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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자유

3.8 말이 읏듬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

말씀의 길이 긋고, 마음 녈 곳이 없을새


15세기의 이런 번역, 그냥 보기만 해도 속이 편하다. 긋다, 녀다, 이런 말도 참 아깝다. 끊다-끊어지다, 가다, 요즘에야 이런 말을 쓰지만, 말의 느낌이 조금씩 다르다. 이런 말을 맘껏 섞어 쓸 수 있다면, 속이 마냥 편할 것 같다. 언어도단, 불교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 오해, 그르 알기도 쉽다. 사람들은 위대한 깨달음의 경지랄까, 말로써는 전할 수 없는 것, 헤아림으로는 넘볼 수도 없는 자리, 뭐 이런 걸 떠올리곤 한다. 초월(超越)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언해불전은 이 말을 '건너 뛰다'라고 새긴다. 깎아지른 절벽도 훌쩍 건너 뛰는 헐크랄까? 그처럼 말과 생각을 건너 뛰라는 걸까? 그럴 수 있을까? 뭐, 말문이 탁 막히고, 머리 속이 하얘지는 때가 있기는 하다.

부처가 사바세계에 나시니, 이 방(方)의 진실한 가르치시는 체(體)는 소리 드롬에 있나니

사바세계는 문자로 하시고, 향적세계는 문자설이 없어 오직 갖가지 냄새로 한다.


사바세계는 지금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세계이다. ‘가르치는 체(體)’, 교체(敎體)란 말을 이렇게 새긴다. 이런 말도 참 무겁다. 엄청 헷갈린다. 교(敎)는 가르침이다. 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이다. 그는 뭔가를 가르쳤다. 체(體)는 몸이다. 글자대로만 푼다면 교체는 ‘가르침의 몸’이다. 하지만 이럴 때의 몸은 '읏듬'이라고 새긴다. 요즘에야 본체니, 실체니, 까다로운 한자말을 쓴다. 국어사전은 읏듬을 '으뜸의 옛말'이라고 한다. '첫째 가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부처는 가르침의 몸, 가르침의 본체, 가르침의 읏듬을 '소리 드롬'이라고 한다. '소리 드롬'은 언어(言語)를 가리킨다. 오래 된 불교의 언어관이다. 언어는 소리이다. 사람의 목구멍을 통해 나오는 소리가 언어이다. 소리를 내고 소리를 듣고, 이게 '말씀의 길'이다. 소리의 길, 말씀을 길을 따라 가르침이 이뤄진다. 그래서 소리와 말씀을 '가르침의 몸, 가르침의 읏듬'이라고 부른다.

사람의 세계에는 '소리 드롬이 읏듬'이다. 문자도 '소리 드롬'으로부터 나온다. 이에 비해 향적세계는 냄새로 읏듬을 삼는다. 향적세계, 이런 말에는 약간의 상상이 필요하다. 개미나 벌의 세계를 상상하면 된다. 그들은 페로몬이라는 물질의 냄새로 소통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읏듬은 '페로몬을 냄새 맡음'이 된다. 냄새가 길이 되고, 냄새가 읏듬이 된다. 그 세계에서는 '가르침의 읏듬'도 '냄새 맡음'이 된다. 언어와 문자, 또는 교체, 이렇게 읽으면 가볍고 쉽다.

