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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35_01 부처 사용법

증도가 현각의 노래

제행(諸行)이 덛덛함이 없어 일체(一切) 비니,

곧 이 여래(如來)의 대원각(大圓覺)이니,


여러 옮아 흐름이 덛덛함이 없어, 모두 비니,

곧 이 여래의 크고 두려운 아롬이니,


'옮아 흐름'과, '덛덛함이 없음'과 '빔', 다 같은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뜻을 '크고 두려운 아롬'이라고 한다. 원(圓)을 '두렵다'라고 새긴다. 요즘엔 주로 '원만하다'는 말로 풀이한다. 언해불전은 '두려이 가득하다'고 새긴다. 이럴 때 흔히 달을 가리킨다. 보름달은 두렵다. 두려우면 가득하다. 완전무결, 빠진 데가 하나도 없다.

'옮아 흐름'과, '덛덛함이 없음'과 '빔', 이게 곧 부처의 아롬이라고 한다. 즉시(卽是)를 '곧 이'라 새긴다. 부처의 아롬은 크다. 부처의 아롬은 두렵다. '크다' 또는 '두렵다'는 꾸밈말이다. 아롬을 꾸미는 말이다. 부처의 아롬에는 숱한 꾸밈말들이 따라 다닌다. 꾸밈말들은 부처의 아롬을 중생의 아롬, 나의 아롬과 가린다. 부처의 아롬에 놀란다. 부처의 아롬을 기린다.

언해불전에 『원각경언해』도 있다. 『원각경(圓覺經)』은 말 그대로 '두려운 아롬'을 다룬다. 『원각경』은 짧다. 그런데 『원각경언해』은 무척 길다. 『원각경약소』와 『원각경약소초』라는 두 가지 주석서를 함께 담고 있기 때문이다. 둘 다 당나라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이 지었다. 『원각경』 원문과 『원각경약소』는 완역을 한다. 어려운 말이나 까다로운 뜻은 다시 언문으로 풀이를 해준다. 언문으로 새기고, 풀이하고, 그래서 언해이다. 거기에 다시 훨씬 더 길고 자세한 『원각경약소초』가 붙는다. 경전과 두 가지 주석서, 그리고 언문 새김과 풀이, 복잡한 구조를 과문의 형식으로 편집했다.

얼굴 없으되 도리어 얼굴 겨시니,


길고 자세한 『원각경언해』, 15세기 우리말의 보고이다. '두려운 아롬'을 다룬다. 부처의 보름달, 이 가잘빔에는 두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두려움이다. 다른 하나는 '옮아 흐름'이다. 내 눈에 어리는 달, 쉬지 않고 옮아 흐른다. 영가는 '천진불'을 가리킨다. 함허는 '부처의 본성'이라고 읽는다. 그리고 본성과 상호(相好)를 마주 세운다. 보름달의 두려움은 말하자면, 달의 본성이다. 옮아 흐르는 달의 모습은 달의 상호이다. 달의 말투, 이거 하나만 새겨 두어도 죽살이가 쉬워진다.

본래의 근원 천진이 이아? 상호로 장엄한 몸이 이아?

한 몸에 두 가지 마음을 나누어 짓도다.


크고 두려운 부처의 아롬, 보름달의 말투이다. 천진한 부처도 있다지만, 옮아 흐르는 부처도 있다. 두려운 아롬이 있다면, 옮아 흐르는 아롬도 있다. 영가의 노래도 언해의 풀이도 『원각경』을 바라본다. '두려운 아롬', 『원각경』이 바탕이다. 두려운 아롬과 옮아 흐르는 아롬을 나란히 다룬다. 『원각경언해』야 무척 길다지만, 영가의 노래, 이 구절은 짧다. 그 대신 번득하다. 영가의 노래도, 언해의 풀이도 '두려운 아롬'을 싸고 돈다.

