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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평등

2.4 비비고 버믈고, 거츨게 그르 알아


일체의 중생을 널리 보니, 여래의 지혜 덕상(德相)을 갖추어 지녔는데도, 오직 망상과 집착으로 알지 못하놋다.


이게 오셔도 오시지 않은 까닭이다. 평등한데 평등하지 않은 까닭이다. 그런데 그 까닭이 오직 하나란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까닭은 망상(妄想)과 집착(執著)때문이란다.

망인사대(妄認四大)야 위자신상(爲自身相)고

사대(四大)를 거츨게 그르 알아 제 몸의 얼굴을 삼고,


육진연영(六塵緣影)으로 위자심상(爲自心相)

육진(六塵)육진(六塵)의 연영(緣影)으로 제 마음의 얼굴을 삼기 때문에……


연(緣)은 육진에 버믈시니, 육진에 버므는 마음은 그르메 같아 실(實)하지 않다.


얼굴과 그르메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얼굴과 그르메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망상(妄想)이라고도 하고 망인(妄認)이라고도 한다. 망(妄)이란 글자도 쉽지 못하다. 요즘에는 거의 우리말로 새기지도 않는다. 옳지 않고, 황당하고, 아무튼 좋은 뜻은 없다. 그런데 언해불전은 이 글자를 ‘거츨다’라고 새긴다. 이런 말투도 참 아깝다.

거츨다 1 [형용사, 옛말]

거칠다의 옛말


거츨다2 [형용사, 옛말]

허망하다, 망령되다


국어사전의 풀이는 이렇다. 허망하다, 속이 비었다는 뜻이니 그러려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망령(妄靈)되다, 이런 말은 더 헷갈린다. ‘늙거나 정신이 흐려서 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난 데가 있다’는 뜻이란다. 보통은 치매를 연상한다. 그런데 평등한데 평등하지 않은 까닭, 늙은이만의 일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헷갈린다. 도대체 거츤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이 글자는 보통 진(眞)에 대응한다. 진망(眞妄), 진실한 것과 진실하지 않은 것의 대구이다. 사대(四大)는 물질이다. 흙과 물과 불과 바람,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원소이다. 이것은 고대 인도의 과학이다. 우리의 몸도 물질이다. 원소가 쌓이고 뭉쳐 만들어졌다. 육진(六塵)은 여섯 가지 티끌이다. 이것도 고대의 과학이다. 사대가 물질의 과학이라면, 육진은 마음의 과학이다. 진(塵)이란 글자, 언해불전은 드틀이라고도 새기고, 듯글이라고도 새긴다.

드틀마다 착(著) 없으며, 염(念)마다 남이 없어야 진실의 발심이며


그런데 드틀의 과학, 이게 은근 정교하다. 드틀은 내 몸을 자극하는 대상이다. 빛의 드틀은 눈을 건드린다. 소리의 드틀은 귀를 건드린다. 냄새를 맡는 코, 맛을 느끼는 혀, 감촉을 느끼는 살, 이건 오감, 다섯가지 느낌이다. 여기까지야 뻔하다. 내 몸을 자극하는 대상이 진(塵)이라면, 그걸 느끼는 내 몸의 자리는 근(根)이라고 부른다. 내 몸의 뿌리이다. 이건 드틀과 뿌리의 대구이다. 눈은 안근(眼根)이고 귀는 이근(耳根)이다. 근과 진, 뿌리와 드틀 사이에서 그르메가 어린다. 빛과 색의 드틀은 내 눈에 그르메로 어린다. 몸 밖의 드틀에는 얼굴이 있다. 내 몸에 어린 그르메에는 얼굴이 없다. 얼굴과 그르메는 이런 일을 따지고 밝히는 말이다. 그런데 여섯째 근(根)은 의근(意根)이다. 이 이야기는 좀 길어진다. 우선 말을 따라가 보자.

