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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23_01 안의 드틀과 그친 슻

증도가 현각의 노래

적멸성중(寂滅性中)엔, 물어 얻지 말지니

적멸성(寂滅性)의 가운데, 마시며 찍먹음을 좇아


영가의 적멸성중(寂滅性中), 위의 구절은 23째 구절이다. 아래 구절은 33째 구절이다. 반복(反復), 언해불전은 '다시곰하야'라고 새긴다. 영가도 같은 말을 다시곰한다. 다시곰, 노래의 맛을 버린다. 노래의 맛이야 모르겠지만, 나는 이 다시곰이 고맙다. 적멸성중(寂滅性中), 그르 읽기 쉬운 말이다. 영가의 다시곰, 언해의 다시곰, 다 까닭이 있겠다.

요 사이에 듣글 묻은, 거울을 닦지 아니하니



마음은 밝음 없는 마음이니, 마음이 곧 때라. 거울에 듣글 있으면 비추지 못하고, 성(性)에 때 있으면 어두워 검으니라.


듣글 묻은 거울, 이야기의 순서를 좀 돌려 보자. 신수의 노래, 몸과 마음을 마주 세운다. 그래서 그런지 언해는 '마음이 곧 때'라고 한다. '거울에 듣글 있으면'과 '성(性)에 때 있으면'도 마주 세운다. 이런 말투도 참 재미있다. 이걸 새삼 들추는 까닭은 '적멸성(寂滅性)', 성(性)'이란 글자를 읽는 언해의 말투가 새롭기 때문이다. 그 실끝이 보이기 때문이다. 남명은 여기서도 '처음 '신(信)'호라' 라고 한다.

생(生)과 멸(滅)과 두 가지의 망진(妄塵)을 인(因)하야

아롬을 모도아 중(中)에 있어 안의 드틀을 들이켜 가져


보며 드롬이 류(流)의 몯 미칠 땅에 역류(逆流)함을 이름이 아는 성(性)이니

이 아는 성(性)이 저 깨며 자며, 생(生)과 멸(滅)의 두 드틀을 여의면 마침내 체(體) 없으니라.


『능엄경언해』의 구절이다. 각지(覺知)를 '아롬'이라고 새긴다. 아는 성(性), 아롬의 성(性)을 가린다. 요즘에도 불성(佛性)이란 말을 자주 듣는다. 국어사전은 '진리를 깨달은 부처의 본성' 따위로 풀이한다. 진리라는 말을 찾아 보면, '참된 이치 또는 도리'라 풀이하고 '만고불변의 진리'라는 예문을 들어 준다. 본성이란 말을 찾아 보면 '본디부터 가진 성질', 또는 '본디부터 가진 고유한 특성'이라고 풀이하고, '본성이 드러나다'라는 예문을 들어 준다. 진리나 본성, 이런 한자말들, 불교의 한자말투에서 비롯했다. 그런데 불교의 말투는 저런 사전의 말투와는 사뭇 다르다. 불교의 말투에 따르면, '만고불변의 진리'라는 말은 망(妄), 거짓이다. '진리를 깨달은 부처의 본성', 이런 말도 망(妄), 거짓이다. 변하지 않는 진리, 절대의 진리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이런 말도 또한 거짓이다. 국어사전의 한자말투, 이게 참 희한하다. 어쩌다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불교의 말투, 언해불전의 말투, 『능엄경언해』의 저 구절에서도 실끝이 보인다.

신수의 노래, 몸과 마음을 마주 세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이다. 그리고 몸과 마음에 '듣글'을 마주 세운다. 진(塵)이라는 글자이다. 몸도 듣글에 버믄다. 마음도 듣글에 버믄다. 듣글에 버믈면 듣글은 때로 엉긴다. 때로 엉기면 어두워 진다. 그래서 듣글, 잇비 닦으라고 한다. 듣글이 버믈지 않게 하라고 한다. 그런데 육조는 나무도 없고 자리도 아니라고 한다. 듣글이 버믈고 엉길 자리도 없다고 한다.

