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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평등

2.5 마음이 이 불휘니

심시근(心是根)

법시진(法是塵)

양종유여경상흔(兩種猶如鏡上痕)

흔구진제광시현(痕垢盡除光始現)


마음이 이 불휘니

법이 이 듣글이니

두 가지가 거울 위의 허물 같으니

허물과 때 다 덜면 빛이 비로서 낟나니


불휘는 뿌리의 옛말이다. 보고 듣는 내 몸의 근(根)은 뿌리이다. 마음을 뿌리라고 한다. 풀뿌리에서 싹이 튼다. 뿌리로부터 나고 자란다. 내 몸의 뿌리에서도 싹이 튼다. 나고 자란다. 근(根)과 진(塵), 뿌리와 드틀이 비비고 버므는 사이에 식(識)이 싹튼다. 아롬이다. 뿌리와 드틀과 아롬의 일이다. 내 몸에는 여섯가지 뿌리가 있다. 여기에 여섯가지 드틀이 버믄다. 그리고 여기서 여섯가지 아롬이 싹튼다. 세짝으로 얽힌 여섯, 이걸 다 합하여 18계(界)라고 부른다.

육진(六塵)의 연영(緣影)으로 제 마음의 얼굴을 삼기 때문에……

연(緣)은 육진에 버믈시니, 육진에 버므는 마음은 그르메 같아 실(實)하지 않다.


뿌리와 드틀이 버믄다. 그 버므는 자리, 느낌의 계, 아롬의 계, 그 버므는 그르메로 제 마음을 삼는다. 버므는 일로 마음의 얼굴이라고 믿는다. 눈의 뿌리를 거울에 가잘빈다. 허물은 거울의 허물이다. 밖으로부터 오는 가느다란 드틀, 허물에 쌓이고 엉기면 때가 된다. 허물에 때가 엉기면 닦아도 잘 닦이지 않는다. 거울의 그르메는 점점 흐려진다. 내 몸의 뿌리에도 허물이 있다. 허물이 많을수록 때가 엉기기 쉽다. 허물과 때, 그르메를 그르 보고, 구태여 붙드는 까닭이 된다. 망상과 집착이다.

안의 드틀을 들이켜 가져, 보며 드롬이 류(流)가 못미칠 땅에 역류(逆流)함을 일러 아는 성(性)이라한다.


법(法)을 안의 드틀이라 이른다. 곧 과거 제법(諸法)의 그르메 상(像)이 이것이다.


의(意)가 법진(法塵)에 착(著)하여 상(想)하는 상(像)이 안에 발(發)할새, 이런다로 이르기를 안의 드틀을 들이켜 가진다고 했다.


육근(六根)은 여섯 뿌리이다. 눈, 귀, 코, 혀, 몸(살)의 다섯 뿌리, 이건 쉽다. 오감을 느끼는 감각기관이다. 달이 물에 어리듯, 나의 눈동자에도 어린다. 말씀은 귀청을 두드리고 귀청에 어린다. 눈은 빛에, 귀는 소리에, 코는 냄새에, 혀는 맛에, 살은 닿음에 대응한다. 근을 자극하는, 뿌리를 찌르는 몸 밖의 물질이다. 물건의 얼굴이다. 몸 밖의 물질이 몸의 뿌리를 찌른다면, 그 때 그 물질을 근의 대상(對象)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걸 불교에서는 진(塵), 드틀, 또는 듣글이라고 부른다. 이 것도 뭐 어려울 게 없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여섯째 뿌리, 의근(意根)을 나란히 세운다. 요즘의 과학으로 치자면 우리의 골, 두뇌에 해당한다. 감각기관과 골을 나란히 가린다. 요즘의 상식으로 보자면 이건 좀 뜻밖이다. 뭔가 이상하다. 여섯 뿌리를 나란히 가리는 까닭은 여섯 뿌리가 단단히 얽혀 있기 때문이다. 나란히 움직이기 때문이다. 드틀은 뿌리에 그르메로 어린다. 그르메는 너굠으로 다시 아롬으로 이어진다.

법(法)이 이 듣글이니


눈은 빛과 색에 버믄다. 귀는 소리에 버믄다. 이에 비해 의근은 법(法)에 버믄다. 법은 물건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자성(自性)이란 말을 즐겨 쓴다. 예를 들어 소금이란 물건, 희고 단단하고 반짝이는 결정이다. 물에 녹는다. 입에서 녹으면 짜다. 짐승은 소금을 먹어야 산다. 이런 게 다 이 물건에 속한 자성이다. 이런 속성은 감각 또는 경험으로 이어진다. 느낌과 그르메를 거치고 너굠-여김을 거치며 의근이 작용한다. 의근은 느낌과 여김을 틀 안에 가둔다. 희다, 녹는다, 짜다 등의 속성이다. 여러 속성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읏듬’이라고 부른다.

