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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32_02 말씨와 솜씨

증도가 현각의 노래

잡들지 말리니,


전전(翦翦)하며 규규(規規)하면, 큰 착(錯)이 일리라.

심의(心意)를 가져, 수행(修行) 배우고자 하린댄,

큰 허공(虛空)에 어찌 능히, 머리와 뿔 나리오.


사대를 놓아, 잡들지 말지니, 영가의 말투는 짧다. 영가가 한 마디 부르면, 남명은 세 마디를 이어 부른다. 그의 별명이 만권(萬卷)이었단다. 만권의 말문이 툭툭 터진다. '전전(翦翦)하며 규규(規規)하면'은 『장자(莊子)』의 말투이다. '심의(心意)와 수행(修行)'은 불교 학자들의 말투이다. '허공(虛空)에 두각(頭角)'은 선사들의 말투이다. 남명의 노래, 구절마다 마디마다 말투가 바뀐다. 만권의 말솜씨, 요즘엔 '현란(絢爛)하다'는 말을 쓴다. '무늬가 빛나다'는 말이다. 그런데 난(爛)이란 글자, '므르다'라고 새기기도 한다. '무르익다'는 '무르다'와 '익다'를 합한 말이다. 꽃이든 열매든, 익을수록 빛나지만, 익을수록 물러진다. 만권의 말솜씨, 빛이야 날지 모르겠지만, 뜻도 자꾸 물러진다. 물러지면 떨어진다. 떨어지면 썪는다.

남명의 말솜씨, '솜씨'는 '손'과 '쓰다'를 합하여 나온 말이다. 손을 쓰는 모습이다. '말씨'는 '말을 쓰는' 모습이다. 손이나 말, 날랜 이도 있지만 무딘 이도 있다. 날랜 말, 날랜 손, 듣기 좋다. 보기 좋다. 빛날 수도 있고, 그래서 부러울 수도 있다. 따라 배울 수도 있고, 열심히 익힐 수도 있다. 이런 일에도 물론 공이 든다. 공부라고 부른다. 솜씨나 말씨, 공을 들일수록 물러진다.

하마 몸과 마음이 본래 빈줄 알면,

명상(名相)이 있지 아니하리니, 어느 곳을 향하여 잡들리오?

그럴새 이르시되 잡들지 말라 하시니라.


어느 곳을 향하여 잡들리오? 남명의 말씨, 또는 그 솜씨가 거슬렸을까, 언해는 문득 되묻는다. 명상(名相), 이름과 이름에 담긴 뜻이다. 이름은 그릇이다. 이름을 부르면 뜻이 따라 온다. 이름을 들으면 따라온 뜻에 받당긴다. 비비고 버믄다. 뜻에 붙어 상(相)이 인다. 언해는 이런 일을 '잡들다'라고 풀이한다.

그대는 아니 보난다

이 어떤 낯인고

여겨 따지고 사량(思量)하면, 어지러운 뫼에 가리리


언해는 명상(名相)을 '이름과 얼굴'이라고 새긴다. 이름에 담긴 뜻이 이름의 본질이다. 언해는 너기다라는 말을 쓴다. 이름과 얼굴에 반연하는, 받당기고 붙당기는 일이다. 너기고 따지고 사량(思量)하고, 받당기면 브터니고 브터난다. 그 사이에서 뭔가 어그러진다. 남명은 '큰 착(錯)'이라고 부른다. '본래 빈줄', 언해의 열쇠말이다. '있고'와 '없고', 짝의 말투로 읽어야 한다. 이름이 있다면 얼굴이 있다. 빈 몸의 빈 마음이 이름을 듣는다면 어떨까? 언해는 그렇게 되묻는다.

전전(翦翦)은 바사찬 양이오,

규규(規規)는 브즐우즐한 양이니,


바사차며 브즐우즐하여,

명상(名相)에 다니며, 지말(枝末)에 다니면,

큰 도(道)의 오아롬을 알지 못하릴새 이르시되,


전전규규(翦翦規規)하면 대착(大錯)이 일리라 하시니라.


