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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34_02 옮아 흐름과 덛덛함

증도가 현각의 노래

성(性)이 본래(本來) 한가지라 함은,

모든 연(緣)이 일락 없으락 하나, 그 성(性)은 한가지니,


일락 없으락 함이 곧 적멸(寂滅)이라,


연생(緣生) 버리고 무생(無生)을 구하면,

북으로 갈 사람이 동으로 감이 같아 외욤이 심하다는 뜻이라.


'일락 없으락'은 기멸(起滅)이다. 기멸이 곧 적멸이라고 한다. 기멸과 적멸의 짝이다. 언해는 이를 다시 연생(緣生)과 무생(無生)의 짝으로 읽는다. 그리고 이 짝은 행(行)과 상(常), '옮아 흐름'과 '덛덛함'의 짝으로 돌아간다. 이런 짝, 모두가 영가의 열쇠말이다. 이 노래의 열쇠말이다. '일락 없으락'과 '고요히 없음'의 짝, '브터나닷'과 '남 없음'의 짝, 그리고 '옮아 흐름'과 '덛덛함'의 짝, 언해는 이 노래의 열쇠말을 우리말로 새기고 풀이한다.

언해불전 밖에서는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새김이고 풀이이다. 우리 역사에 단 한번 밖에 없었던 일, 그래서 나는 '우리말투의 실험'이라고 부른다. 세종과 두 아들의 실험. 한번 밖에 없었던 실험, 그래서 이 실험은 실패한 실험이다.

'그 성(性)은 한가지니',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져 보면, 본성이 평등하다는 뜻이다. '본래 뒷논 것', 함허는 이 말로부터 부처를, 부처의 가르침을 다시 읽기 시작한다. 언해불전은 최초를 '맏처음'이라고 새긴다. '본래 뒷논 것', 나는 이 말을 언해불전 '맏처음'의 열쇠말로 여긴다. '일락 없으락과 고요히 없음', 언해는 그 사이에 성(性)이란 글자를 낀다. '일락 없으락'의 성(性)과 '고요히 없음'의 성(性), 한가지라고 한다. 성(性)이란 글자, 헷갈리는 말이다. 사전을 찾으면 더 헷갈린다. 언해불전도 구태여 새기려 들지 않는다. 그래도 언해불전을 말투, 이 글자를 다루는 솜씨, 투가 있고 씨가 있다.

성(性) 마른 사람이 한 어깨에 메어 가면,

산승의 막대기로도 또 너를 치고자 아니하리니,


성마르다.

참을성이 없고 성질이 조급하다.


성마르다, 이 말도 아주 오래된 말이다. 성조한(性燥漢), 성품 성, 마를조 사내한, '성마른' 사람이라고 새긴다. 요즘 사전의 풀이, 참을성이란 말의 성도 성(性)이다. 성질(性質)은 성품과 기질(氣質)이다. 타고 난 기질, 성마른 사람은 대뜸 제 어깨에 짊어지고 나선다. 이것 저것 가릴 틈도 없다. 늙은 스승의 막대기로도 말릴 새가 없다. 그런데 성질이란 말, 불교에서 흔히 쓰는 말이 아니다. 언해불전의 성(性)이란 글자, 성(性)과 상(相)의 짝으로 쓴다. 짝의 말투로 읽어야 한다.

네 몸에 있거늘 네 보지 못하나니, 네 12시 중에,

고픔 알며, 목마름 알며,추움 알며, 더움 알며,

시혹 노하며, 시혹 깃는 것이,

마침내 이 무슨 것인고?


또 색신(色身)은 이 땅과 물과 불과 바람과,

네 연(緣)의 모인 것이라,

그 몸이 완(頑)하여 뜻 없으니,

어찌 능히 보며 들으며 알리오?


능히 보며 들으며 아는 것이사,

이 너의 불성이니,


『목우자수심결언해』의 구절이다. 불성(佛性)을 두고 묻고 답한다. 불성이나 견성, 선불교에서도 손꼽히는 열쇠말이다. 이 말을 무겁게 다루는 사람들도 많다. 불성이나 견성을 위해 몸을 걸고 삶을 거는 이들도 있다. 거꾸로 본성론이니, 형이상학이니, 심하게 비판하고 공격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언해불전의 말투, 가볍다. 뻔하다. 첫째, 내 몸에 있다고 한다. 둘째, 고프고 마르고, 춥고, 덥고, 뻔한 일이다. 뻔한 걸 뻔히 아는 게 불성이라고 한다. 셋째, 뻔한 일과 뻔하게 아는 일, 연(緣)이란 글자, '붙다'라는 쉬운 말로 풀이한다. 붙어서 모인 몸이다. 요즘엔 상식이란 말을 쓴다. 누구나 아는 뻔한 일이다. 불성이나 견성, 언해는 상식의 일로 읽는다.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골머리를 썩혀야 할 무거운 말이 아니다.