망상(妄想), 상(想)이란 글자는 ‘너기다’ 또는 ‘너굠’이라고 새긴다. ‘여기다’의 옛말이다. 드틀의 그르메, 그 바로 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보통은 그냥 생각이나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런 일을 그냥 마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바로 망상이다. 거츨고 그르다. 엉성하다는 말이고, 덜렁댄다는 말이다. 엉성하고 덜렁대면 사이 사이에 구멍이 생긴다. 빈자리가 생긴다. 속이 빈다. 속이 빈다면 허망하다.

육진에 버므는 마음은 그르메 같아 실(實)하지 않다.


‘실하지 않다’는 말은 얼굴이 없다는 말이다. 그르메에는 얼굴이 없다. 살이 없다. 허망하다. 속이 비었다. 그르메와 너굠 사이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 그 사이에 생겨나는 구멍, 빈자리, 그래도 미친 아롬은 거기서 얼굴을 찾는다. 듬성 듬성 이어지는 너굠을 제 마음의 얼굴로 삼는다. 제 몸의 얼굴, 제 마음의 얼굴은 모두 거츤 너굠, 엉성한 망상이 지어낸 것이다.

엇뎨 구틔어 밖을 향해 구하리오


하필(何必)을 ‘엇뎨 구틔어’라고 새겼다. 구태여의 옛말이다. 꼭 그래야 할 필요, 굳이 그래야 할 까닭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해야 한다면 거기에도 까닭은 있겠다. 집착(執著), 집(執)이라는 글자도 ‘구틔어’라고 새긴다. 강(强)이란 글자도 ‘구틔어’이다. 착(著)은 붙든다는 말이다. 구태여, 억지로 붙들고 늘어진다.

상상(想像) [명사]

1.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 그려 봄

2. [심리] 외부 자극에 의하지 않고 기억된 생각이나 새로운 심상을 떠올리는 일. 재생적 상상과 창조적 상상이 있다.


상상(想像)하다 [동사]

1.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 그려 보다.

2. [심리] 외부 자극에 의하지 않고 기억된 생각이나 새로운 심상을 떠올리다. 재생적으로 상상하는 일과 창조적으로 상상하는 일이 있다.


상상(想像), 물론 요즘에도 자주 쓰는 말이다. 국어사전은 저렇게 풀이한다. 이 말은 언해불전에도 자주 나온다. 그런데 그 쓰임새, 국어사전과는 좀 다르다. 예를 들어 상(像)이란 글자, 인(人)과 상(象)을 합한 글자이다. 국어사전을 보면 대상(對象), 추상(抽象), 상징(象徵) 따위의 말에는 상(象)을 쓴다. 이에 비해 영상(影像), 동상(銅像), 우상(偶像) 따위의 말에는 상(像)을 쓴다. 이 차이는 뭘까?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르자면, 상(象)은 얼굴이고 상(像)은 그르메이다. 이 두 글자의 차이는 사람 인(人)이다. 상(象)은 사람의 몸 밖에 실재하는 물건이다. 물질이다. 얼굴이 있다. 이에 비해 상(像)은 상(象)이 내 몸에, 내 몸의 뿌리에 어린 영상, 곧 그르메이다. 몸 밖의 얼굴, 내가 보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다. 하지만 내 몸에 어린 그르메, 이건 오롯이 나의 그르메이다. 나의 일이다. 상상(想像)은 상(像)을 상(想)하는 일이다. 언해불전은 이렇게 읽는다. 상상은 ‘그르메를 여기는 일’이다. 그르메에 대한 너굠, 이게 아롬의 시작이다.

사람이 신 매(梅)를 이르면 입 안에 물이 나고, 높은 빙애 밟음을 사랑하면 발바닥이 쇠자리나니


누군가 시큼한 매실 이야기를 하면, 입안에 저절로 침이 고인다. ‘빙애’는 벼랑의 옛말이다. 높은 벼랑 끝에 섰는 생각만 해도 발바닥이 시큰하고 찌릿해진다. 산삽(酸澁)이란 말을 ‘쇠자리다’라고 새겼다. 시큼하고 떫더름한 맛이다. 벼랑 끝에 서 본 사람이라면 찌릿한 그 맛을 잊지 못할 것이다. 겪어 본 사람이라면 말만 들어도 생각만 해도 맛이 느껴진다. 몸이 움직인다. 상상이란 말을 이렇게 풀었다.

