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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간섭

5.5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내가 버클리 대학 ‘인지과학 101 클래스’에서 프레이밍(framing)에 대해 가르칠 때, 가장 먼저 학생들에게 과제를 주었죠. 그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뭐를 하던 간에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란 겁니다. 나는 이걸 해 내는 학생을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말은, 코끼리처럼, 프레임을 일으킵니다. 어떤 이미지일 수도 있고 다른 류의 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말은 이에 연관된 프레임으로 정의됩니다. 프레임을 버리려고 할수록 프레임을 일으킵니다.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와중에 ‘나는 사기꾼이 아니야’란 연설을 했단다. 우리는 TV 토론회에서, ‘내가 MB 아바탑니까?’ 이런 장면을 모두 함께 보았다. 바보 같은 프레임이다. 덕분에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프레임이란 말도 이제 상식이 되었다. 누구나 안다지만, 그래도 바보 같은 말, 바보 같은 짓은 이어진다. 생각은 코끼리를 싸고 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가기도 한다.

인지(認知): Cognition

생각, 경험, 감각을 통해 지식과 이해를 습득하는 정신적 행동 또는 과정


보며 들으며 아는 것이사, 반다기 이 너의 불성이니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인지과학자라고 한다. 인지과학과 언어학을 융합, 녹여 어울어 인지언어학이란 새로운 분야를 열었다고 한다. 인지라는 말, 언해불전은 인(認)도 지(知)도 ‘알다’ 또는 ‘아롬’이라고 새긴다. 이런 말투를 따르자면 인지과학은 ‘아롬’에 대한 과학이 된다. 아롬으로 가는 과정을 연구한다. 불교에서는 견문각지(見聞覺知)라는 말을 쓴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알다’라는 말이다. 육근, 몸의 여섯 뿌리가 하는 일이다. 보고 듣는 거야 눈과 귀의 일이다. 각(覺)이란 말, 촉각(觸覺), 닿아서 느끼는 일이다. 코와 혀와 살의 뿌리, 코는 냄새의 드틀에 닿는다. 혀는 맛의 드틀에 닿는다. 살은 물건의 살에 닿는다. 이 세가지의 닿음과 느낌이 각(覺)이다. 이에 비해 지(知)는 의근(意根)이 하는 일이다. 아롬이다. 아롬은 감각이나 경험, 밖의 드틀로부터 오는 느낌도 다루지만, ‘안의 드틀’도 다룬다. 법(法)이고 이름이다. 법과 이름의 관계는 아롬과 말의 관계이다. 법과 이름이 아주 단단하게 붙어 있다. 중생의 아롬이 말에 붙어 있다. 언해불전도 견문각지의 아롬, 인지(認知)를 다룬다. 언해불전은 견문각지를 ‘보고 듣고 아는 것’이라고 새긴다. 각지(覺知)를 그냥 '알다', 또는 '아롬'으로 묶는다. 언해불전의 목표 또한 '보고 듣고 아는 것'의 진실이다. 이 일을 관찰하고 사유한다. 보아 살펴 사랑한다.

네 이제 모든 중생과 받당기는 마음을 써 제 성(性) 삼는 것이오



반연심(攀緣心)을 ‘받당기는 마음’이라고 새겼다. ‘받당기다’, 이 말이 참 묘하다. 본래는 ‘다’라고 쓴다. ‘븓당기다, 브티당기다’란 말도 있다. 이건 쉽다. 어딘가에 붙어서 잡아 당긴다. 그렇다면 ‘’은 무슨 뜻일까? 언해불전을 읽다 보면 멍청해지는 때가 많다. 답이 없는 궁금함, 막막함이다. 우리말의 기록, 언해불전의 기록이 맛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막히면 더 캐고 들 길이 없다. 그런데 이게 은근 별미이다. 언해불전에 몽몽일미(濛濛一味)란 말이 나온다. ‘가는 비의 한 맛’이라고 새긴다. 몽(濛)은 ‘가는 비’이다. 안개비보다는 굵고 가랑비보다는 가늘다. 온통 뿌옇고 자욱하여 세상의 차별을 가려 버린다. 이게 참 편안하다. 의심이랄까 뭔가를 하고는 있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셈이다. 궁금하긴 해도 쫒기질 않는다. 그러다 보면 수가 나기도 한다.

