫자를 '세다'라는 뜻이다. 양(量)은 물건의 양, 많고 적음을 가리는 말이다. 헤아림은 많고 적음, 또는 그 같고 다름을 세고 혜는 일이다. 언해불전은 글의 흐름에 따라 '사랑하다'는 우리말을 쓰기도 하지만, 사량(思量)이란 한자말을 쓰기도 한다. 이럴 때의 사량(思量)은 사(思)보다는 양(量), 헤아림에 무게가 실린다. '너기다'라는 말은 조금 더 까다롭다. '헤아리다', '비기다', '견주다', '벼르다', 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새긴다. 말이 달라지는 것은 나토려고 하는 일과 일의 뜻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이 모든 일이 다 '사랑하다'이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 마음이 하는 모든 일이 '사랑'이다. 그 안에는 생각도 있고, 헤아림도 있다. 비김도 있고 견줌도 있다. 다 다른 일이다. 언해불전은 이런 다른 일을, 다른 말로 가려 새기고, 가려 나톤다. 요즘의 우리말투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정교하다. 제 생각, 제 사랑을 잘 보고 살피는, 관찰의 기술이다.

의의사량(擬議思量), 생각이건 사랑이건, 이런 일에도 순서가 있다. 예를 들어 '너기다'는 '헤아리다'의 앞에 있다. '헤아리다'는 '너기다'의 결과를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이런 일은 '느낌'이다. '너기다'는 '느낌'의 결과를 대상으로 삼는다. 비기고, 견주고, 벼르고, 그런 일이 이어진다. 같고 다름을 가리는 일이다. 이 가림을 거쳐 같고 다름의 상(相)이 만들어 진다. 요즘 말로 치자면 고정관념이다. '헤아리다'는 고정된 상(相)을 대상으로 삼는다. 여러 상(相)을 세고 혠다. 요즘 우리가 '논리적', 또는 '합리적' 사유라고 부르는 일이다. 의의사량(擬議思量)은 '너기다'를 거쳐, '따지다'로, 그리고 너기고 따진 것들을 헤아리는 일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런 일을 뭉뚱그려 '사랑하다'라고 부른다. '논리적'이라고 하지만, 이런 사유, 이런 사랑이 언제나 순서대로 올올이 이어지지는 않는다. 여러 일이 섞이면서 움직인다.

의의사량(擬議思量),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이 말은 '사랑의 ABCD'처럼 쓰인다. 이 말에 견주어 제 '사랑'을 다시 관찰하라는 말이다. 다시 잘 보고, 잘 살피라는 조언이다. 의의사량(擬議思量)의 사이에 뭔가 빠진다. 뭔가 끼어든다. 뭔가 뒤집힌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같고 다름이 정해진다. 분별의 상(相)이다. 나름 순서를 지킨 것 같지만 뭔가 엉성하다. 그 결과가 망상이 되기도 하고, 진상이 되기도 한다. 의의사량(擬議思量)은 '그른 아롬'의 원인이다. 망상이 그릇됐다고 하여 그릇된 것을 피하거나 고칠 수도 없다. 망상을 덜고자 하는 일이 '거츤 사랑'이듯, 망상과는 다른 진짜 사랑을 구하는 일도 '거츤 사랑'이 된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가? 겨르롭고 게으른 도인, 그래서 하는 소리이다. 그대여, 불러 보라고 한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