제법(諸法)이 본래(本來) 상녜 제 적멸(寂滅)하야,

다시 범부(凡夫) 고쳐 성인(聖人) 만들며,

망(妄)을 변(變)하야 진(眞)에 돌아 가는 뜻이 없으니,


언해의 풀이, '뫼는 이 뫼이오, 물은 이 물이라', 유명한 구절도 끼어 있다. 이 이야기는 좀 미뤄 두자. 제행을 제법이라 읽는다. 영가의 말은 '덛덛함'이라고 새겼다. 여기서는 '상녜'라고 풀이한다. '덛덛함'과 '상녜', 둘 다 '상(常)'이란 글자이다. 국어사전을 보면, 상녜를 상례(常例), '보통 있는 일'이라고 풀이한다. 언해불전은 우리말로 다룬다. '상(常)'이란 글자, 이 글자는 '옮아 흐름', '덛덛함이 없음', '빔', 이런 말의 반대말이다. 옮아 흐르지 않는 것, 덛덛한 것, 비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대(對) 그치며, 짝이 없어,

하며 적으며, 대(對) 기다린 말로 이름이 마땅하지 못하니,


다소(多少)를 '하며 적으며'라 새긴다. 반대말은 요즘에 쓰는 말이다. 언해불전은 대대(待對)란 말을 쓴다. '대(對) 기다림'이라 새긴다. 윤(倫)은 '짝'이라고 새긴다. '짝을 기다림'이다. '대(對) 기다림'과 '대(對) 그침'의 짝, 대대(待對)와 절대(絶對)의 짝이다. 제행이나 제법, '여러', 또는 '모든', 때로는 '대 기다림'으로 읽는다. 때로는 '대 그침'으로 읽는다. '무상(無常)과 상(常)', '덛덛함이 없음'과 상녜', 이것도 짝의 말투이다. 반대 또는 대대로 읽으면 모순의 말투가 된다. 모순의 말투, 쓸모도 있지만, '마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짝 기다림'과 '짝이 그침', 언해불전의 말투이다. 말씨 또는 솜씨, 방법이고 수단이다.

영가(永嘉) 이르되,


여러 행(行)이 덛덛함이 없어 일체(一切) 비니,

곧 이 여래의 대원각(大圓覺)이라 하니,


이는 오직 망(妄)을 모도와 진(眞)에 가는 뜻을 붙어 의론할 따름이니,

하다가 오직 이리 상량(商量)하린댄,

망(妄)을 버리고 진(眞)에 갈 길을 막을까 저어하노라,


하다가 망 버리고 진에 갈 뜻으로 의론할진댄,

중생의 약간 가지의 마음을 여래가 다 아시니,


『금강경삼가해』, 함허의 풀이는 다시곰 영가의 말로 돌아간다. '여래가 다 아시니', 함허는 영가의 말, '여래의 대원각(大圓覺)'을 이렇게 풀이한다. 원만한 아롬, '다 안다'고 읽는다. 부처가 아는 것은 중생의 마음이다. 『금강경』의 '약간종심(若干種心)'을 '약간 가지의 마음'이라 새긴다. 『금강경언해』에서는 그냥 '여러 마음'이라고 새긴다. 함허는 '여러'를 '옮아 흐름'으로 풀이한다. 초승달에서 보름달까지, 달의 상호는 여럿이다. 그 본성은 두려움이다. 『금강경』은 '지나간 마음, 나타 있는 마음, 아니왰는 마음'을 묻는다. 그런 게 약간 가지, 여러 마음이다. 중생의 옮아 흐르는 마음이다.

영가는 제행무상과 대원각을 마주 세운다. 짝의 말투, 함허는 이 짝을 '여러'와 '한'의 짝으로 읽는다. 『금강경』의 '마음'에 견주어 '여러 마음'과 '한 마음'의 짝으로 읽는다. 그리고 마음을 다시 '아롬'으로 풀이한다. '여러 아롬'과 '한 아롬'의 짝이다.

크고 두렷한 아롬, 부처의 아롬이다. 함허는 이를 다시 중생의 아롬과 마주 세운다. 그리고 다시 이 짝을 망(妄)과 진(眞)의 짝으로 풀이한다. 중생의 옮아 흐르는 여러 마음은 거짓 마음의 거츤 아롬이다. 이에 비해 부처의 두려운 한 마음은 진짜 마음이고 바른 아롬이다. 함허는 이 자리에서 슬쩍 새로운 기술을 건다. 솜씨를 부린다. 짝의 말투를 다루는 솜씨이다.

