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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08_03 본질과 영상

증도가 현각의 노래

법신(法身)을 각료(覺了)하면 무일물(無一物)하니

법신을 알면, 한 것도 없으니


물(物)은 물건이다. 사물이다. 언해는 그냥 '것'이라고 새긴다. 모든 이야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부처도 '것'이고 사람도 '것'이다. 사람의 이야기에서 '것'이 빠질 수 없다. 이 이야기도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것'을 싸고 돈다. 그런데 '한 것'도 없다고 한다. 이것도 하나의 말투이다. 말투에도 뿌리가 있고, 바탕이 있다. 뿌리와 바탕을 모르면 헷갈릴 수 밖에 없다.

무형(無形)호되 환유상(還有像)하시니,

얼굴 없으되 도리어 얼굴 겨시니,


'얼굴 없으되 얼굴 겨신' 부처, 도대체 이건 무슨 소리일까? 요즘엔 모순이란 말을 쓴다. 말이 되지 않는 말이다. 그래도 이런 말투가 거듭 이어진다. 이게 참 만만치 않다. 먼저 형(形)상(像), 이 두 글자를 모두 '얼굴'이라고 새긴다. 그런데 사전만 찾아 보더라도 이 두 글자의 뜻이 다르다. '형(形)과 상(像)' 그리고 '얼굴', 대역(對譯)을 한다지만 대역 조차 쉽지 않다. 헷갈리는 말, 한마디를 두고 그간 너무 빙빙 돌았다. 이젠 바로 가리고 들어 가자. '얼굴 없으되 얼굴 겨신', 이런 말투는 '본질(本質)과 영상(影像)'의 짝에서 비롯했다. 부처와 중생의 만남, 그 사이를 이어 주는 '니롬=이름', 함허는 이 것을 교화(敎化)라고 부른다. 부처의 가르침, 불교이다. 부처의 가르침을 본질교(本質敎)와 영상교(影像敎)로 나누어 읽는 전통이다.

본(本)과 그리메의 다름이 있다.

본(本)과 그리메의 다름이 네 구(句)가 있으니,


하나는 ‘오직 본(本)’이오, 그리메 없으니,

이른바 곧 소승교(小乘敎)이다.


부처가 이르신 교(敎)가 오직 이 심식(心識)의, 변한 그리메의 상(像)인 줄을 알지 못하고, 내 마음 밖에 각별히 불교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오직 본(本)’이라 한다.


둘은 ‘또 본(本)’이오 또 그리메니,

곧 대승(大乘)의 시교(始敎)이다.


부처가 스스로 이르신 문(文)과 의(義)는, 모두 묘관찰지(妙觀察智)에 상응(相應)하는 좋은 식(識)에서 나토신 것이니, 이름이 본질(本質)의 교(敎)이다. 하다가 들을 사람의 식(識)에서 변(變)한 문과 의는 이름이 그리메의 상(像)의 교(敎)이다.


셋은 ‘오직 그리메’오, 본(本) 없으니,

곧 대승(大乘)의 실교(實敎)이다.


중생의 마음을 여의면 불과(佛果)에 각별한 색성(色聲)의 공덕이 없으시고, 오직 여여(如如)와 여여지(如如智)만이 겨시니, 오직 대비(大悲)와 대지(大智)가 증상연(增上緣)이 되어, 저 화(化)하시는 근(根)이 익은 중생으로 심중(心中)에 ‘부처의 색성(色聲)으로 설법하심’을 드러나게 한다. 그러므로 부처의 교(敎)는 오직 이 중생 심중의 그리메의 상(像)이다.


넷은 ‘본(本) 아니며’, 그리메 아니니,

곧 돈교(頓敎)이다.


마음 밖에 부처의 색성(色聲)이 없을 뿐 아니라, 중생의 심중에 그리메의 상(像)도 또 공(空)하다. 성(性)이 본래 여읜 젼차로 말 잊으며 사량(思量) 그치니, 곧 교(敎) 없는 교(敎)이다.