성(聲)은 이 교주(敎主)의 말씀의 소리이시고, 명(名)과 구(句)와 문(文)은 이 소리 위에 굴곡(屈曲)을 닐어 나토샴이니


교주는 가르침의 주인이다. 말을 하는 이이다. 그의 말씀은 그냥 소리가 아니다. 소리에 뭔가 담겼다. 명(名)과 구(句)와 문(文)이 말에 담긴다. 명은 물건이나 사람, 또는 법(法)의 이름이다. 구절은 이름과 이름에 차례를 정해 주는 일이다. 문은 구절을 차례대로 이어서 묶는 일이다. 굴곡은 '굽다'라고 새긴다. 소리에는 높고 낮음, 굴곡이 있다. 명구문에도 굴곡이 있다. 뜻의 '다름', 뜻의 차이이다. 전표(詮表)를 '닐어 나토샴'이라고 새긴다. 전(詮)은 (말을) 이르는 일이고, 표(表)는 표현, 나타내는 일이다. 말을 이르는 일은 뜻의 굴곡을 소리의 굴곡에 담는 일이다. 굴곡의 뜻이 담긴 굴곡의 소리를 목으로 내는 일이다. 말을 듣는 일은 굴곡의 소리가 귀청을 때리는 일이다. 그리고 말을 알아 듣는 일은 소리의 굴곡으로부터 뜻의 굴곡을 가려내어 뜻을 알아채는 일이다. 소리 - 명구문 - 뜻, 다 다른 일이다. 이 사이에 두가지 담음이 일어 난다. 이름에 뜻을 담고, 소리에 이름을 담는다. 뜻에는 의미도 있고, 의도도 있다. 이런 일은 '마음이 하는 일'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말씀의 길'과 '마음 녈 곳'을 나란히 이른다. 말씀의 길과 마음 녈 곳, 이런 일이 우리가 사바세계에서 뜻을 주고 받는 수단이다. 그리고 이 길이 우리가 소통하는 읏듬의 수단이다.

남 좇아 감을 가장 아쳐롤지어다.

궁(宮)과 상(商)과 각(角)과 치(徵)로 나를 화(化)하여 늘 빼며 이끌리니, 그래서 남 좇아 감을 가장 아쳐라 했다.


‘아쳗다’는 ‘꺼리다’의 옛말이다. 남을 따라 하고, 좇아가고, 가장 꺼리고 피하라고 한다. 궁상각치우는 이른바 오음(五音), 다섯 소리이다. 소리의 알갱이, 소리의 드틀이다. 소리의 드틀이 나를 찌른다. 다섯 소리는 말씀의 길을 가잘빈다. 말은 소리의 드틀을 타고 사람을 찌른다. 사람에게 어린다. 화(化)는 변화이다. 바꾼다는 말이다. 말이 소리를 타고 나를 바꾼다. 빼며 이끌며, 추견(抽牽), 밖의 사람이 괴뢰를 놀리는 일이다. 말소리가 끈이 되고 줄이 된다. 소리의 끈이 나를 곡도로 바꾸고, 곡도로 놀린다. 남의 말, 잘 들어도 당하고, 흘려 들어도 당한다. 그래서 하는 소리이다. 말을 듣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남의 뜻을 그대로 좇아가는 일, 그걸 조심하라는 말이다.

매(媒)는 꾀 쓸씨니, 다른 무리에 어울워 잃어버리게 할씨라

환화공신(幻化空身)

곡도같이 된 빈 몸


말은 의근(意根)이 꾀를 쓰는 수단이다. 의식의 꾀, 도적의 꾀, 이게 은근 교묘하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한 순간에 까빡 속아 넘어간다. 그래서 말의 꾀를 ‘가장 아쳐라’고 한다. 의식의 꾀, 무엇보다 말의 중매가 큰 일이다. 말이야 말로 꾀의 몸이다. 꾀의 읏듬이다. 화(化)는 환화(幻化)라는 뜻이다. 말이 사람을 곡도로 만든다. 내 몸은 가죽주머니가 되고, 얼굴은 텅빈 빈대가리가 되고 만다. 그래서 하는 소리이다. 말을 하는 사람도 말을 듣는 사람도 조심해야 한다. 바보 되는 것도 순간이다.

내게 공 하나를 다오, 그러면 난 네게 모자를 줄께.


요즘엔 채트봇이 대세이다. 채팅을 하는 로봇, 말을 하는 AI, 인공지능이다. 얼마전 페이스북 연구실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세계의 언론이 난리를 쳤다. ‘싱귤래리티(Singularity)’가 머지 않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수학이나 과학에서 쓰는 말이다. 특이점(特異點)이라고 옮긴다. 특정한 기준을 벗어나는 점(點), 자리나 순간을 가리킨다. 인공지능에서도 이 말을 쓴다. AI의 시대, 4차 산업혁명의 시대, 특이점은 인공지능이 사람의 지능을 넘어서는 지점이다.

알파고는 AI, 인공지능이다. 바둑을 아주 잘 둔다. 이세돌은 입신(立身), 신의 경지에 든 사람이다. 그런데 알파고는 입신도 이겼다. 거기서 멈추지도 않았다. 끝도 없이 공부하고 끊임없이 발전한다. 처음에는 누군가 사람이 알파고에게 바둑을 가르쳤다. 이제는 천하의 입신들이 알파고의 수를 따라 배운다. 알파고가 둔 수가 신수가 되고 정석이 된다. 아시아의 바둑판이 왼통 알파고류를 따른다. 그렇다면 알파고는 더 이상 인공지능이 아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가르쳤다지만, 알파고는 이제 사람의 손을 벗어났다.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익히고, 스스로의 바둑을 만들어 간다. 적어도 바둑의 길에서는 이미 특이점을 넘어섰다.