그런데 그르메와 너굠의 사이에 구멍이 생긴다. 띄엄띄엄 보고 드문드문 여기기 때문이다. 매실 이야기에 침이야 한두번 고일지 몰라도, 그걸로 목마름을 풀어 줄 수는 없다. 한두번 속여 넘길 수 있을진 몰라도 빨리 먹을 물을 찾아 가야 한다. 구멍이 숭숭 뚫어진 일, 그런데 그 일을 구태여 억지로 붙들고 늘어진다. 그런 일이 망상이고 집착이다. 사람은 물론, 천하의 생명들이 제 몸에 집착한다. 망가지는 게 아깝고, 무너지는 게 서럽다. 제 몸이라지만, 우리는 제 몸도 빛깔로 보고 소리로 듣는다. 보고 듣는 사이에 ‘그르 안다’. 구멍이 숭숭 뚫렸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구태여 억지로 붙든다. 판단을 하고 결론을 내린다. 그런 일이 ‘그르 아는 일’이다. ‘그르 알다’, 언해불전에 아주 흔한 말이다. ‘외오 알다’고 새기기도 한다. 그르 알고, 바로 알고, 까닭은 다만 망상과 집착이다.

사대(四大)를 거츨게 그르 알아 제 몸의 얼굴을 삼고,


상(像)이야 그르메라지만 상(相)이란 글자는 얼굴이라고 새긴다. 상(象)과 상(像)의 차이, 그리고 상(相)과 상(想)의 차이, 보통은 대강 넘어간다. 띄엄띄엄 보고 드문드문 넘어간다. 그런데 언해불전은 이 차이를 조심스레 구별한다. 글자 몇 개만 조심스레 반성해도 망상과 집착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르메를 띄엄띄엄 느끼고, 드문드문 여긴 결과가 상(相)이다. 구태여 너긴 결과이다. 상(像)을 상(想)하는 사이에 상(像)이 상(相)으로 바뀐다. 그르메를 얼굴로 삼는다. 헷갈리는 이야기, 뒤에 조금 더 살펴 보기로 하겠다.

아무튼 보고 듣고, 몸에 관한 이야기이다. 누군가, 무엇인가 내 몸을 두드린다. 내 몸 밖의 드틀이다. 아주 작은 알갱이, 빛의 알갱이일수도 있다. 냄새의 알갱이일수도 있다. 드틀이 내 몸을 두드리면 내 몸은 느낀다. 반응한다. 말하자면 작용과 반작용이다. 드틀은 두드리고 내 몸은 느낀다. 드틀과 몸 사이의 일, 그 일을 연(緣)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일을 ‘버믈다’라고 새겼다.

연루(連累/緣累) [법률]

남이 저지른 범죄에 연관됨


버믈다 [동사, 옛말]

1. 얽메이다. 걸리다

2. 두르다


연(緣)이란 글자도 불교에서 무척 자주 쓰는 글자이다. 말이 많은만큼 해석도 분분하다. ‘버믈다’라는 새김은 그래서 돋보인다. 그런데 ‘버믈다’는 말, 국어사전을 보면 연루(緣累)처럼 좀 나쁜 뜻으로 풀이한다. 얽메임, 걸림이란 뜻은 루(累)라는 글자에서 비롯했다. 요즘엔 주로 ‘누를 끼치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 글자는 본래 가는 실이나 줄의 뜻이었다. 실이나 줄, 매거나 짜는 데 쓴다. 나쁠 때도 있지만 좋을 때도 있다. 연(緣)이란 글자, ‘버믈다’라는 새김, 나는 그냥 ‘김치를 버무리다’, 이런 말, 이런 일을 연상한다. 눈과 귀와 코와 혀와 살과 뜻, 갖가지 드틀이 여기 저기 내 몸을 찔러댄다. 몸과 드틀이 닿으면 작용과 반작용, 서로가 서로를 향해 움직인다. 서로가 서로에 기댄다. 그런 게 버므는 일이다. 마늘과 고추가 만나면 새로운 맛이 난다. 손맛이란 말도 있듯, 버무릴수록 맛이 달라진다. 뿌리와 드틀도 버믄다. 버믈수록 바뀐다. 달라진다.

