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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21_02 오로 앗아

증도가 현각의 노래

죄(罪)와 복(福)이 없으며


망(妄)과 진(眞)을 버리니

맑은 달이 가을을 당(當)하여도, 두려움을 가잘비지 못하리로다

칼 짚은 문수(文殊)도, 오히려 보지 못하시곤

어찌 생사(生死)가, 저 가에 다달음이 있으리오


영가의 죄와 복, 남명은 망(妄)과 진(眞)으로 읽는다. 연(捐)이란 글자, 언해는 '버리다'라고 새긴다. 보는 방향을 바꾼다. 남성도 보지 않고 북두도 보지 않는다면, 어느 쪽을 좇아 어느 별을 봐야 하나? 아무튼 짝의 양 극단을 다 버린다는 말이다. 생사와 열반, 죽살이와 없음, 또는 있음과 없음의 짝을 다 버린다. 생사도 없고 열반도 없다.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다. 언해가 중간구라고 부르는 일이다.

망상(妄想) 덜지 아니하며, 진(眞) 구하지 않나니


진(眞)과 망(妄)이 다, 거울 속의 듣글 같으니라

허공(虛空) 빛 그르메를, 쳐 헐어 버려 그쳐야

이 때에야 본래(本來)의 사람을 보리라


영가의 노래, 그 마디의 흐름, 남명의 노래도 흐름을 따라 흐른다. '망(妄)과 진(眞)을 버리니', 남명에게는 이 것이 '배움 그쳐 하욤없은 겨르로운 도인'의 일이다. 남명은 그 일을 맑은 가을 하늘의 둥근 달에 견준다. 그 달의 두렷함으로도 하욤없은 도인의 일을 가잘비지 못한다. 허공의 빛 그르메, 이건 언해의 새김이다. 언해는 '망도 없고 진도 없는 곳이 오히려 빛 그르메'라고 풀이한다. '둘 없는 곳이 또 없어야 본래의 사람을 보리니'라고 한다. 언해는 다시 이를 '세 구(句)에 붙지 아니할새'라고도 한다. 중간의 구절도 허공의 그르메라고 한다. 이 것이 '두려움을 가잘비지 못함'의 뜻이다. 죄와 복이 없다지만, 없음이라도 그냥 없음이 아니다. 남명과 언해는 없음을 세 겹으로 읽는다. 짝의 한 편이 없음과, 짝의 두 편이 다 없음과, 둘 없는 곳이 또 없음, 세 겹의 없음이다. 말로 가려 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아무튼 허공의 빛 그르메,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세 겹의 없음, 이런 노래를 이런 우리말로 따라 읽는 일이 새롭고 즐겁다.

언해의 풀이, 짧게 넘어간다. 칼도 문수(文殊)도 다 지혜의 상징이다. 날카로운 칼, 닿으면 벤다. 남명은 칼이 하는 일, '베다'를 '보다'로 노래한다. 지(智)는 경(境)의 짝이다. 가을 하늘의 둥근 달을 본다면, 둥근 달이 경(境)이다. 언해불전의 말투로는 드틀 또는 듣글이다. 그래서 남명은 '거울 속의 듣글 같다'고 한다. 거울 속의 듣글, 쌓이면 때가 된다. 요즘에는 대상이라고 부른다.

지(智)와 경(境), 한자말투로는 능관(能觀)과 소관(所觀), 능소(能所)의 짝으로 읽는다. 언해불전의 말투로는 '보다'와 '뵈다'의 짝이 된다. 칼이라면 '베다'와 '베이다'가 된다. 한자말투와 우리말투, 이렇게 다르다. 능소(能所)라는 한자말, 중국말, 한자말투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하지만 우리말투, 저런 한자말을 구태여 따라 쓸 까닭이 없다. 문수의 칼로도 베지 못하는 것, 문수의 지로도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은 '망(妄)과 진(眞)을 버리는' 두려움, 두렸함이다.

남명은 다시 '저 가'를 가리킨다. 생사와 열반, 죽살이와 없음, 불교에서는 도(度)라는 글자를 쓴다. 물을 '건너다'에 견준다. 생사가 '건넘'의 '이 가', 이 편이라면, 열반은 '저 가'가 된다. '저 가'로 건너면 도(到), '다다름'이 된다. '보지 못하시곤', '곤'이란 어미가 정겹다. '고는'의 준말이라지만, 느낌이 조금 더 세다. 보지도 못하면서 뭘 벤담? 문수가 베는 것, 그가 건넌 가는 도대체 어디일까?

하나는 나를 버리고 남을 일우는 뜻이니, 공(空)이 곧 색(色)인 젼차이니, 곧 색(色)이 낟고 공(空)이 숨을씨라.


둘은 남을 없게코, 나를 나타는 뜻이니, 색(色)이 곧 공(空)인 젼차이니, 색(色)이 없고, 공(空)이 나탈시라.


셋은 나와 남이 다 있는 뜻이니, 숨음과 나탐과 둘 없음이니, 이 진공(眞空)인 젼차이니, 이르되 색(色)이 공(空)과 다르지 아니함은 환색(幻色)이 되니 색(色)이 있음이오, 공(空)이 색(色)과 다르지 아니함은 진공(眞空)이 되니, 공(空)의 나탐이 서로 가리지 아니하야 둘이 다 있는 젼차이라.


넷은 나와 남이 다 없는 뜻이니, 오안 체(體) 서로 즉(卽)한지라, 오로 앗아 둘이 없어 두 갓이 그친 젼차이라.


『반야심경언해』의 구절이다. 색(色)과 공(空)을 '갓', 또는 '가'라고 부른다. 대(對)의 양변(兩邊)이다. 짝의 두 갓이다. 이 갓이 나라면, 저 갓은 남이다. 이 갓이 색이라면, 저 갓은 공이다. 그 사이를 넷으로 갈라 밝힌다. 대(對)를 다루는 기술이다. 보고 베고, 건너고 다다르고, 모두가 작대의 이분법, 두 가를 다루는 말투이다. 전체(全體)는 '오안 체(體)'라고 새긴다. '온 몸', 또는 '오안 읏듬'이라 새기기도 한다. 전탈(全奪)은 '오로 앗아'가 된다. 오로 앗으면 두 갓이 다 그친다.

언해는 대뜸 '문수는 지(智)오, 생사는 식(識)이라', 지(智)와 식(識)을 가린다. 이건 좀 뜬금없다. 식(識)은 의식(意識)을 가리킨다. 요별(了別), 둘 사이의 다름을 '타고 가린다.' 부석(剖析)이고 분석이다. 『반야심경언해』의 네가지 '타고 가림', 이런 일도 식이 하는 일이다. 문수도 베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일, 타고 가려도 알지 못한다. 말은 그렇다. 영가의 노래, 뜬금없는 언해의 풀이, 노래를 더 따라 가야 한다.

너겨 의론(議論)하며 사량(思量)하면, 어지러운 뫼에 가리리라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