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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道를 證한 노래는

008_02 말로 통하는 길

증도가 현각의 노래

본원천진(本源天眞)이 시(是)아? 상호엄신(相好嚴身)이 시(是)아?

일신(一身)에 분작양향심(分作兩鄕心)이로다.


본래의 근원 천진이 이아(이 것인가)? 상호로 장엄한 몸이 이아?

한 몸에 두 가지 마음을 나누어 짓도다.


무형(無形)호되 환유상(還有像)하시니,

봉인(逢人)하야 설시비(說是非)하시나니라.


얼굴 없으되 도리어 얼굴 겨시니,

사람 만나서는 시비(是非)를 이르시나니라.


세종과 두 아들이 국어로 번역했다는 『금강경삼가해』와 『증도가 남명계송』, 말투가 닮았다. 함허는 『금강경』의 부처를 '얼굴 없으되, 얼굴 겨신' 부처로 읽는다. 이것은 『금강경』의 말투를 읽는 함허의 말투이다. 『증도가 남명계송』은 함허의 말투를 따라 『증도가』의 말투를 읽는다. 이 말투의 관계, 또는 말투의 흐름을 모르면, '무형(無形)호되 환유상(還有像)하시니', 또는 '얼굴 없으되 도리어 얼굴 겨시니', 이 구절의 흐름을 알기 어렵다. 형상(形像)의 대구를 그저 '얼굴'이라고 읽는 까닭을 따라가기 어렵다. 함허는 두 가지 전제를 꼽는다. 하나는 '사람을 만나는 부처'이다. 다른 하나는 '시비를 이르는 부처'이다. 사람에게 부처가 부처인 까닭은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옳고 그름을 이르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고, 시비를 이르는 부처는 '몸을 가진 부처'이다. 몸을 가진 부처가 몸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 몸을 가진 부처가 몸을 가진 사람에게 옳고 그름을 가려 이른다. 부처의 얼굴은 '만남'과 '이름'의 조건이다.

세간(世間)과 세간(世間)에 남이 다 교화(敎化)하시는 법(法)이시니, 비록 이 같으나 묘(妙)한 상(相)은 얼굴이 없고, 진실(眞實)의 이름은 자(字)가 아니니, 얼굴과 이름 어느 곧으로 시러 오니오?


출세(出世)를 '세간(世間)에 남'이라고 새긴다. 세(世)와 출세의 일이 모두 '교화(敎化)하시는 법(法)'이라고 한다. 함허는 이 일을 '오다'라고 읽는다. 부처가 사람을 만나고 시비를 이르는 일은 부처가 사람에게 '오는' 일이다. 그런데 그 부처에게 얼굴이 없다면 어떨까? 얼굴없는 부처가 이르는 말이 글자도 아니고 이름도 아니라면 또 어떨까? 가(可)를 '시러'라고 읽는다. 이것도 언해의 말투이다. 그렇다면 부처는 '어떻게' 사람에게 올 수 있을까? 함허의 물음이다. 어떻게 만날 수 있고, 어떻게 이를 수 있을까? 부처는 사람을 만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사람은 부처를 만난다. 부처가 사람을 만나고, 사람이 부처를 만나고, 그 사이에 설(說), '이르다'가 있고, 말씀이 있다. 부처와 사람은 말로 만난다. 서로 만나는 일은 서로 '통(通)'하는 일이다. 세종의 말투는 '서르 사맛디'이다. 부처와 사람이 '서르 사맛는 일', 요즘 말로는 '소통'의 가능성이다. 형상(形像)이란 말도, 얼굴이란 말도 이 물음을 전제로 읽어야 한다. 부처와 사람이 서로 만나는 일이고, 서로 통하는 길이다.

가람이 달을 혀옴을 인하지 않으면, 만 가지로 응(應)하시는 줄 어찌 알리오?

만 가지로 응하시니, 몇마의 인천(人天)이 말씀 아래 갈 줄을 알며, 몇마의 마(魔)의 무리가 사(邪)를 돌이켜 정(正)에 돌아 가느뇨?


함허의 노래, 함허는 다시 묻는다. 언하(言下)는 '말씀 아래'라고 새긴다. '옳고 그름의 말씀', 말을 하자 마자 알아 듣는다. 말을 듣자 마자 돌이켜 고친다. 얼마나 많은 사람과 하늘과 마의 무리가 알아 듣고, 그름을 돌이켜 고쳐, 옳음 또는 바름으로 '돌아 가느뇨?' 함허에게는 이 것이 '통(通)'이다. 세종에게는 이 것이 '서르 사맛다'이다. 시비를 가리는 말의 쓰임새이다. 말로써 그름을 돌이키고 고쳐서, 바름으로 돌아 가는 길이다.

'가람이 달을 혀다', 초(招)를 '혀다'라고 새긴다. 가람이 달을 부른다. 이 것이 원인이다. 달이 가람에 어린다. 이 것은 응(應)이다. 동서남북 어디에서나, 가람이 부르면 달이 어린다. 중생의 부름에 만 가지로 응하는 부처의 '만남'이고 부처의 '이름'이다. 이야기는 다시 '월인천강'으로 돌아간다. 함허는 '부처와 사람이 만나는 일', '부처와 사람이 통하는 길'을 '월인천강'에 가잘빈다. 비유한다. 이 비유를 따라 세종은 '월인천강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가람은 달을 부르고, 달은 가람에 어린다. 사람은 부처를 부르고, 부처는 사람에게 오신다. '부처와 사람이 말로 통하는 길'은 '어린 백성이 말로 사맛는 길'로 이어졌다. 유통의 길이고 소통의 길이다. 말씀이 길이다. 말씀을 고치면 삶도 고칠 수 있다. 요즘 말투를 따르자면, 함허의 물음과 세종의 길은 사상이고 철학이다. 존재와 인식, 실천과 혁명을 차례로 가린다. 뿌리도 단단하고 줄기나 몸통도 번득하다. 우리말투로 이르는 우리의 철학이다.

달이 물에 어리는 일, 부처가 사람을 만나 시비를 이르는 일, 함허는 교화(敎化)라고 부른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는 '화신(化身)', 몸으로 돌아간다. 사람에 어리고 시비를 이르는 몸은 '된 몸'이다. 함허는 『증도가』, 영가의 말투를 이어 천진(天眞)한 몸과 '된 몸'을 가린다. 영가의 『증도가』, 천진한 몸은 '법신(法身)'이다. 언해는 이 말을 '법으로 된 몸'이라고 읽는다. 환화(幻化)의 몸은 '곡도로 된 몸'이다. '곡도로 된 몸'은 '빈 몸'이라고 한다. 그리고 '곡도로 된 빈 몸'이 곧 '법으로 된 몸'이다. 언해불전의 '얼굴'이라는 말, 그 말의 뜻도 이 사이에서 찾아야 한다. 얼굴 없는 부처와 얼굴 있는 부처의 차이, 함허는 그 사이에서 만남의 가능성, 소통의 가능성, 그름을 옳음으로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다. 얼굴이란 말의 쓰임새도 그 사이에 있다. 얼굴을 알면 사람의 삶을, 사람의 세계를 뒤집을 수 있다. 몽땅 고칠 수 있다.

증도가, 그대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