견문각지(見聞覺知)라는 말도 불교의 열쇠말이다. 언해는 '보며 들으며 아롬'이라고 새긴다. 이런 새김도 언해불전만의 새김이다. 보통은 네 개의 글자, 네 개의 일로 읽는다. 각(覺)이란 글자는 보통 감각, '닿아서 느낌'으로 가려 읽는다. 그런데 언해불전은 세가지로 읽는다. 각지(覺知)를 그냥 '아롬'이라고 새긴다. 상식의 말투, 상식의 새김이다. 배 고픔을 아는 일, 먹을 것을 보는 일, 먹을 것을 보면 찾아 먹는 일, 그런 게 다 아롬이다. 개돼지도 하는 일, 누구나 아는 것, 그걸 불성이라고 읽는다. 불이란 글자도, 성이란 글자도 뻔한 상식으로 읽어야 한다.

적멸성(寂滅性)의 가운데, 마시며 찍먹음을 좇아,


오직 나물 캐며 물 길며,

연(緣)을 좇아 마시며 찍먹을 따름이니라.

이에 다다르면 각별한 양자 없어 범부와 다름 없을새,


개돼지의 찍먹음과 도인의 찍먹음, 뭐가 같고 뭐가 다를까? '연(緣)을 좇아 마시며 찍먹을 따름', 각별한 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영가의 '겨르로운 도인', 언해는 범인과 성인의 짝으로 읽는다. 무거운 짝이다.

네 이제 모든 중생과 받당기는 마음을 써 제 성(性) 삼는 것이오


반연심(攀緣心)을 ‘받당기는 마음’이라고 새긴다. 이 구절의 열쇠말도 연(緣)이다. 자성(自性)을 '제 성(性)'이라고 새긴다. 언해는 '삼는다'는 말을 쓴다. 동사이다. 이 말의 주인, 임자는 '네'이다. '네가 삼다', 네가 제 스스로 제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보고 듣고 아는 일은 내 몸에 본래 가진 일이다. 성(性)은 그런 일에 받당기는 마음으로 삼은 것, 낀 이름이다. 이런 일은 혼자 삼는 일이 아니다. 모든 중생과 더불어 삼은 일이라고 한다.

비면 밑이 사뭇 비고

있으면 밑이 사뭇 있나니

비거나 있거나 함에 낱낱이 대(對) 긋거니

어찌 세 구(句)에 거리끼리오


'무윰과 이숌'의 짝이다. 철저, 밑이 사뭇 빈 것을 무윰의 성(性)으로 삼는다. 밑이 사뭇 있는 것은 '이숌의 성(性)'으로 부른다. 철저를 추상하는 일이다. 남쪽을 남쪽이라 부르고 북쪽으로 북쪽이라 부르는 것과 똑 같다. 성(性)이란 글자는 중생과 함께 너와 내가 삼은 이름이다. 받당기는 마음으로 사뭇을 성(性)으로 삼는다. 이런 글자, 무겁게 붙으면 무거워진다. 가볍게 붙으면 가벼워진다. 작대와 절대, 붙는 기술을 다룬다. 부처의 말을 읽는 요령이다. 사뭇 있고, 사뭇 비고, 그래서 그 사이에서 읽으라고 한다. 낱낱이 대 긋거니, 절대라고 부른다.

'일락 없으락'과 '고요히 없음'의 짝, 성(性)은 한가지라고 한다. '일락 없으락의 성(性)'과 '고요히 없음의 성(性)'이다. '일락 없으락'에 사뭇 붙어 내가 삼은 성(性)이다. '고요히 없음'에 사뭇 붙어 네가 삼은 성(性)이다. 언해는 일락 없으락을 보려면 고요히 없음을 보라고 한다. 거꾸로 고요히 없음을 보려면 읽락 없으락을 보라고 한다. 짝의 말투, 짝을 버리면 모순의 말투가 된다. 사뭇을 보고 사뭇을 아는 일, 창만 보고 방패만 아는 일이다. 큰 외욤이 된다. 다른 짝을 돌아 보고 함께 보는 일, 그런 봄, 그런 아롬이 '대(對) 긋거니', 절대의 말씨이고 솜씨이다. '성이 한가지', 평등의 말투이다. 언해불전이 성(性)이란 글자를 읽는 투, 짝의 말투로 따라 읽어야 한다.

일체 현성(賢聖) 증(證)하신 법이 다 무위(無爲)로 차별이 있나니,

이 차별이 곧 무위라 중간과 두 가에 멀리 나니라.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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