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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평등

2.3 얼굴과 그르메

얼굴대가리, 말은 좀 웃겨도 이게 은근 쓸모가 많다. 이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 까닭이 있다. 달그르메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달그르메 이야기는 물론 세종의 월인천강 이야기이다. 얼굴과 대가리에 이어, 얼굴과 그르메가 마주선다. 쓸모로 치자면 이 대구가 으뜸이다. 이 대구만으로도 참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고, 추리할 수 있다. 말이 쉽고 번득하니, 이어지는 상상과 추리도 쉽고 번득해진다.

질(質)은 꾸밈없는 믿얼굴이라


얼굴과 그르메의 대구는 본질(本質)과 영상(影像)의 대구이다. 본질이 얼굴이고 영상은 그르메이다. 언해불전에서 이 대구는 정말로 중요하다. 본질과 영상의 차이, 얼굴과 그르메의 차이, 이 대구의 차이를 알아야 월인천강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월인천강과 공분제찰의 대구도 이 사이에 있다. 평등과 불평등의 대구도 이 사이에 있다. 평등하지만 평등하지 않은 세계, 평등하지 않지만 평등한 세계, 얼굴과 그르메의 대구는 평등으로 가는 길을 여는 관문이고 열쇠이다.

물 가운데 달 잡으니, 어찌 잡아 얻으리오

진실의 달이 어찌, 물 가운데 있으리


오직 어린 나비, 미친 아롬 없으면

강하회제(江河淮濟)를, 함께 통하리라


이건 『증도가남명계송(證道歌南明繼頌)』의 구절이다. 송(頌)이란 글자가 맨 뒤에 붙어 있다. 이 책은 노래책이다. 시집이다. 긴 노래에 설명도 달고, 평론도 달았다. 이 책도 세종과 두 아들이 머리를 맞대고 국어로 번역했다. 다만 중간에 세종께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번역도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런 노래, 이런 책도 참 아깝다. 우리말 번역도 아깝지만, 저런 말에 담긴 세종의 뜻도 아깝다. 나는 이 노래를 우리말의 보물창고로 여긴다. 노래가 길다 보니 우리말 번역의 사례도 넉넉하다. 한문으로 된 시의 상상, 우리말로 읽는 맛, 이것도 참 별미다.

월인천강, 얼굴과 그르메, 이 노래에서는 ‘진실의 달’과 ‘물 가운데 달’이라 나누어 부른다. ‘어린 나비의 미친 아롬’ 나비는 잔나비, 원숭이를 가리킨다. 나비에게도 헤아림이 있다. 아롬이 있다. 하늘에 보름달이 뜬다. 찻잔 위에 보름달이 어린다. 찻물에 어린 달, 이것은 달의 그르메이다. 하늘에 뜬 달에는 얼굴이 있다. 질(質)이란 글자, '몸'이라고 새기기도 한다. 하늘의 달에는 몸이 있다. 살이 있다. 산도 있고 계곡도 있다. 분화구도 있고 고요의 바다도 있다. 먼지 날리는 흙바닥도 있고, 닐 암스트롱의 발자국도 있다. 몸을 가진 달, 달의 몸, 이 것이 '얼굴'이란 말의 뜻이다. 요즘의 얼굴은 면(面)이다. 언해불전은 이 말을 '낯'이라고 새긴다. 얼굴과 낯은 아주 다른 말이었다.

만지면 만질 수 있는 덩어리, 하늘의 달에는 얼굴이 있다. 하지만 찻잔에 어린 달, 다만 영상일 뿐이다. 그르메일 뿐이다. 몸이 없다. 살도 없다. 얼굴이 없다. 이름이야 같은 달이라지만 달라도 아주 다르다. 달이 물로 온다지만, 달의 얼굴, 달의 본질이 오는 것은 아니다. 물에 오시는 달은 달빛의 그르메일 뿐이다. 그르메의 달은 진실의 달이 아니다. 얼굴이 빠진 그르메, 본질이 없는 달, 그래서 물에 어린 달은 '오셔도 오시지 않는 달'이다. 물에 비친 달은 믿얼굴, 본질이 빠진 달이기 때문이다. 믿얼굴이 빠진 달, 이 것이 '월인천강'의 뜻이다.

강하회제는 다 물 이름이다. 