알파고는 바둑을 둔다. 채트봇은 말을 한다. 대화를 한다. 알파고는 이제 다른 알파고와 바둑을 둔다. 배우고 익히는 길이다. 페이스북 연구실의 채트봇, 밥과 앨리스에게 서로 말을 나누도록 했다. 물론 영어를 쓴다. 공과 모자, 몇 가지 물건을 놓고 협상을 하라고 했다. 밥과 앨리스는 저렇게 대화를 시작했다. 거래, 주고 받기가 쉽게 이뤄지기도 했다. 말이 길어지면서, 밥과 앨리스도 알파고처럼 기술과 전략을 쓰기 시작했다. 벽돌깨기 게임에서 귀퉁이를 먼저 깨트리듯, 깨야 할 자리를 깨기 시작했다. 거래의 기술, 투기(投機)도 나타났다. 배짱도 부리고 속임수도 쓴다. 그러던 중에 일이 벌어졌다. 밥과 앨리스는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밥과 앨리스가 쓰는 말은 아직은 영어였다. 영어 단어들을 쓰고 있었다. 다만 문법도 없었고 논리도 없었다. 그 걸 보던 연구원들이 이 일을 블로그와 SNS에 올렸다. 난리가 났다. 언론의 대세는 살인로봇, 터미네이터였다.

한 로봇이 다른 로봇에게 너무도 복잡한 비밀 언어로 이야기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Secret Language, 비밀언어’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그들만의 언어’라는 말도 나왔다. 밥과 앨리스가 자기들만의 비밀언어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난리, 사람들은 모른다. 이른바 전문가들도 모른다. 밥과 앨리스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지만, 왜 그러는지도 모른다. 어디를, 누구를 겨냥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언론은 ‘언어의 미래’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다. 하여간 그들도 모른다. 언어도 모르고 미래도 모른다. 그래서 두렵다. 그래서 난리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좋은 점도 있겠다. 사람이 됐건 컴퓨터가 됐건 누가 누구에게 ‘지능’을 가르치려면, 먼저 ‘지능’을 알아야 한다. 인공지능도 ‘화(化)’이다. 뭔가를 바꾸는 일이고, 뭔가가 바뀌는 일이다. 기계를 사람처럼 바꾸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사람도 기계처럼 바뀐다. 인공지능을 만들려다 보니 먼저 사람에 대해 알아야 했다. 그래서 인지과학이라는 분야가 인기를 끈다. 이건 좋은 일이다. 말도 새로 배우고, 아롬도 새로 따져 봐야 한다. 사람이 먼저 사람을 배워야 한다. 사람을 알아야 한다. 그 결과는 어떨까? 이런 일이 다 쉽지 못하다.

말이 나를 화(化)하여 늘 빼며 이끌리니


특이점은 화(化)의 순간이다. 곡도가 벌어지는 순간이다. AI 이전에도 이런 일은 늘 있었다. 우리가 쓰는 말도 화(化)의 결과일 뿐이다. 아기가 말을 알아가는 과정도 그렇다. 아기 하나도 그렇지만, 아기가 커가면서 또래들하고 나누는 말도 늘 변한다. 바뀐다. 제 아기의 말을 제 엄마도 알아 듣지 못하는 순간도 문득 온다. 아래의 내 아이, 지금의 내 아이가 아니다. 지금의 내 아이, 미래의 내 아이가 아니다. 알파고니 채트봇이니 이런 말도 마찬가지다. 따라가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냥 따라가다 보면 변화한다. 곡도가 된다. 말이 내 몸을 빼고 이끈다. 그래서 그냥 좇아 가지 말라는 것이다. 마냥 좇아 가는 일, 이게 정말로 고약하다. 말이란 게 본래 이렇다. 곡도로 된 몸은 텅 비었다. 허울좋은 빈대가리, 그게 환(幻)의 뜻이고, 곡도의 뜻이다. 언어도단, 심행처멸, 말로 하는 소통, 조심하란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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