제근(諸根)이 어둡고 둔하며 뎌르고 더럽고 손 받고 발 절며


그러다 마침 ‘손다’란 말이 눈에 띠었다. '뎌르고'는 키가 작은 난쟁이다. '손 받고', 손이 오그라 드는 병, 조막손이를 가리킨다. 손이 ‘다’, 손을 꼭 오그려 쥔 모습이다. 그렇다면 받당기다는 ‘붙어 당기다’보다 훨씬 더 또렷하고 번득한 표현이 된다. 반연(攀緣) 또는 반연심(攀緣心)이란 말은 불교에서 정말 흔한 말이다. 그만큼 사람의 아롬을 분석하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란 뜻이다. '받당기다'는 오그라들 듯, 꽉 움켜 잡고, 당겨대는 모습이다. ‘물에 빠진 사람 풀뿌리라도 잡듯’, 당해 본 사람은 담박에 안다. 목숨이 걸렸다. 따지고 헤아릴 겨를도 없다. 허우적거리다 뭐라도 걸리면 그저 움켜 쥔다. 매달리고 당긴다. ‘받당기는 마음’, 그만큼 다급하고 절박하다.

내 머리가 제 동(動)할 뿐이언정


어릴 적 잠이 많았던 나는 꿈도 많이 꿨다. 아주 또렷하게 남은 꿈도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가면의 꿈’이다. 꿈 속에 가면을 쓴 사람이 나왔다. 궁금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가면을 벗었다. 가면 속에 다른 가면이 있었다. 하염없이 가면을 벗었다. 그의 민낯, 영 볼 수 없었다. 그러다 잠이 깼다. 이런 게 받당기는 마음이다. 가면이란 말에 받당긴다. 따지고 보면 이런 일, 흔한 일이다. 앞에서 모깃소리를 예로 들었다. 이런 것도 ‘받당기는 마음’이다. 모깃소리에 착 달라붙어 움켜 쥐는 일이다. 마음이라고 했지만 이럴 때는 주로 염(念)이라는 글자를 쓴다. 언해불전은 관찰이나 분석이란 말을 즐겨쓴다. 뭐든 보거나 들으면 자세히 관찰하고 분석하라고 한다. 보아 살펴 나누어 쪼개라고 한다. 몸도 분석하고 마음도 분석한다. 나누고 쪼개고,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때까지 거듭 쪼개라고 한다. 예를 들어 몸은 물질이다. 물질을 가루로 쪼개고 드틀 또는 듣글이 될 때까지 잘게 쪼갠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조각을 대(大)라고 부른다. 물질의 원소이다. 염(念)이란 글자는 말하자면 마음이나 생각의 조각이다. 더 이상 나누고 쪼갤 수 없을 때까지 나누고 쪼갠 조각이다.

전념(前念), 금념(今念,) 후념(後念)이 염염에 그지없는 좋은 일을 사량하며, 그지없는 모진 일을 사량하는지라, 염염이 옮아 흘러, 일어나고 없어져 머물지 않는다. 이렇듯 한 마음을 여러 마음이라 한다.


하마 제 마음이 부처와 다름 없음을 알고도, 다시 드틀마다 착(著) 없으며, 염(念)마다 남이 없어야, 이것이 진실의 발심(發心)이며


모깃소리는 소리의 드틀이다. 소리의 드틀이 귀를 때리면 염이 드틀에 오그라든다. 착 달라 붙는다. ‘의식의 흐름’이란 말이 있다. 불교에서는 ‘염의 옮아 흐름’이라고 한다. 아주 작고 아주 짧은 끠, 염과 염이 쉼없이 옮아 흐른다. 일어나고 없어진다. 죽지 않는 바에야 염은 쉬지 않는다. 끊이지 않는다. 무의식이란 말도 있지만, 무의식에서도 염은 흐른다. 다만 흘러가는 염, 멍청히 흘려 보내는 것뿐이다. 그러다가 모깃소리, 뭔가라도 걸리면 착 달라 붙는다. 모깃소리에 한번 받당기면, 이게 참 고약하다. 잠을 잘 수 없다. 녹초가 되어 골아 떨어지더라도 꿈이라도 꾼다. 잠을 설친다. 중생의 마음이란 게 이렇다. 염이 드틀에 받당긴다.

지나간 마음을 어루 득(得)지 못하리며, 나타 있는 마음을 어루 득지 못하리며, 아니왰는 마음을 어루 득지 못하리니


점심(點心)이란 말이 있다. 낮에 먹는 밥이다. ‘마음에 점을 찍다’란 뜻이다. 본래는 끼니 사이에 간단히 배고픔을 때우는 음식, 간식이나 스낵을 가리키던 말이다. 득(得)이란 글자, ‘얻다’로 새기기도 하고 ‘찾다’로 새기기도 한다. 점을 찍으려면 먼저 찍을 자리를 얻어야 하고 찾아야 한다. 전념(前念), 금념(今念,), 후념(後念)은 흘러 가는 염을 시간으로 나눈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과 같은 뜻이다. 마음의 흐름, 염의 흐름이라는 게 이렇다. 쉬지 않고 흘러가는 염, 찾아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점심, ‘어느 마음에 점을 찍을까?’ 이런 말도 나왔다. 점을 찍으려는 순간이 바로 받당기는 순간이다. 한번 점을 찍으면 점에 받당긴다. 한번 받당기면 가면으로 돌아가고 모깃소리로 돌아가듯, 끊임없이 점으로 돌아간다. 점에 집착한다. 염의 흐름에 혼란이 온다. 착각이나 착오, 그르 느끼고 그르 아는 탓이 된다. 까닭이 된다.

