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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31_02 공부병

증도가 현각의 노래

사대(四大)를 놓아,

잡들지 말리니,


이 마디의 한쪽 날개, 놓으라고 한다. 파착(把捉), 잡을 파, 잡을 착, 언해는 '잡들다'라고 새긴다. 같은 말을 거듭하니 강조의 말이다. 잽싸게 잡고, 꽉 잡는다. 그러지 말라고 한다. '부처 구하여 공들이면', 영가는 이제 공부를 리셋하려고 한다. 일단은 스톱, 그만두라고 한다. '한갓 닦으며 증(證)함에 붙으면', '놓다'는 '붙다'의 짝이다. 붙기 때문에 놓으라고 한다. 잡기 때문에 잡지 말라고 한다.

사대(四大)를 놓다 함은,

몸과 마음이 본래(本來) 빈줄 사뭇 알아,

연(緣)을 좇아 임운(任運)하여,

가림없이 자재(自在)할시라.


사대(四大)는 물질을 이루는 네가지 원소이다. 언해는 '몸과 마음'을 통틀어 이른다. 임운(任運) , '운에 맡겨'라 새기기도 한다. 몸과 마음을 찌르는 드틀, 몸을 찌르면 마음도 찔린다. 찌르면 찌르는대로 그냥 맡기라는 말이다. 몸과 마음은 본래 비었다. 빈 몸을 빈 드틀이 찔러댄다. 그런 줄 사뭇 안다면 잡을 것도 없고, 놓을 것도 없겠다. 그래도 이런 말을 자꾸 하는 까닭은 뭘까? 붙기 때문이다. 잡기 때문이다. 붙고 잡으면 망하기 때문이다.

육조(六祖)가 이르시되,

마음을 두어 고요함을 보면,

이 병(病)이라 선(禪) 아니니,

사만 앉아 선(禪)에 거리끼면,

이(理)에 무엇을 더하리오 하시니라.


언해는 문득 육조(六祖)를 끌어 들인다. 이게 참 흥미롭다. 이 구절은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의 구절이다. 이 구절 앞에는 도법(盜法), 세작(細作)이란 말이 나온다. 법을 훔치는 사람이고, 법을 훔치기 위해 몰래 스며든 간첩이다. 중국의 선종, 달마대사가 초조이다. 오조 홍인 아래에서 혜능과 신수, 두 제자가 나왔다. 그들은 서로 육조를 다투었다. 남방 조계산에 머물던 혜능, 북방 옥천사에 머물던 신수, 그래서 사람들은 남능북수(南能北秀)라고 불렀다. 그래서 남종(南宗)과 북종(北宗)을 가렸다. 도법(盜法)과 세작(細作), 이 말만 들어도 그 다툼을 짐작할 수 있다. 종(宗)이란 글자, 높이를 다툰다. 남종과 북종, 누가 더 높을까?

혜능: 이제 법을 훔치려는 이가 이 모임에 스며 들었다.

지성: (곧 앞으로 나서 절을 하고, 사정을 말씀드렸다.)

혜능: 너는 옥천사로부터 왔다니, 세작이 분명하구나.

지성: 아닙니다.

혜능: 어째서 아닌가?

지성: 말씀을 드리지 않았을 때야 (세작임이) 맞지만, 말씀을 드렸으니 아닙니다.


혜능: 네 스승은 대중을 어찌 가르치느냐?

지성: '마음을 두어 고요함을 보고, 사만 앉아 눕지 말라' 고 가르치십니다.

혜능: 마음을 두어 고요함을 보면 이 병이라 선(禪) 아니니, 사만 앉아 몸에 거리끼면, 이(理)에 무엇을 더하리오.


북의 신수는 남의 혜능에게 세작을 보낸다. 어떤 공부를 시키는지 알아 오라고 한다. 공부의 다툼이다. 신수는 '주심관정(住心觀靜),장좌불와(長坐不臥)'를 가르친다. 이것이 북종의 공부이다. 누가 누구의 세작일까? 혜능은 앉아서 신수의 공부를 알아 낸다. 장좌(長坐), 언해는 '사만 앉아'라고 새긴다. '사만'은 '길다'의 옛말이다. 이제 알았으니 비판할 수도 있다. 혜능은 그런 공부를 병이라고 부른다. 사만 앉아 선(禪)에 거리끼면, 『육조단경』의 구절은 장좌구신(長坐拘身)이다. '몸에 거리끼면', 그런데 언해는 '선(禪)에 거리끼면'이라고 읽는다. 이런 차이는 뭘까? 판본의 차이일까? 읽기의 차이일까? 하여간 흥미롭다.

살아서는 앉아서, 눕지 못하고,

죽어서는 누워서, 앉지 못하네.


한가지로 냄새나는, 뼛조각이러니,

어찌 구태여, 공과(功課)를 세울까?


육조는 다시곰 노래한다. 몸에 거리끼는 걸까? 선에 거리끼는 걸까? 아무튼 공과(功課)라는 말도 재미있다. 시간이나 순서를 정해놓고 하는 공부이다. 공부의 방법,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불교에도 숱한 공부가 있다. 선종에도 숱한 공과가 있다. 공부와 공과, 높이도 있고 다툼도 있다. 훔치려는 이도 있고, 세작도 있다. 공부의 비결, 무협지가 따로 없다. 가진 게 많은 이들이야 가진 걸 걸기도 한다. 하지만 가진 거라곤 몸뿐인 이들도 많다. 몸을 걸기도 하고 목숨을 걸기도 한다. 임금 자리를 버리고 출가한 '우리 가문', 그 이도 몸을 걸고 목숨을 건다. 그런데 육조혜능, 냄새나는 뼛조각, 걸어 봐야 소용없다고 한다. 부처 되는 공부, 고스톱이 아니다. 건다고 얻는 게 아니다.

육조의 노래, 이것도 다툼일까? 이것도 비결일까? 하여간 높이를 다투던 세작에게 불러 주는 노래였다. 세작이었던 이는 이제 세작이 아니라고 한다. '사대를 놓아', 이 구절에 육조를 끌어 들이는 언해의 읽기는 산뜻하다. 뜻도 훤하다. 사만 앉아 한갓 짓는 공부, 망하는 지름길이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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