날조(捏造)란 말이 있다. ‘거짓으로 꾸미다’는 말이다. 유언비어도 날조하고 간첩도 날조한다. 연루도 나쁘지만 날조는 더 나쁘다. 그런데 날(捏)이란 글자, 언해불전은 ‘비븨다’라고 새긴다. 비비다의 옛말이다. 흙을 비벼 그릇을 만든다. 밀가루를 비비고 반죽해 국수도 만들고 만두도 만든다. 비비고 반죽하여 만드는 일이 다 날조이다. 손맛, 양념은 버무릴수록 맛이 좋아진다. 밀가루 반죽, 비비고 때릴수록 쫀득해진다. 비비고 버믈고 그 사이에 질(質)도 바뀐다. 상(像)이 상(相)으로 바뀐다. 그르메가 얼굴로 바뀐다. 연(緣)이나 날(捏), 버믈고 비비고, 이런 일을 가잘빈다. 망상과 집착의 원인이다. 차별, 불평등의 까닭이다.

근(根)과 경(境)괏 법(法) 중에 쇽졀 업시 비븨여 괴이(怪異)니

그르멧 이리 섯거 버러 정(正) 닷고 아도다


우직다 환사(幻師)ㅣ 환물(幻物)을 맛나

제 보고 의심(疑心)야 두륨 마로 아디 몯다


뿌리와 드틀과 법 가운데 속절없이 비비어 괴이하니

그르메의 일이 섞이고 벌려, 바른 닦음을 아잘하도다


우슴직하여라, 환사(幻師)가 환물(幻物)을 만나

제 보고 의심하여 두려움 그칠 줄을 알지 못하나다


언해불전의 말투, 요즘의 말투와는 참 다르다. 어감, 이런 느낌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아까울 때가 많다. 몸과 마음의 일, 그르 알고 바로 아는 일, 헷갈리는 글자 또는 말씀, 그런 일을 저렇게 노래한다. 고약한 이야기, 번득한 우리말, 참 쉽게도 한다. 허(虛)를 ‘속절없다’고 새긴다. 공연(空然)이란 말도 속절없다고 한다. 허공(虛空), 텅 비었다. 그것이 ‘속절없다’의 뜻이다. 뿌리와 그르메 사이의 일, 그 가운데, 그 사이가 허공이다. 텅 비었다. 그런데도 붙든다. 비비고 버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태여’고 그래서 속절없다. 속절없는 짓, 부처는 ‘기이할셔’ 라고 했다. 저 노래는 괴이하다고 한다. 비슷한 말이다. 사이가 텅 빈 일을 구태여 속절없이 붙들고 늘어진다. 까닭도 없는 일, 그래서 놀랍다. 이런 일, 이런 말, 모두가 다 놀랍다.

㫚(홀)은 어득시오 황홀(恍惚)은 어즐시라


아잘하다는 매(昧)를 새긴 말이다. 보통 ‘새벽 매’라고 읽는 글자, 이 글자도 만만치 않다. 새벽은 먼동이 틀 무렵이다. 밤이 낮으로 바뀌는 때, 어둠에서 밝음이 시작하는 때이다. 홀(㫚)도 ‘새벽 홀’이다. 새벽의 빛은 어득하고 어둑하다. 어둑하기 때문에 어즐하다. 아잘하다는 그런 모습이다. 빛이 넉넉하지 않아 아른아른 잘 보이지 않는다. 잘 보이지 않아 잘 알 수도 없다. 보일 듯 말 듯, 알듯 말 듯, 그런 게 매(昧)이다. 어득하고 어즐하기 때문에 아잘하다. 이런 말, 사연이 있고 까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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