이건 『원각경언해』의 구절이다. 함허의 '만남과 니롬'의 뿌리가 이 곳이다. '니롬', '이르다'는 동사이다. '니롬'은 말씀을 통해 이뤄진다. '말을 이른다'. 이 구절은 '말을 통해 이뤄지는 가르침'의 모습을 가리는, 긴 논증의 한 부분이다. 한자말로는 교체(敎體)라는 말을 쓴다. '가르침의 몸'이다. 부처의 가르침, 부처의 말씀, 말씀의 몸을 '본질'과 '영상'의 관계로 풀이한다. 불교의 논증은 '2분법'을 바탕으로 한다. 나는 불교의 이분법을 '작대(作對)의 방법'이라고 부른다. '짝을 지어 가려 푸는 방법'이다. 본질이란 말도 '본(本)과 질(質)'의 짝이다. 영상은 영(影)과 상(像)의 짝이다. 『원각경언해』는 먼저 본(本)과 영(影)의 짝을 가린다. 본영(本影)의 짝은 사구(四句), 네 개의 구절로 확장된다. '오직 본'의 구절과 '오직 그리메'의 두 구절, '또 본, 또 그리메', '본 아니며, 그리메 아니니'의 두 구절을 더 한다. 이 또한 불교 전통의 논리와 방법을 우리말로 읽는 언해불전의 말투이다. 부처와 중생, 또는 부처와 사람도 짝이다. 부처는 이르고, 중생은 듣는다. 이 것은 설(說)과 청(聽), '니롬'과 '드롬'의 짝이다. '니롬'과 '드롬'의 관계를 본영(本影)의 네 구절로 풀이한다.

유본무영(唯本無影) 오직 본(本)이오, 그리메 없으니, 소승교(小乘敎)
역본역영(亦本亦影) 또 본(本)이오, 또 그리메니, 대승(大乘)의 시교(始敎)
유영무본(唯影無本) 오직 그리메오, 본(本) 없으니, 대승(大乘)의 실교(實敎)
비본비영(非本非影) 본(本) 아니며, 그리메 아니니 돈교(頓敎)

긴 논증, 일일이 따질 겨를은 없다. 여기서는 다만 본(本)과 영(影)의 짝을 살피길 바란다. '달과 물의 가잘빔으로 돌아가 보자. 하늘의 달이 물에 어린다. 하늘의 달도 '것'이다. 물건이고 사물이다. 달이라는 것, 실재한다. 진실로 있다. 그 달에는 몸이 있다. 제 몸이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체(體), 또는 자체(自體)이다. 달 자체, 달의 몸이 물에 어린다. 어림은 영(影)이다. 그리메, 또는 그르메이다. 그리메는 홀로 있을 수 없다. 짝으로만 존재한다. 그리메를 있게 해 주는 짝이다. 하늘에 있는 달이 그리메의 짝이다. 그래서 그리메의 짝을 본(本)이라고 부른다. 본전이란 말이 있다. 믿천 또는 밑천이라고 새긴다. 본래(本來)는 '본(本)으로부터 오다'는 뜻이다. '본래의 달'은 '그리메의 달'의 '믿', 또는 '밑'이다. 영(影)은 본(本)'으로부터' 왔다. 본(本)은 영(影)의 원인이다. 그리메는 본의 결과이다. 달과 물 사이에서 생긴 일, 본(本)과 영(影)의 짝은 '두 것' 사이의 관계를 뜻한다.

물 가운데 달 잡으니, 어찌 잡아 얻으리오

진실의 달이 어찌, 물 가운데 있으리


오직 어린 나비, 미친 아롬 없으면

강하회제(江河淮濟)를, 함께 통하리라


이 것도 『증도가남명계송』의 구절이다. '물 가운데 달'과 '진실의 달'을 가린다. 어린 나비는 '두 것' 사이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 물 가운데 달이 그리메인줄 알지 못한다. 그 달이 진실의 달로부터 온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물 가운데 달'을 잡으려고 물 속으로 들어 간다. 본과 영이 짝이라면, 영(影)과 상(像)도 짝이다. 이 때는 '그르메의 상(像)'이라고 읽어야 한다. 영(影)이란 글자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영(影)의 결과가 상(像)이다. 물에 찍힌 그림이고 이미지이다. 하지만 상(像)이란 글자는 홀로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어린 나비도 취한 시인도 달을 잡으러 물 속으로 들어 간다. 그들에게 '물 속의 달'은 자체를 가지고 실재한다. 상(像)이란 글자, 본(本)을 알면 그리메라 읽는다. 달과 물을 짝으로 읽는다. 본(本)을 모르면 얼굴이라 읽는다. 상(像)에는 자체, 제 몸이 있다.