옛적에 오백 나비가 있었다. 즘게 아래 우물에 달그르메가 진 것을 보고 꺼내려고 하였다. 한 나비가 나뭇가지를 잡고, 다른 나비들이 서로 꼬리를 잡아 이었다. 너무 무거워 나뭇가지가 꺽어졌다. (모두)우물에 떨어졌다.


둘째 구절은 하늘에는 오직 한 달이라 

셋째 넷째 구절은 나비의 어린 마음 없으면, 물마다 있는 달그르메가 다 진실의 달이이다.


사람들이 늘 알수 있는 성품을 배반하고, 육진(六塵)에 연(緣)하는 그르메를 마음으로 삼는다. 그 마음이 없으면 그 곳이 곧 보리(菩提)이다.


노래 아래에는 이런 설명과 평이 길게 달려 있다. 마치 월인천강에 대한 주석서를 읽는 기분이다. 얼굴과 그르메, 오셔도 오시지 않는 까닭, 평등해도 평등하지 않은 까닭, 같은 이야기, 같은 노래가 겹으로 이어진다.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란 뜻이겠다. 술에 취한 시인이 달을 건지려다 빠져 죽었다는 전설도 있다. 어린 나비도 달을 건지려다 떼로 빠져 죽는다. 취하고, 어리고, 미치고, 다 같은 소리이다. 달의 그르메에서 달의 얼굴을 찾는다. 요즘에는 '허상(虛像)을 좇다'는 말을 쓴다. 상(像)이 그르메이다. 허(虛)는 '속이 비었다'는 말이다. 속이 빈 그르메,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물이 있다면 달은 평등하게 어린다. 하늘의 달은 물을 향해 언제 어디서나 평등하게 오신다. 그러나 오시는 것은 그르메일 뿐이다. 달의 얼굴이 통째로 물로 오시지는 않는다. 알고 나면 뻔한 소리다. 본질과 영상의 차이는 본질과 허상의 차이이다. 언해불전은 이 차이를 '얼굴과 그르메'의 차이로 새긴다. 그 차이를 모른다면 그게 취하고 어린 것이다. 미친 짓을 한다. 까딱하면 빠져 죽는다.

비(譬)는 가잘벼 니를씨오, 유(喩)는 알욀씨라


『월인석보』의 풀이이다. 월인천강은 비유이다. 가잘벼 이르고 아뢰는 말이다. 달은 부처의 가르침을 가잘빈다. 이에 비해 물은 사람과 중생의 눈, 감각을 가잘빈다. 하늘의 달은 빛을 따라 물로 오신다. 부처의 가르침은 말을 따라, 소리를 따라 사람에게 오신다. 빛이 눈에 어리듯, 소리는 귀에 어린다. 빛의 그르메이고 소리의 그르메이다. 진실의 달에 얼굴이 있듯이, 부처의 가르침에도 얼굴이 있다. 부처의 소리에는 뜻이 담긴다. 의미가 담기고 의도가 담긴다. 부처의 뜻이 가르침의 얼굴이다.

물에 뜬 달에서 달의 얼굴을 찾는 일은 미친 짓이다. 미친 아롬이다. 부처의 가르침에서 가르침의 얼굴을 찾는 일도 미친 짓이다. 미친 아롬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의 감각에 어린 그르메뿐이다. 그르메에서 얼굴을 찾는 짓, 여기서 모든 문제가 생긴다. 어린 나비의 마음이라고 했다. 그르메를 ‘마음삼는다’라고도 했다. 그르메를 가지고 마음의 얼굴을 삼는다는 말이다. 빈대가리, 얼굴이 없는 것을 얼굴 삼는 짓, 어린 마음이고 미친 마음이다. 그것만 알면 그르메가 다 진실의 달이라도 했다. 얼굴과 그르메의 차이, 그 사이에서 생긴 문제, 그것만 알면 문제도 다 풀린다. 부처의 가르침이 이천년을 흘렀다지만, 어린 나비의 미친 아롬이 끊이지 않는 까닭도 가르침의 그르메를 얼굴로 삼았기 때문이다. 가르침의 얼굴, 부처의 뜻을 알면 가르침의 얼굴이 나의 얼굴이 된다. 가르침이 없어도 내가 부처가 된다. 부처의 얼굴이 된다. 얼굴과 그르메, 월인천강은 그런 비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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