몸에 버므는 듣글, 이거야 쉽다. 먼지 속을 돌아 다니면 옷과 몸에 때가 낀다. 듣글을 대상이란 말로 바꾸어 보아도 뻔하다. 눈은 본다. 눈에 뵈는 것은 대상이다. '뵈는 것'이 듣글이다. 귀는 듣는다. '들리는 것'이 듣글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듣글'은 뭘까? 『능엄경언해』는 '안의 드틀'이라고 부른다. 이 말이 실끝이다. 몸은 몸 밖의 듣글, 또는 드틀에 버믄다. 이건 '밖의 드틀'이다. 이에 비해 마음은 몸 안의 드틀에 버믄다. 그래서 이건 '안의 드틀'이다. '아롬의 성(性)', 또는 '적멸(寂滅)의 성(性)', 성(性)이라는 글자, 또는 이름의 쓰임새가 '안의 드틀'이란 말에 걸렸다.

의(意)는 아롬에 주(主)하고 근(根)은 몸 안에 숨었을새,

이런다로 이르시되, 아롬을 모도아 중(中)에 있다 하시니라.


의(意)가 법진(法塵)에 붙어 상(想)하는 상(像)이 안에 발(發)할새,

이런다로 이르시되 안의 드틀을 들이켜 가지다 하시니라.


위 『능엄경언해』의 구절, 친절한 풀이가 이어진다. 의근(意根)과 의식(意識)에 대한 풀이이다. 육근(六根)을 앞의 오근, 눈-귀-코-혀-살의 뿌리와 의근, 둘로 나누어 풀이한다. 의근이 하는 일은 '아롬'이다. 그 뿌리는 몸 안에 숨었다고 한다. 이것도 오근과 의근의 차이이다. 눈의 대상은 색(色)이다. 빛깔이고 모양이다. 귀의 대상은 소리이다. 오근의 대상은 모두가 몸 밖의 것, 물건이다. 이에 비해 의근의 대상은 법진(法塵)이라고 한다. 의근이 법진에 붙어 상상(想像)한다. '상(想)하는 상(像)'이란 풀이가 흥미롭다.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그르메를 너기는 일'이다. 이어지는 풀이, 좀 더 따라가 보자.

문수(文殊)가 이르시되,

법(法)을 안의 드틀이라 이르나니라 하시니,

곧 과거 제법(諸法)의 그리메 상(像)이 이라.

또 이름이 '지어간 듣글'이라,

아비담(阿毗曇)의 이름이 '표(表) 없은 빛'이 다 '안의 드틀'이라.


눈의 대상은 물건의 빛과 모양이다. 이건 안근(眼根)과 색진(色塵)의 짝이다. 의근(意根)의 짝은 법진(法塵)이다. 법의 드틀이다. 색의 드틀은 '밖의 드틀'이다. 법의 드틀은 '안의 드틀'이다. 영상(影像)이란 말을 '그리메의 상'이라고 새긴다. 다섯가지 뿌리를 통해 내 몸 안으로 들어온 물건들의 그리메, 또는 그르메, 의근은 그 같은 그리메의 상에 붙고 버믄다. 그것들을 재료로 사랑한다. 안의 드틀에 버므는 일, 그걸 의식(意識)이라고 부른다.

역류(逆流)는 돌이켜 연(緣)함을 이르니라.

의(意)가 오근(五根)을 모으실새 이런다로 보며 듣느니라 이르시니라.


그러나, 오근(五根)은 오직 능히 현(現)한 경(境)에 순히 연(緣)하거니와,

오직 의(意)는 오근(五根)의 연(緣)하되 못 미칠 땅에 능히 돌이켜 연(緣)하나니,


몽경(夢境)을 미조차 사랑함 같으니,

오근(五根)이 미칠리 없으니라.


역(逆)을 '두르혀다'라고 새긴다. 돌이키는 일이고 뒤집는 일이다. 거꾸로 흐른다고 한다. 붙고 버므는 방향이 뒤집힌다. 오근은 다만 몸 밖의 물건, '것의 드틀'을 향한다. 언해는 이걸 순한 방향의 연(緣)이라고 부른다. 의근은 버므는 방향을 뒤집는다. 과거로부터 내 몸 안에 차곡차곡 쌓인 기억의 그르메들을 들이켜 마신다. 언해는 이걸 역(逆)의 방향의 연(緣)이라고 부른다. 순역(順逆)의 짝이다. 거꾸로 버므는 자리, 오근이 미칠 수 없는 땅이라고 한다. 오근이 미칠 수 없는 땅으로 거꾸로 흐르는 일, 『능엄경언해』는 그걸 이름하여 '아는 성(性)'이라고 부른다. 언해는 몽경(夢境)을 예로 들어 준다. 어제 밤에 꾸었던 꿈을 대상으로 사랑하는 일이다. 추(追)를 '미조차'라고 새긴다. 꿈에 미조차 붙어 버므는 일, 오근이 미칠 수 없는 의근의 사랑이고, 의식의 자리이다.