회망귀진(會妄歸眞)

망(妄)을 모도와 진(眞)에 가는 뜻


사망귀진(捨妄歸眞)

망(妄)을 버리고 진(眞)에 갈 길


이건 규봉종밀(圭峰宗密)의 말투이다. 『금강경삼가해』의 뿌리는 『금강경오가해』이다. 다섯 가지 주석서를 묶어 편집했다. 그 가운데 야보송(冶父頌)』과 『종경제강(宗鏡提綱)』, 그리고 함허의 『설의(說誼)』를 따로 추려 새기고 풀이한 책이 『금강경삼가해』이다. 다섯 가지 주석서 안에는 종밀이 지은 『금강경소론찬요(金剛經疏論纂要)』도 들어 있다. 저 말투는 바로 이 주석서의 말투이다.

요즘엔 귀납법이나 귀류법이란 말, 방법이 있다. 일반화라는 말도 있다. '여러 가지'를 추려 하나의 결론으로 끌어 가는 방법이다. '망(妄)을 모도와 진(眞)에 가는 뜻'은 이런 방법과 닮았다. 옮아 흐르는 여러 마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염(念)이 일어날 때마다 옮아 흐르는 브터니닷을 관찰한다. 함허는 상량(商量)이란 말을 쓴다. 장사꾼이 값을 매기듯, 따지고 가린다는 말이다. 제 마음을 가려 값을 매긴다. 의식이 하는 일이다. 그런 일을 모도아 진(眞)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 방법은 짝의 말투를 쓰는 방법이다. 부처와 중생, 열반과 생사, 상(常)과 무상(無常), 두 짝이 미리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이 방법은 모순의 말투, 변증법에 더 가깝다. 망(妄)과 진(眞) 사이에서 사랑하는 방법이다. 요즘 말투나 방법에 비기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도랑먹은 가히와 흙 묻은 돝은, 도리어 다 알어늘,

삼세여래(三世如來)는 곧, 아지 못하시니라.


얼굴 없는 부처도 있다지만, 얼굴 있는 부처도 있다. 다 아는 부처도 있다지만, 곧 모르는 부처도 있다. 짝의 말투, 부처와 중생은 짝의 양 극단이다. 크고 두렷한 부처의 아롬이라지만, 남의 아롬이라면 내 코가 석자다. 얼굴 없는 부처, 열반으로 가는 부처는 아무 것도 모른다. 개돼지에겐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다. 함허의 풀이는 그걸 가리킨다. 부처를 쓰는 방법이다. 부처의 아롬을 개돼지가 사용하는 수단이다.

모순의 말투, 짝의 말투, 대대의 말투, 절대의 말투, 말투도 많다지만 보름달의 말투, 나는 이 말이 더 좋다. 농부는 여러 달을 보면서 씨 뿌릴 때를 기다린다. 달의 옮아 흐름에서 계절의 덛덛함을 읽는다. 달의 덛덛함이다. 그리고 달의 덛덛함에 기대어 계절의 옮아 흐름을 기다린다. 달의 기대어 뿌릴 때 뿌리고, 거둘 때 거둔다.

함허의 풀이, 옮아 흐르는 여러 마음, 거츤 마음이고 거짓 마음이다. 함허는 '기이할셔'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부처가 중생의 죽살이를 바라본다. 그게 불교의 시작이다. 죽살이의 중생은 그런 부처를 바라 본다. 보름달의 부처, 크고 두렷한 부처의 아롬이다. 옮아 흐르는 달의 중생, 옮아 흐르는 여러 아롬이다. 부처가 우리를 보듯, 우리는 부처를 본다. 그 사이에 불교가 있다. 농부가 옮아 흐름에서 덛덛함을 보듯, 옮아 흐르는 여러 마음에서 덛덛한 아롬을 본다. 거츤 마음, 거짓 마음에서 두렷한 마음을 본다. 부처의 크고 두려운 아롬, 언해의 풀이는 함허의 풀이를 따라 보름달의 말투로 읽는다. 보름달과 여러 달이 따로 있지 않듯, 부처의 아롬과 중생의 아롬이 따로 있지 않다. 농부의 일, 달이 문제가 아니다. 뿌리고 거두면 살혬이 열린다. 중생의 일, 부처의 두렷한 아롬이 문제가 아니다. 거짓이 일면 거짓을 보고 거짓을 버린다. 모도아 보고 버리는 방법, 부처의 아롬은 이럴 때 쓰라고 세운 이름이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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