나무의 읏듬을 이르되 간(幹)이요, 풀의 읏듬을 이르되 경(茎)이니, 다 불휘를 붙어 서나니


목질(木質)과 초질(草質), 질(質)이란 글자를 '읏듬'이라고 새긴다. 질(質)은 물건의 얼굴이다. 나무의 얼굴, 줄기나 몸통을 가리킨다. 근본(根本)이란 말을 '뿌리와 읏듬'이란 대구로 나누어 새긴다. 나무나 풀, 물건의 연원이나 기초를 따지자면 뿌리가 된다. 그리고 물건의 몸통, 본질이나 본체를 따지자면 읏듬이 된다. 뿌리와 읏듬의 대구, 한자말을 다루는 발상이 지금과는 아주 다르다. 소금은 짜다. 이런 속성은 소금이란 물건을 대표한다. 소금을 소금이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속성, 이런 속성을 체(體)라고 부르고 ‘읏듬’이라고 새긴다. 소금의 읏듬은 ‘짜다’는 속성이다. 체용(體用)이란 대구도 의근이 물질을 분석하고 헤아리는 방법이다. 용이라는 글자는 ‘씀’이라고 새긴다. ‘읏듬과 씀’의 대구이다. 소금의 읏듬은 ‘짜다’이고 소금은 씀은 간을 맞추는 것이다. 의근은 이런 일을 한다. 의근이 법이라는 듣글, 드틀에 버므는 일, 이런 일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엇뎨어뇨 법(法)이 제 이름을 못하여, 이름을 붙어 법을 니라나니, 법이 하마 법이 아니며, 또 이름도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법에 당(當)하지 않으며, 법이 이름에 당하지 않아……


눈을 찌르는 것은 빛이나 색이다. 눈에 마주선 빛과 색의 드틀이다.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뿌리는 몸 밖의 물건을 상대한다. 다섯 뿌리는 오근(五根)이다. 오근으로부터 오감(五感), 다섯가지 느낌과 너굠이 나온다. 그런데, 의근(意根), 뜻의 뿌리는 법(法)을 상대한다. 법을 말에 가두면 이름이 된다. 뜻의 뿌리는 법과 법의 이름을 드틀삼아 사랑한다. 사유한다. 그런데 몸 밖의 물건에는 얼굴이 있다. 하늘의 달에도 얼굴이 있다. 얼굴이 있다면 실(實)하다. 그래서 얼굴을 가진 달을 진실의 달이라고 부른다. 얼굴이 없다면 허(虛)하다. 물에 비친 그르메의 달에는 얼굴이 없다. 그래서 진실의 달과 그르메의 달을 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근이 사랑하는 법의 드틀은 어떨까? 법의 드틀에도 얼굴이 있을까?

법을 드틀이라고 하지만, 이 드틀은 물건이 아니다. 이 드틀은 그르메로부터 온 것이다. 눈, 귀, 코, 혀, 몸의 느낌으로부터 지어낸 것이다. 하늘의 달이나 소금과는 질이 다르다. 눈은 빛과 색의 드틀에 버믄다. 빛의 드틀은 몸 밖의 물질, 몸 밖의 얼굴로부터 온다. 몸의 뿌리와 몸 밖의 드틀이 버믄다. 법은 그 사이에서 생겨난 것이다. 드틀의 그르메로부터 느낌과 너굠을 거쳐 지어낸 것이다. 그래서 법의 드틀은 이미 몸 안에 있다. 뜻의 뿌리와 법의 드틀은 몸 안에서 버믄다. 그래서 ‘안의 드틀’이라고 부른다.

안의 드틀이라고 하지만, 이 드틀은 대개는 내 스스로 지어낸 것들은 아니다. 사람들은 모여 산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자리, 나라라고 부른다. 모여 사는 사이에 경험이 쌓인다. 경험과 아롬은 기억으로 쌓인다. 나라의 기억, 나라의 생각이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이런 생각을 배우고 익힌다. 그래서 안다. 나라의 생각, 사람의 생각이 나의 생각으로 내 안에 쌓인다. 법이나 이름은 그렇게 정해지고 전해진다. 지금 내가 보고 듣는 사이에, 의근(意根), 뜻의 뿌리가 함께 버문다. 안의 생각, 안의 드틀이 움직인다. 보고 들은 그르메가 법의 드틀, 안의 드틀과 얽힌다. 뜻의 여김이 일어나고 뜻의 그르메로 어린다.

