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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03_03 깊은 새의 앞과 뒤

우두산(牛頭山)

증도가 현각의 노래

춘심유조불귀래(春深幽鳥不歸來)

암반군화자개락(嵓畔群花自開落)


봄이 깊거늘 깊은 새 돌아오지 아니하니

바위 가에 모든 꽃이 제 피락지락 하놋다


'구름의 자취와 학의 양자'에서 이어지는 노래,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여기에도 실마리가 있다. '깊은 새 돌아 오지 아니 하니', 유조(幽鳥)를 '깊은 새'라고 새긴다. '돌아 오지 않는 깊은 새', 이 말이 이 노래를 읽는 실마리이다. 남명이 제 노래에 심어 놓은 실마리, 제법 유명했던 실머리이다. 아는 사람이야 듣자 마자 안다.

우두산(牛頭山)은 중국 난징 부근에 있는 산이다. 소머리를 닮았다 해서 우두산이다. 나융(懶融) 선사(禪師)의 법명은 법융(法融 594-657)이다. 나융은 별명처럼 쓰던 호이다. '게으른 융(融)'이란 뜻이겠다. 하염없고 겨르롭고, 일 없고 게으르고, 이런 말이 다 우연이 아니다. 우두산에 유서사(幽棲寺)란 절이 있었다고 한다. 저 스님은 이 절 북쪽 깊은 골, 바위 굴에서 참선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도를 얼마나 억세게 닦았을까? 기이한 전설이 숱하게 전해 온다. 호랑이와 이무기도 나온다. 하늘나라 사람들이 밥을 이바지하고, 온갖 새들이 꽃을 이바지한다. 어디서는 백조(白鳥), 힌새라고도 하고, 어디서는 백조(百鳥), 온가짓 새라고도 한다. 유조(幽鳥)란 말은 거의 고유명사처럼 쓰인다. 유서사(幽棲寺), 깊은 산, 깊은 절에 노니는 깊은 새이다. 이 새가 이 노래의 실끝이다.

미견사조시(未見四祖時)

사조(四祖)를 보삽지 못하야 겨실 젠


견후(見後)

보사온 후엔


중국의 선종은 달마대사로부터 시작했다. 그로부터 여섯째 조사가 육조혜능이다. 이 노래는 넷째 조사, 사조도신(四祖道信 580-651)의 이야기이다. 사조스님이 우두산 나융의 바위굴로 찾아가 만나는 장면이다. 이 만남으로부터 나융이 아주 바뀌었다. 미견사조시(未見四祖時), 이 말도 고유명사처럼 쓰인다. 냇보람에 낀 이름이다. 선불교에서는 공안(公案)이란 말을 쓴다. 관청에서 쓰던 공문서를 가리킨다. 공공의 법을 상징한다. 권위와 권력, 힘이 담긴 냇보람이다. 이 만남으로부터 큰 바뀜이 일어났기 때문에 앞과 뒤를 가른다. 무엇보다 꽃을 물어 오던 깊은 새가 돌아 오지 않았다. 이 것도 이 노래의 한 끝이다. 꽃을 물어 오던 깊은 새, 왜 그랬을까? 돌아 오지 않는 깊은 새, 왜 그랬을까? 깊은 새의 앞끝과 뒤끝이다. 뭔가 크게 바뀌었다. 그게 뭘까? '그대는 아니 보난다?', 영가현각이 묻듯이, 이 만남도 그대에게 묻는다.

언해의 사김은 친절하다. 저런 이야기, 아무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랜 옛날 이야기, 전설마다 조금씩 내용이 다르다. 이야기도 다르지만, 이야기를 바라보는 눈도 다르다. 언해의 이야기, 어디서 그냥 베껴 온 게 아니다. 여러 책의 이야기 가리고 살폈다. 그리고 영가와 남명의 노래에 맞추어 이야기의 틀을 다시 짰다. 그만큼 손과 공이 많이 간 이야기란 뜻이다. 억불의 나라 조선의 임금과 세자와 대군이 다 했다기엔 쉽지 못한 이야기겠다. 아무튼 언해의 사김, 깊은 새의 앞과 뒤를 범(凡)과 성(聖)으로 나누어 읽는다. 이런 읽기와 사김도 어디서 베껴 온 게 아니다. 이건 순전히 언해의 관점이다. 세종과 두 아들의 해석이다. 선사들의 말투, 친절하지 않다.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보통은 거칠게 되묻는다.