'전전(翦翦)하며 규규(規規)하면', 『장자(莊子)』의 말투, 언해는 『증도가사실』의 풀이를 따라 새긴다. '전전(翦翦)', 가위 두개가 붙었다. 영화 가위손이 떠오른다. 『증도가사실』은 파쇄(破碎)라고 읽는다. 언해는 이 말을 '바사차다'라고 새긴다. 파쇄기, 문서도 갈아 버리고, 나무나 돌멩이도 부숴버린다. 자르고 또 자르고, 부수고 또 부수고, 그래서 자잘해지는 모습이다. '바사찬 사람'은 어떨까? 자잘해지면 쩨쩨해진다. 쩨쩨한 사람은 자잘한 것에 딱 붙는다. 그래서 다른 일, 남의 일에는 눈조차 두지 않는다. 쩨쩨한 사람은 냉정하다. 차갑다. 이런 모습이 '바사찬 양'이다. 이에 비해 규규(規規), 『증도가사실』은 자실(自失)로 읽는다. 언해는 이 말을 '브즐우즐'이라고 새긴다. 자실(自失)이란 말, 언해는 '제 잃음'이나, '제 그름'이라고 새기기도 한다.

붙을 데 없어 제 잃은 곳이라.


『능엄경언해』의 구절이다. 부처는 대중 앞에 선 아난에게 묻는다. 묻고 대답하고, 부처는 말끝마다 그릇되다고 한다. 아난은 말문이 막힌다. 거의(據依), 요즘에는 의거(依據)라는 말을 쓴다. 언해는 '붙다'로 새긴다. 더 이상 붙을 데가 없어서 말문이 딱 막힌 모습이다. 남명은 이런 모습을 부평초에 가잘비기도 한다. 뿌리는 있어도 붙을 데가 없다. 부평초 신세를 '불려 가며 잠겨 옴'이라고 노래한다. 바람에 불려가고 물에 잠겨 온다. 이런 모습이 '제 잃은 양'이고, '브즐우즐한 양'이다.

사대(四大)를 놓다 함은

몸과 마음이 본래 빈 줄을 사뭇 알아

연(緣)을 좇아 임운(任運)하야 가림없이 자재할시라.


하마 몸과 마음이 본래 빈줄 알면,

명상(名相)이 있지 아니하리니,

어느 곳을 향하여 잡들리오.


'연(緣)을 좇아 임운(任運)하야', 앞에서 했던 이야기이다. 임운(任運)은 '운에 맡겨'라는 뜻이다. 이게 좀 헷갈린다. '불려 가며 잠겨 옴', 붙을 데 없는 부평초 신세, 이것도 임운, '운을 따라 운에 맡겨'이다. 붙을 데 없어 브즐우즐. 제 잃고 넋도 나가고, 말문도 막힌 신세, 탓하는 듯 싶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어느 곳을 향하여 잡들리오?', 잡들 것 없다고 한다. 브즐우즐, 붙을 데 없으면 제 잃고 넋이 나가는 이들도 있지만, '가림없이 자재한' 이들도 있다. 이것도 모순의 말투이다.

언해의 풀이, '명상(名相)에 다니며, 지말(枝末)에 다니면', 이건 바사차고 브즐우즐한 모습이다. 언해는 이 모습에 '큰 도(道)의 오아롬'을 짝으로 맞춘다. 짝의 말투이다. 전(全)이란 글자를 '오아롬'이라고 새긴다. 둥근 달의 완전함이다. 이건 부분과 전체의 짝이다. 근본(根本)과 지말(枝末)의 짝도 있다. 뿌리와 가지의 짝이다. 바사차고 브즐우즐한 양, 짝의 말투로 읽어야 한다. 짝의 사이에 '하마 몸과 마음이 본래 빈줄 알면', '알다'가 있다.

잡들지 말리니, 영가의 한마디는 뻔하다. 남명은 이 한마디에 만권의 솜씨를 쓴다. 이게 참 고약하다. 공부 못하는 사람, 넋을 쏙 빼놓는다. 영가의 말씨와 남명의 솜씨 사이에 언해의 풀이와 새김이 걸렸다. 이걸 어째야 하나? 바사차고 브즐하게 만드는 솜씨, 이걸 풀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언해의 풀이와 새김은 말씨와 솜씨에 달렸다. 그래서 나는 '말투'라는 말에 붙는다. 말씨와 솜씨, 날래고 그래서 빛나고, 좋은 것만도 아니다. 날래면 물러진다. 물러지면 썪는다. 헷갈리는 말씨와 솜씨는 사람을 도리어 바사차고 브즐우즐하게 만든다. 말문이 막히고 넋을 놓게 만든다. 이런 말씨도 도적의 말씨가 된다. 그래도 나는 '바사차다', '브즐우즐하다', 이런 말이 참 좋다. 이런 말이 잊혀진다는 게 너무 아깝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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