밖의 것을 보고 들은 그르메, 이걸 거슬러 안의 드틀에 버므는 일을 역류(逆流)라고 부른다. 안과 밖을 뒤집고 거스르는 일이다. 뒤집어 버므는 일이다. 다섯 뿌리는 그르메를 향한다. 그르메를 통해 몸 밖의 다섯 드틀을 향한다. 뜻의 뿌리는 방향을 바꾼다. 밖으로 향하던 몸을 안으로 돌린다. 몸안의 드틀을 향한다. 이것이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다. 몸을 틀면 오근과 오감의 그르메로부터 멀어진다. 이 자리는 오감의 그르메가 미치지 못하는 자리이다. 같은 뿌리에서 시작한 일, 뜻의 뿌리는 몸을 돌렸어도 몸을 돌린 줄 모른다. 그리곤 역류를 일러 아롬이라고 구태여 이름한다.

소금이라는 이름도, 짜다라는 속성도 뿌리와 드틀 사이에서 생겨났다. 뿌리와 드틀이 마주 서는 자리에서 나왔다. 뿌리와 드틀이 마주 향하는 것, 이것이 본래의 흐름이고 순한 흐름이었다. 그런데 뜻의 뿌리는 방향을 안으로 돌린다. 본래의 드틀을 벗어나 안의 드틀을 향한다. 안의 드틀과 버믄다. 소금이라는 이름과 짜다는 법, 읏듬과 씀에 버믄다. 그러면서 본래의 드틀과 점점 더 멀어진다. 구태여 여기고 구태여 이름지은 일도 점점 더 멀어진다. 망상과 집착도 따라서 심해진다. 멀어질수록 돌아가기 어렵다. 돌아가 다시 살피지 않는다면 그릇된 것을 고칠 수 없다.

근(根)과 경(境)은 안의 육근(六根)과 밖의 육진(六塵)이다. 육식(六識)은 서로 좆는다. 법(法)은 근(根)과 진(塵)과 식(識), 이 셋이 다 법이다. 비비어 괴이하다고 한 것은 눈을 비비어 괴이함을 낸다는 것이다. 근과 경과 법 사이에 보고 듣고 아롬에 짓는 바와 하는 바가 모두 다 비비어 괴이함이다.


그르메의 일이 섞이고 벌린다고 한 것은 육진에 연(緣)하는 그르메로 나의 마음을 삼는다면, 육진이 다 그르메이니, (앞의) 다섯 식(識)이 진(塵)을 취하여, 육식(六識)이 나누어 가리기 때문에, 그르메의 일이 섞어 벌린다고 하였다.


이것은 앞에 이야기 했던 ‘속절없이 비벼 괴이하니’란 노래의 풀이이다. 근(根)과 진(塵)과 식(識), 뿌리와 드틀과 아롬이다. 뿌리와 드틀이 비비고 버믄다. 비비고 버므는 사이에 아롬이 좇는다. 이런 일을 영사(影事), 그르메의 일이라고 부른다. 얼굴과 그르메의 사이, 밖의 드틀과 안의 드틀 사이에서 망상과 집착이 생겨난다. 비비어 괴이함이 생겨난다.

우섬직다, 환사(幻師)가 환물(幻物)을 만나

제 보고 의심(疑心)하야 두륨 마로 아디 몯하나다


가소(可笑)를 우섬직다라고 새겼다. 사전에는 ‘같잖아서 우스운 데가 있다’라고 풀이한다. 그르메의 일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를 다시 환(幻)이란 글자에 가잘빈다. 환사(幻師)는 환을 지어내는 사람이다. 요즘엔 마술사라는 직업이 있다. 고대 인도에는 환사라는 직업이 있었다. 마술이란 말은 마귀나 악마를 연상케 한다. 신비한 힘의 기댄 신비한 짓이다. 예전에 일류져니스트(Illusionist)란 영화가 있었다. 환이나 환사는 이런 영화에 가깝다. 착각이나 착오를 이용하는 일이다. 언해불전은 환(幻)이란 글자를 ‘곡도’라고 새긴다. 실제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지어내는 일이다. 환물(幻物)은 환사가 지어낸 물건이다. 환사가 환으로 범을 지어낸다. 환으로 만든 물건, 그것도 제 스스로 만든 범, 도리어 깜짝 놀라 벌벌 떤다.

마음이 이 불휘니


내 몸의 뿌리가 안과 밖의 드틀과 비비고 버믄다. 그런 일이 그르메의 일이다. 그런 일을 가리켜 마음이라고 부른다. 마음도 법이고 이름이다. 그르메의 일을 두고 구태여 짓고 세운 이름이다. 법으로 세우고, 이름을 달면, 얼굴이 생긴다. 그르메의 일이 마음의 얼굴이 된다. 실제로는 없었던 것을 제 스스로 짓고 세웠다. 그래서 곡도라고 한다. 마음의 얼굴은 뿌리가 되어 다시 드틀에 비비고 버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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