무형(無形)호되 환유상(還有像)하시니,

얼굴 없으되 도리어 얼굴 겨시니,


이제 함허의 말투로 돌아가 보자. 형상(形像)의 짝을 노래한다. 두 글자를 모두 '얼굴'이라고 새긴다. 형(形)은 '하늘의 달'에 속한다. 이에 비해 상(像)의 '물 가운데 달'에 속한다. 얼굴이란 말은 잊혀진 말이다. 이 말은 함허의 말투, 언해불전으로 말투로 들어 가는 열쇠말이다. 이 말은 자체(自體), 제 몸을 읽는 열쇠말이다. 달에는 몸이 있다. 살이 있다. 예를 들어 본질(本質)이란 말, '본래의 읏듬'이라고 새긴다. 본이라는 글자는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로부터'를 가리킨다. 질(質)은 몸이고 살이다. 몸과 살의 읏듬이 '얼굴'이다. 몸과 살을 대표하는 속성이 바로 '얼굴'이다. 달에는 몸이 있다. 얼굴이 있다. 물 가운데 달에도 얼굴이 있다. 본(本)을 모르면 '물 가운데 달'이 그리메인줄 모른다. '그리메의 상(像)을 얼굴로 착각한다.

하나는 ‘오직 본(本)’이오, 그리메 없으니,

이른바 곧 소승교(小乘敎)이다.


부처가 이르신 교(敎)가 오직 이 심식(心識)의, 변한 그리메의 상(像)인 줄을 알지 못하고, 내 마음 밖에 각별히 불교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오직 본(本)’이라 한다.


부처의 말씀은 몸을 가진, 얼굴을 가진 부처로부터 나왔다. 부처가 본이다. 그 말씀이 중생의 귀에 어리고, 심식(心識)에 어린다. 듣는 이의 귀와 심식, 여기에도 몸이 있고 얼굴이 있다. 부처의 말씀은 듣는 이의 사유와 삶을 바꾼다. 말씀도 몸으로 실재한다. 말씀에도 얼굴이 있다. 저 네가지 구절은 부처의 말씀이 중생에게 작용하고 작동하는 원리를 따진다. 그 관계를 '얼굴과 그리메'의 관계로 풀이한다. 물에 어린 달은 다만 그리메일 뿐이다. 그런데 물에 어린 그리메의 상(像)에는 얼굴이 있다. 미친 나비는 그 얼굴을 잡으려 물 속으로 들어 간다. 부처의 말씀을 듣는 이들, 이들이 가진 것도 그리메일 뿐이다. 그런데 그 그리메의 상(像)에도 얼굴이 있다. 듣는 이들은 그 얼굴을 잡으려 가르침 속으로 들어 간다. 얼굴과 그리메의 관계, 그걸 알면 그들의 '심중(心中)에 부처의 색성(色聲)으로 설법하심’을 알게 된다.

얼굴 없으되 도리어 얼굴 겨시니,


요즘의 말투로 따지자면 이 말은 모순이다. 하지만 저 말투, 말씀의 본질을 가린다. 말씀의 믿얼굴을 가린다. 말씀에도 얼굴이 있다. 그 얼굴을 따지려면 얼굴의 짝을 가려야 한다. 몸을 가진, 얼굴을 가진 부처의 말씀, '색성(色聲)으로 설법하심'이라고 부른다. 색성의 얼굴이다. 그런데 색성에는 얼굴이 없다고 한다. 색성의 본을 알기 때문이다. '-로부터'를 알면 얼굴이 없다. 마찬가지로 색성의 니롬으로 온 말씀의 그리메에도 얼굴이 없다. 부처에게도, 말씀에게도, 가르침에게도 얼굴이 없다. 그런데 중생에게 어린 '말씀의 상(像), 그리메의 상(像)에는 얼굴이 있다. 그 얼굴이 가르침으로 작용한다. 그리메의 상(像)이 중생과 세계를 바꾼다. 이 말투를 따라가면 본질과 영상은 모순이 아니다. '얼굴 없으되 도리어 얼굴 겨시니', 저 네 구절을 가려 읽는 말투이다.

얼굴과 그리메(그르메)의 말투, 이제는 아주 잊혀진 말투이다. 이 말투는 네 구절의 말투로부터 왔다. 부처의 말투, 『금강경』의 말투, 『증도가』의 말투로부터 왔다. 그 말투를 읽는 우리말투, 잊혀진 말투를 풀어 보자니 말이 늘어지고 말았다. 낯선 말투지만 읽다 보면 익숙해진다. 서두를 건 없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