다시 일러라, 이 어떤 표격(標格)인고?

표(標)는 나토아 보람할시오, 격(格)은 나토온 법(法)이라


코끼리는 말의 프레임이다. 가면도 말의 프레임이다. 모깃소리라고 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것도 그냥 소리의 드틀이 아니다. 소리의 드틀에 붙는 까닭이 모기라는 벌레의 이름, 이 이름에 물리면 가렵다는 아롬이 걸려 있다. 가려우면 괴롭다. 이런 것도 말의 프레임이다. 표격(標格)이란 말, 냇보람이라고 새긴다. ‘말의 프레임’에 가장 가까운 우리 옛말이다. 냇보람은 말을 격(格), 틀 안에 가두는 일이다. 냇보람은 그냥 말의 뜻이 아니다. 냇보람에는 ‘사연(事緣)’이 있다. ‘일의 연(緣)’이라고 새긴다. 이 연(緣)에 여러 의미와 의도가 섞인다. 한 두마디 말에 그런 것들이 함께 담긴다. 냇보람은 그런 말이다. 받당기는 마음, 염(念)이 받당기도록 미리 짜 놓은 말이다. 말의 그릇, 말의 그물이다. 한번 오그라들면 펼 수 없다.

원숭이 똥구명은 빨개, 빨가면 사과…….


이 노래는 참 희한하다. 나는 이 노래가 말에 받당기는 염(念)의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염의 흐름이 대개 이렇다. 관찰하고 분석하는 일, 논리가 있다고 생각기 쉽다. 일관된 흐름이라고 그르 알기 쉽다. 하지만 염의 흐름은 그렇게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염과 염 사이에 온갖 것이 끼어든다. 여섯 뿌리가 쉼없이 섞인다. 똥구멍이 빨간 것과 사과가 빨간 것, 그 사이에도 여러 염이 섞여 든다. ‘빨가면 사과’, 이런 말은 그런 사이에서 내보람, 말의 프레임처럼 움직인다. 말에 받당긴다. 사과라고 다 빨갛지도 않다. 다 맛있지도 않다. 말에 받당기는 마음, 말의 드틀에 붙는 염, 그 흐름의 얼굴이 딱 이렇다. 가만히 앉아서 원숭이 똥구멍에서 사과는 맛있어로 이어지는 염의 흐름을 관찰한다. 이런 것을 명상이라고 한다. 이런 일에도 ‘가는 비의 한 맛’이 있다. 심심하면 해 보면 안다. 의심을 한다지만 쫒기지 않는다. 그래서 편안해진다. 받당기는 냇보람, 이런 식으로 관찰하면 쉽게 풀린다. 언해불전은 그런 일을 반성, ‘돌이켜 살피다’라고 부른다.

말에 받당기는 일, 뜻의 뿌리, 의근(意根)이 하는 일이다. ‘도적의 중매, 도적의 꾀’라고 했다. 말에 받당기고 냇보람에 받당기면 염은 말과 냇보람을 싸고 돈다. 자동으로 돌아간다. 그 사이에서 도적의 꾀가 나온다. 훔쳐 가고 앗아간다. 코끼리의 프레임은 미리 짜 놓은 도적의 꾀이다. 훔쳐가고 앗아가기 위해 말의 꾀를 쓰는 일이다. 사람의, 남의 받당기는 마음을 나쁘게 이용하는 일이다. 도적의 꾀, 알고도 속이고, 모르고도 속인다.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다. 이런 일을 전문으로, 밥벌이로 하는 사람들도 많다. 도적의 꾀를 알고도 부린다면, 그런 꾀로 남의 것을 앗아 먹는다면 그게 도적질이다. 도둑놈이다. 남의 입을 빼앗아 천개 만개의 입으로 쌓는다면, 도적 중에서도 상도적, 고약한 도둑놈이다. 말의 꾀, 도적의 꾀는 말노릇치고도 아주 똥 같은 노릇이다. 본래 뒷논 자유와 평등을 앗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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