남북동서(南北東西)에, 그친 슻이 없거늘

조과(鳥窠)가 속절없이, 베의 터럭 잡아 부니라


까치처럼 살던 조과(鳥窠), 그의 시자가 되었던 회통(會通), 회통은 조과에게서 불법(佛法)을 찾았다. 그런데 조과는 불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래서 회통은 조과를 떠나겠다고 했다. '불법은 내 여기에도 죠고마치 있다.' 그리고는 옷에 붙은 터럭을 집어 불어 버렸다. 부처의 법을 찾았단다. 부처의 법도 법이다. 법은 의근의 대상이다. 법의 드틀은 안의 드틀이다. 부처의 법이란 것도, 오근을 통해 내 몸으로 들어온 그리메의 상을 들이켜 가져 거꾸로 버믄 결과이다. 영가의 노래, 남명과 언해는 남과 북을 '죽살이와 없음'의 짝으로 읽는다. 남명은 남과 북 사이에 '그친 슻'이 없다고 한다. 끊어짐도 없고 사이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의근, 우리의 의식, 법을 가르고 성(性)을 가른다. 이게 다 거꾸로 흘러 버므는 일이다.

영가의 적멸성(寂滅性), '없음의 성(性)'이다. 의근의 역류는 '아는 성(性)'이라고 했다. 적멸의 성, 없음의 성도 역류의 결과이다. '꿈을 미조차 사랑함'처럼 오근이 미칠 수 없는 땅이다. 적멸성(寂滅性)은 북두의 끝이다. 적멸의 성은 '철저한 없음', 밑이 사뭇 빈 없음이다. 의근은 없음의 끝을 없음의 성(性)으로 사랑한다. 없음의 끝, 이것도 '그친 슻'이다. 의근이 하는 일은 금을 긋는 일이다. 분석, 타고 가리는 일이다. 금을 그어야 타고 가릴 수 있다. 그런 일에 '성(性)'이란 이름을 단다. 하지만 남북동서에는 본래 금도 없고 슻도 없다. 의근은 법을 성으로 사랑한다. 적멸의 성, 생사의 성, 부처의 성, 아는 성, 이런 이름들은 모두가 미칠 수 없는 땅에 단 이름들이다. 그친 슻이 없는 일에 금을 긋고, 타고 가리는 일이다. 이런 게 적멸성(寂滅性)이란 이름을 읽는 언해의 말투이다.

적멸성(寂滅性)의 가운데는 본래(本來) 죄(罪)와 복(福), 손(損)과 익(益)이 없거니, 어찌 있고 없음을 잇비 물으리오. 즈믄 뫼는 죄(罪)와 복(福) 등(等)의 이름과 얼굴이니, 차별(差別)의 이름과 얼굴이 그친 곳이 이 적멸성(寂滅性)이라. 


마음 녈 곳이 없으며, 말씀의 길이 그쳐 명상(名相)이 서지 않으니, 그럴새 이르시되 '지나갈 이 어렵다' 하시니라.


밖의 사람은 불조(佛祖)이니, 이는 불조(佛祖)의 윗 일이라.


부처와 조사의 '윗 일', 향상사(向上事)를 그저 '윗 일'이라고 새긴다. '윗 일'은 부처와 조사도 알지 못한다고도 한다. 위나 아래, 이 것도 다 '거꾸로 버믈어 그친 슻'이기 때문이다. 조과에게도 불법은 있다. 그는 다만 터럭을 잡아 분다. 영가에게도 적멸성은 있다. 그는 다만 마시며 찍먹는다. 거꾸로 버므는 일, 쓸모는 있다. 그래도 그르메의 일, 거꾸로 버므는 일, 안의 드틀도 때가 된다. 법의 드틀도 성(性)의 이름도 때가 된다고 한다.

마음은 밝음 없는 마음이니, 마음이 곧 때라. 거울에 듣글 있으면 비추지 못하고, 성(性)에 때 있으면 어두워 검으니라.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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