한 스님이 남전(南泉)에게 물었다.


우두(牛頭)가 4조(祖)를 보삽지 못하야 겨실 제

어째서 새와 짐승이 꽃을 물어다 공양을 했습니까?


걸음마다 부처의 층계를 밟았구나


보사온 뒤에는

어째서 오지 않았습니까?


오지 않는다 해도, 이 왕노사(王老師)에겐 외줄기 길만도 못하다네


이건 『증도가사실』의 말투이다. 언해의 말투를 흉내내어 옮겨 보았다. 전해 오는 이야기 하나를 툭 던져 주고 만다. 이런 걸 보고 있노라면 아주 다른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든다. 이건 영가와 남명의 노래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언해의 사김을 '아주 친절하다'고 한다. 언해의 우리말투는 그냥 우리말투만이 아니다. '그대'를 대하는, 글을 다루고, 노래를 부르는 나름의 번득한 투를 갖고 있다. 이런 투도 참 놀랍다.

범정(凡情)이 스러지고, 성경(聖境)이 앞에 나타날새


성경(聖境)이 또 없고, 각별한 기특도 없어, 범부(凡夫)와 다름이 없을새


범(凡)과 성(聖)의 대구, 나는 이런 말을 싫어한다. 이런 말에 오래 시달렸기 때문이다. 이런 글자, 이런 말을 써 버릇하면 온통 헷갈린다. 별 것도 아닌 일, 뻔한 일을 흐릿하게 만든다. 평범한 보통 사람의 심정과 그런 심정을 벗어난 특별한 사람의 경지, 이런 대구, 불교에서는 차별이나 분별이라고 부른다. 차별의 말을 써 버릇하면 없던 차별도 생겨난다. 차별의 말에 붙어 차별에 얼굴이 생긴다. 차별이나 분별, 언해불전은 그저 '가리다'라고 한다. 범과 성의 가림, 중국 전통의 가림도 있고, 불교에서 쓰는 가림도 있다. 뭔가 각별한 수행으로 뭔가 각별한 경지에 도달한다. 그런 게 성경(聖境)이다. 나융은 그런 일을 거쳐 범의 심정을 벗어나 성의 경지를 향하였다. 기적이나 이적이란 말도 있다. 하늘 사람이 밥을 이바지하고 깊은 새가 꽃을 이바지하는 일, 언해는 '각별한 기특'이라고 부른다. 평범한 세계와는 아주 다른 일이다. 나융은 잇비 그런 일을 했다. 그래서 각별히 기특한 일들을 만났다. 주위의 사람들도 기특한 일들을 보았고, 여러 전설도 생겨 났다. 그러다가 4조를 만났다.

속절없고, 부질없는 짓, 영가의 말을 따르자면 배움이고, 위(爲)이다. 기특한 일들, 중생들이 지어낸 위작이고, 조작이다.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하욤'이고 '하저즈롬'이다. 사조를 만난 나융, 배움도 속절없고 경지도 속절없다.그렇게 알고 나니, 성경도 사라졌다. 범과 성, 어디에도 붙지 않는다. 브터니닷, 붙지 않으면 일어남도 없다. 봄은 깊어도 깊은 새도 돌아 오지 않았다.

봄이 깊거늘 깊은 새 돌아오지 아니하니

바위 가에 모든 꽃이 제 피락지락 하놋다


이건 남명의 노래이다. 영가는 묻고 남명은 답한다. '하늘과 힌새 따름 아니라, 부처와 조사도 엿볼 틈이 없다.' 이건 언해의 노래이다. 세종과 두 아들의 대답이다. 아무려나, 노래는 이어진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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