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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21_01 없음에서 물어 찾지 말지니

증도가 현각의 노래


죄(罪)와 복(福)이 없으며

손(損)과 익(益)이 없으니


적멸성중(寂滅性中)엔, 물어 얻지 말지니


요 사이에 듣글 묻은, 거울을 닦지 아니하니

오늘날에 분명(分明)히, 모로매 타 가리리니


마디의 열쇠말은 적멸(寂滅)이다. 이 노래에서도, 함허의 『금강경삼가해』에서도 흔히 쓰는 열쇠말이다. 문멱(問覓), 물을 문(問), 찾을 멱(覓), 언해는 '물어 얻다'라고 새긴다. 이 '얻다'는 '찾다'이다. 이 것도 요즘과는 다른 언해불전의 말투이다. 요즘의 얻을 득(得), 언해는 이 말은 따로 새기지 않는다. 그냥 '득(得)하다'라고 넘어간다. '얻다'와 '찾다', 분명 다른 말이다. 묻는 까닭은 찾기 때문이다. 묻지도 말고 찾지도 말라고 한다.

적멸(寂滅)은 고요히 없을시니, 불성(佛性)의 가운데 한 상(相)상도 업슬시라.


이건 『금강경삼가해』의 풀이이다. 적멸(寂滅)은 '없음'이다. 앞의 마디, 언해는 '죽살이와 없음'을 마주 세운다. 생사와 열반의 짝이다. 죽살이에 붙을까, 없음에 붙을까? 남명과 언해는 죽살이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북두를 좇아 남성을 보라'고 한다. 없음을 좇아 죽살이를 보라고 한다. 이 마디의 적멸(寂滅)은 열반의 다른 말이다. 언해의 말투, '없음'의 다른 말이다. 말은 달라도 뜻은 같다. 말의 의미도 같고, 의도도 같다. 죄와 복도 없고, 손과 익도 없다. 없다고 하면서도 '물어 얻지' 말라고 한다. 물어 얻는 일도 하욤이다. 듣글 묻은 거울도 닦지 않는다고 한다. 이건 '하욤 없음'이다. 이게 다 뭔 소리야?

오늘날에 분명(分明)히, 모로매 타 가리리니


부석(剖析), 쪼갤 부(剖)에 쪼갤 석(析), 하나는 '타다'라고 새기고, 다른 하나는 '가리다'라고 새긴다. 요즘에는 분석이란 한자말을 쓴다. '타 가림', 이것도 언해불전의 말투이다. 분석과 타 가림, 나는 세종의 실험이라고 부른다. 요즘엔 분석이란 말, 누구도 새기려 들지 않는다. 분석이란 말, 그대로 우리말이다. 뻔한 우리말, 구태여 새길 필요가 없다고 한다. 15세기 조선의 말투는 어땠을까? 언해는 왜 이런 말을 구태여, 잇비, 새기려 들었을까? 이런 사례가 너무도 많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도 멈출 수가 없다.

영가현각은 '타 가리겠다'고 한다. '없음'을 타 가리겠다는 말이다. '없음'을 묻지도 말고 찾지도 말라고 한다. 그 까닭을 쪼개고 쪼개어 분명히 가리겠다고 한다. 이건 '알게코'의 말투이다. 죽살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들, 그런 이들이 너무도 많다. 벗어 나는 일, 죽살이와는 다른 쪽을 바라 본다. 다른 쪽을 향하여 다른 쪽을 찾는다. 부처와 조사를 바라보고, 그들로부터 열반과 적멸을 찾는다. 그러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죽살이에 지친 사람들이야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부처와 조사의 말을, 열반과 적멸로 가리키는 스승들도 너무 많다. 그런데 영가의 노래는 도리어 그런 스승들을 향한다. 적멸과 열반에 붙으라는 말, 그런 말을 쪼개고 또 쪼개겠다고 한다. 언해는 그런 말을 사(邪)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건 정(正)과 사(邪)의 짝이다. 정파와 사파, 무협지에서도 심한 욕이다. 없음에 붙는 이들, 심하게 탓한다.

죄와 복도 없고, 손과 익도 없다. 이건 영가의 말이다. 부처도 조사도 이런 말을 한다. 요즘엔 기회주의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복을 좇아 죄를 짓고, 익을 좇아 손을 끼치는 이들도 무척 많다. 그런 이들이 들으면 신이 날 말이겠다. 실제로 불교라는 이름을 걸고, 이런 말을 그런 뜻으로 써 먹는 이들도 적지 않다. 죄를 짓고도 복을 찾는다. 제 이익이 바로 남의 손임을 억지로 모른 체 한다. 죽살이를 벗어나는 일, 그런 기회주의의 일은 물론 아니겠다. 영가의 노래는 이어진다. 언해의 풀이도 따라서 이어진다. 헷갈리는 말, 분명히 타고 쪼갠다. 없음에서 물어 찾지 말라고 한다. 없음이 궁금하거든, 죽살이를 보라고 한다. 죽살이도 없음도 짝의 말투이다. 브터니닷, 짝을 잊으면 말도 잊고 뜻도 잊는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